시한부 남편을 위한 거짓 세계

2화 멈춘 초침
찻잔의 김이 가늘게 흔들렸다.
할리는 그 김을 바라보다가 맞은편의 카시안을 올려다봤다. 그는 책을 펼쳐 둔 채 한 장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은 책이 아니라 할리의 손가락과 찻잔 가장자리 사이를 오갔다.
“차가 식겠어요.”
카시안은 그제야 눈을 들었다.
“아직 반도 안 마셨잖아.”
“아침부터 찻잔을 검사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검사하는 게 아니다.”
“그럼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은제 주전자를 들어 할리의 잔에 조금 남은 차를 덜어 냈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맞춘 온도였다.
할리는 잔을 들었다. 차에는 창밖 정원에서 따 왔다는 흰 꽃 향이 났다. 낯선 저택과 낯선 하늘 아래에서 이런 사소한 정성은 이상할 만큼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카시안은 느슨해진 그녀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할리가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눈가의 빛을 살폈고 빵을 반 조각 남기자 손을 멈췄다.
“입맛이 없나?”
“원래 아침은 많이 못 먹어요.”
“여기서는 먹어야 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명령처럼 들릴 법했지만 카시안의 손은 식탁보 아래에서 굳어 있었다.
할리는 빵을 다시 집었다. 그가 안심한 기색을 보이자 도리어 목구멍이 막혔다. 이 세계에 오기 전에도 그는 아픈 몸으로 늘 괜찮다는 말만 했다. 지금은 멀쩡히 걸어 다니면서도 그녀가 숨 쉬는 횟수까지 세는 것 같았다.
“저기요.”
“왜.”
“정원에 가도 될까요?”
카시안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오늘은 방에 있는 편이 낫다.”
“창문만 보고 있으니 답답해요. 저 꽃 이름도 모르겠고요.”
할리가 유리창 너머를 가리켰다. 정원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나뭇잎에는 밤이 남아 있지 않았고 흰 장미는 바람이 불 때마다 똑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완벽함이 어젯밤에는 위로가 됐다.
지금은 무언가가 빠진 풍경처럼 느껴졌다.
카시안은 창밖을 보지 않았다. 할리만 바라봤다.
“내가 같이 갈게.”
“일이 있으시잖아요.”
“미룰 수 있어.”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공작의 일정쯤은 그녀의 산책보다 가벼운 일이라는 듯했다. 할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카시안이 직접 그녀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 줬다. 손끝이 목덜미에 닿았다가 급히 물러났다. 닿는 순간 체온을 확인하려 했다는 걸 숨기려는 움직임이었다.
“추우면 바로 말해.”
“네.”
“어지러워도.”
“네.”
“낯선 소리가 들리면 혼자 확인하지 말고.”
할리는 걸음을 멈췄다.
“낯선 소리요?”
카시안의 입술이 굳었다. 그는 금세 시선을 거두고 복도 쪽으로 앞서 걸었다.
“그냥 하는 말이야.”
하지만 그의 걸음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복도 끝 벽시계가 열한 번 울렸다.
맑은 종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타고 번졌다. 열두 번째 울림이 이어질 즈음 카시안이 갑자기 멈췄다.
할리는 그의 등에 거의 부딪힐 뻔했다.
“카시안?”
대답이 없었다.
벽시계의 초침이 거꾸로 움직이고 있었다.
할리는 처음에는 눈이 피곤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빛 초침은 분명히 숫자 열둘에서 열하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 번. 또 한 번. 되돌아간 초침이 지나간 자리마다 시곗바늘의 그림자가 검게 겹쳤다.
정원으로 향하던 바람도 멎었다.
카시안의 오른손이 천천히 쥐어졌다. 검은 장갑 아래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여기서 나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런데 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왜요?”
“지금 당장.”
카시안은 할리의 어깨를 밀어 뒤로 보내려 했다. 손이 닿기 직전 그의 몸이 휘청였다. 할리는 반사적으로 그 팔을 붙잡았다.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장갑 속에서 손목을 따라 가느다란 금이 번지고 있었다. 상처처럼 붉지 않았다. 깊은 물속에서 새어 나온 달빛처럼 푸른 균열이었다. 그 틈마다 아주 작은 글자 같은 빛이 솟았다가 지워졌다.
카시안이 팔을 빼려 했다.
“보지 마.”
“이게 별일 아니라고 하실 건 아니죠?”
“할리.”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는 경고보다 부탁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할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 놓는 순간 그가 벽시계의 초침처럼 되감겨 사라질 것 같았다.
“아프세요?”
“괜찮아.”
“거짓말이에요.”
카시안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는 고통을 참는 사람이 아니라 들킨 사람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
할리는 장갑을 벗겼다. 카시안이 막을 틈도 없었다. 흰 손목 위의 균열은 손등까지 번져 있었다. 빛이 흐를 때마다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 순간 할리의 손바닥도 뜨거워졌다.
폴리움 스피어를 펼칠 때마다 느꼈던 마력의 감각이었다. 보이지 않는 실이 그녀의 손끝에서 카시안의 균열로 이어졌다. 닿아서는 안 되는 곳에 손을 댄 느낌이 들었지만 손을 떼자마자 빛이 더 거세졌다.
할리는 오히려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싫어요.”
“뭐가.”
“혼자 아픈 척하는 거요.”
카시안이 눈을 떴다. 그의 회색 눈에는 놀람이 먼저 스쳤고 곧 두려움이 번졌다. 할리를 향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괜찮다고 하면 믿어.”
“못 믿어요.”
할리는 그의 손을 더 단단히 붙들었다.
“당신이 사라질 것 같아서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가슴 깊은 곳이 쑤셨다. 살릴 수 없다는 말을 듣던 날의 병실 냄새가 잠깐 코끝에 스쳤다. 카시안은 그날에도 자신보다 할리의 얼굴을 먼저 살폈다.
여기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할리의 손등을 덮었다. 힘은 거의 없었지만 붙잡으려는 마음만은 선명했다.
“사라지지 않아.”
“약속하세요.”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 사이로 벽시계가 마지막으로 크게 울렸다. 초침이 제자리로 튀어 돌아갔다. 복도에 드리웠던 검은 그림자가 걷히고 카시안의 손목에 있던 빛도 장갑 아래로 가라앉았다.
카시안은 숨을 고른 뒤 할리의 손을 떼어 냈다. 조심스럽고 단호한 손길이었다.
“정원은 다음에 가자.”
“카시안.”
“오늘은 안 돼.”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정원 입구의 기둥 뒤에서 루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돈된 기사복 차림이었지만 검집을 쥔 손등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는 바닥의 검은 그림자를 한 번 확인하고 할리에게 짧게 고개를 숙였다.
“마님. 객실로 모시겠습니다.”
“기사님도 방금 봤죠?”
루시안은 답하기 전에 카시안을 봤다. 주군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했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루시안의 입을 막았다.
“봤습니다.”
“저건 뭔가요?”
“저도 이름은 모릅니다.”
카시안의 시선이 날카롭게 날아갔다.
루시안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다만 이 저택에서 이상한 것을 보시면 혼자 따라가지는 마십시오. 문이 열려도요.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요.”
할리의 시선이 복도 끝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는 벽면이 평범한 벽처럼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 너머에 누군가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루시안.”
카시안이 이름을 불렀다.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루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할리에게 내민 손은 예의 바르면서도 어딘가 미안해 보였다.
카시안은 할리를 방까지 데려다줬다. 복도 내내 손목을 감춘 채였다. 방 문 앞에 이르러서야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혼자 움직이지 마.”
“저걸 설명해 주시면요.”
카시안의 시선이 흔들렸다.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저는 알아야 해요. 당신 일인데.”
“그래서 안 돼.”
그는 할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네가 알면 무서워할 거야.”
“당신이 아픈 게 더 무서워요.”
카시안의 손이 멈췄다. 그가 잠시 웃었다. 기쁘지 않은 미소였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할리는 그 말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오늘은 방에 있을게요.”
카시안은 그녀의 대답을 몇 번이나 확인하듯 바라봤다. 그러고도 문 앞을 떠나지 못하다가 할리의 이마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불러.”
문이 닫힌 뒤에도 그의 발소리는 한동안 복도에 남아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카시안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서 잠들었다. 침실을 비우라는 할리의 고집에 그는 같은 방에 있되 떨어져 있겠다고 타협했다. 잠든 얼굴은 낮보다 훨씬 창백했다.
할리는 소파 곁에 앉아 그의 손목을 바라봤다. 장갑은 다시 끼워져 있었지만 푸른 빛이 피부 아래에서 아주 느리게 맥박치는 듯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펼쳤다.
가느다란 은빛 실이 손금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폴리움 스피어의 남은 마력이었다. 낮에 카시안의 균열을 만졌던 자리가 아직 뜨거웠다.
빛은 허공에 흐릿한 문장을 그렸다.
소유자 확인.
할리는 숨을 삼켰다.
그 문장은 하나의 화살표처럼 방 밖을 향했다. 복도 끝. 루시안이 아무도 따라가지 말라고 경고했던 방향이었다.
카시안은 그녀를 지키려 했다. 어쩌면 그 방법밖에 모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혼자 견디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보호가 아니었다.
할리는 잠든 그의 손등에 조심스레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번만은 제멋대로 할게요.”
은빛 문장이 다시 한 번 빛났다.
방문 밖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던 문 하나가 아주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