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당한 성기사의 이단 정화록

2화: 버려진 자들의 진료소
축축한 흙탕물이 카일의 해어진 가죽 장화 틈으로 스며들었다.
처형대 뒤편 배수로를 빠져나온 카일은 허리를 낮춘 채 벨타 빈민가의 미로 같은 뒷골목으로 파고들었다. 처형대를 부순 백염은 가라앉았지만 그 반동은 벼락처럼 무거운 무게로 온몸을 짓눌렀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를 때마다 피 섞인 거친 숨이 차올랐다. 고문으로 뜯겨 나간 등판의 살갗은 넝마 같은 튜닉과 엉겨 붙어 발을 디딜 때마다 생살을 찢어발겼다.
그러나 카일을 가장 깊게 흔드는 것은 육체의 상처가 아니었다.
'어머니…….'
심장 한가운데가 텅 빈 것처럼 서늘한 상실감.
백염이 쇠사슬을 집어삼키던 찰나 머릿속에서 부서져 나간 무언가. 그것은 어린 시절 자신을 안아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떤 음색이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젖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다.
진짜 태양신의 불꽃은 거짓을 태우는 대신 기사의 가장 소중한 기억을 대가로 요구하고 있었다.
"이쪽이다! 핏자국이 골목 안쪽으로 이어진다!"
"배교자 놈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등 뒤 멀리서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군화 소리가 메아리쳤다. 성기사단의 호각 소리가 새벽 안개를 찢으며 사방에서 울렸다. 벨타 교구의 경비대가 빈민가 외곽을 조여오는 신호였다.
카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들의 그늘 속으로 몸을 던졌다. 손에는 경비병에게서 빼앗은 낡은 강철 장검 한 자루뿐이었다.
옷 안감 깊숙이 숨겨 둔 종이 조각을 더듬었다. 핏물에 젖었지만 브라함 주교의 붉은 밀랍 직인은 단단히 박혀 있었다.
이걸 잃어버리면 아이들의 행방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힌다. 죽더라도 지켜내야 했다.
카일은 썩은 목재 냄새가 진동하는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듯 발을 헛디뎠다. 오래전에 버려진 시계탑 지하 공터였다. 빗물 웅덩이 너머로 낮게 드리워진 처마 밑에 작은 불빛 하나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삼나무 문틀 위에는 깎여나간 해바라기와 약초 잎사귀가 조각된 작은 팻말이 걸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쑥과 민트 그리고 쌉싸름한 약초 냄새가 풍겼다.
카일은 벽을 짚고 다가가 피 묻은 주먹으로 문짝을 두드렸다.
쿵 쿵.
두 번의 둔탁한 소리가 지하 공터의 침묵을 깼다. 안쪽에서 발소리가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무거운 빗장이 벗겨지며 문이 살짝 열렸다. 틈새로 은색 머리칼을 단정하게 묶은 젊은 여인의 날카로운 눈매가 드러났다. 앞치마를 두른 손에는 약초 손질용 칼이 들려 있었다.
"누구시죠? 이 새벽에는 환자를 받지……."
여인의 목소리는 거기서 멎었다. 피와 그을음으로 범벅이 된 카일의 처참한 몰골을 마주한 까닭이었다.
카일은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그녀를 응시하며 간신히 입술을 뗐다.
"문…… 닫아라."
말을 마친 카일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대한 바위가 무너지듯 문턱 위로 묵직한 육신이 쓰러져 내렸다.
세라 벨로아는 문지방에 엎어진 거구의 사내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사내의 몸에서는 쇠가 타오르다 식어버린 듯한 화약 냄새와 살갗을 찌르는 서늘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덩치를 문 앞에 버리고 가면 어쩌자는 건가요."
세라는 혀를 차면서도 망설임 없이 사내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빈민가에서 험한 노동자들을 돌봐온 솜씨로 사내를 끌어당겼다. 바닥에 떨어진 낡은 장검까지 들여놓은 뒤 재빨리 문을 닫고 무쇠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지하 진료소 안은 약초 달이는 화로의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세라는 사내를 나무 침상 위로 눕히고 가위로 넝마 같은 튜닉을 갈라냈다.
"……세상에."
드러난 사내의 몸은 처참했다. 쇠사슬과 쇠막대로 내려친 타박상과 열상이 번져 있었고 쇄골에는 불타는 칼날에 스친 화상이 자리 잡았다. 교단의 지하 감옥이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당할 리가 없었다.
그때 세라의 왼손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손목부터 손등까지 하얗게 뒤틀린 화상 흉터. 그것은 과거 황금성좌의 선발 시험에서 살아남았을 때 새겨진 치유의 성흔이었다. 보통 상처에는 반응하지 않던 흉터가 사내의 가슴을 마주하자마자 날카롭게 맥동했다.
사내의 심장 부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순백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악마의 저주가 아니었다. 교단의 타락한 사제들이 읊조리는 가짜 신성과도 다른 태초의 순수한 햇살 같은 온기였다.
오늘 새벽 중앙 처형대에서 파문당한 성기사가 불꽃을 일으켜 탈출했다는 소문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세라의 성흔이 전해오는 감각은 정반대였다. 악마의 기운이라면 흉터가 고통으로 뒤틀렸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손등에 닿는 온기는 상처를 감싸 안는 서늘한 구원이었다.
세라의 시선이 사내의 찢겨진 옷 안감으로 향했다. 피에 절어 삐져나온 양피지 조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꺼내 펼친 순간 세라의 숨이 멎었다.
거기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다니 로만 엘리. 지난달까지 골목 어귀에서 기침약을 지어 먹이던 구휼소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그 옆에는 붉은 먹으로 적힌 은화 스무 닢의 액수와 브라함 주교의 거룩한 태양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이들을…… 돈을 받고 팔아넘긴 거라고?"
세라의 손가락이 떨렸다.
구휼소 사제들은 아이들이 역병에 걸려 요양소로 떠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주교의 직인이 찍힌 이송 명부는 명백한 제물 거래의 장부였다.
침상에 누운 사내가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목숨처럼 품고 있었던 진실. 이 사내는 악마가 아니라 아이들의 행방을 쫓다 모든 것을 빼앗긴 성기사였다.
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파문자를 숨겨주는 것은 즉결 화형에 처해지는 대역죄였다.
하지만 세라는 고개를 저었다.
"살리고 나서 혼내죠."
세라는 지혈초를 빻아 상처에 얹었다. 그리고 화상 흉터가 남은 왼손을 사내의 가슴 위에 가만히 얹었다.
손바닥에서 은은한 백금빛 성력이 흘러나왔다. 으깨진 근육과 혈관들이 서로를 찾아 얽히기 시작했고 카일의 가슴속 백염 잔열이 세라의 치유 성력과 맞닿으며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카일의 거칠던 호흡이 점차 잦아들었다.
두통이 쇠망치처럼 관자놀이를 때렸다.
카일은 번쩍 눈을 떴다. 천장에 매달린 마른 약초 다발들이 들어왔다. 살아있다. 그 자각이 들자마자 카일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칼집은 비어 있었고 몸에는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상체를 일으키려던 순간 옆구리에서 통증이 치솟았다.
"가만히 누워 계시죠. 방금 꿰맨 살점이 도로 터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요."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침상 옆 의자에 앉아 약탕기를 젓고 있는 은발의 여인이 보였다. 탁자 모퉁이에는 카일의 낡은 장검이 기대어 놓여 있었다.
카일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내 품에 있던 종이는 어디 있지?"
여인은 품에서 피 묻은 양피지 조각을 꺼내 들었다.
"브라함 주교의 직인과 구휼소 아이들의 명부. 이걸 찾으시나요?"
카일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증거부터 내놔. 네가 상관할 물건이 아니다."
"제가 상관할 물건이 아니라고요?"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여기 적힌 다니라는 아이는 지난달까지 제가 기침약을 먹이던 아이예요. 그런데 뭐요? 은화 스무 닢? 아이들을 제물로 팔아넘긴 장부를 눈앞에 두고도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요?"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억눌린 슬픔과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카일은 붕대로 감긴 가슴을 짚었다.
"……그 아이들을 아는 건가."
"벨타 빈민가에서 제 손을 거치지 않은 아이는 없어요. 제 이름은 세라예요. 세라 벨로아. 버려진 사람들을 치료하는 돌팔이죠. 이제 그쪽 차례 아닌가요? 처형대를 부수고 도망친 전직 성기사님."
"카일이다. 카일 레오넬."
"알아요. 악마와 결탁한 배교자 카일이라고 방이 붙었더군요."
세라는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하지만 악마의 힘을 쓰는 자의 심장에서 그런 순백의 신성이 피어오를 리 없죠. 제 왼손의 성흔이 당신의 불꽃에 반응했어요. 몸에 깃든 건 진짜 태양의 기운이에요."
"성흔을 지니고 있군. 교단의 사제인가?"
"과거에 성녀 후보였을 뿐이에요. 지금은 교단에서 지워진 낙오자죠."
세라는 왼손의 흉터를 가볍게 매만졌다. 카일은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거짓이나 탐욕은 없었다. 아이들을 향한 걱정과 짓밟힌 진실에 대한 분노만이 있었다.
"브라함 주교는 아이들을 요양원에 보낸 게 아니다. 주교는 아이들의 피와 생명력을 바쳐 무언가를 소환하고 있어. 내가 그 흔적을 찾아 보고했지만 돌아온 건 파문 선고와 처형대뿐이었다."
"……역시 그랬군요."
세라의 입술이 떨렸다.
"구휼소에서 앓아누웠던 아이들의 증상이 이상했어요. 온몸의 혈관이 잿빛으로 물들고 숨을 쉴 때마다 탄 냄새가 났죠. 그건 역병이 아니라 과도한 신성력에 강제로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성력 중독 반응이었어요."
추악한 퍼즐들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천장을 뒤흔드는 거친 발소리와 함께 문짝이 흔들렸다.
"문 열어라! 교단 경비대다!"
진료소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배교자 카일이 이 골목으로 숨어들었다는 목격담이 있다! 당장 열지 않으면 부수겠다!"
문짝을 발로 차는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카일은 통증을 무시한 채 침상 옆의 장검을 집어 들었다.
"숨어라. 내가 나가서 베어 넘긴다."
"미쳤어요? 방금 지혈한 상처예요. 검부터 뽑아 드는 게 성기사들의 유일한 대화법인가요?"
세라가 카일의 앞을 막아서며 가슴을 세게 밀쳤다.
"경비병들이 들이닥치면 너까지 공범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그러니까 들키지 않으면 되잖아요."
세라는 지체 없이 카일을 약초 건조대 뒤편 비밀 격벽으로 밀어 넣었다.
"들어가서 숨도 크게 쉬지 마세요. 제가 부르기 전까지는 절대 나오면 안 돼요."
카일이 격벽 속으로 몸을 숨기자 세라는 벽을 닫고 말린 독미나리와 쑥 다발들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화로로 다가가 유황 가루와 마른 세이지 한 줌을 불씨 위에 던졌다.
치이익!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캐한 회색 연기가 진료소를 채웠다.
쾅!
문이 덜컹거리자 세라는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콜록! 대체 무슨 소란이십니까 경비대원님들?"
문밖에는 번쩍이는 흉갑을 두른 경비병 셋이 서 있었다. 수색대장이 안으로 들어오려다 끼쳐오는 매캐한 연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커흑! 쿨럭! 망할 이게 무슨 냄새냐!"
"전염병 의심 환자의 고름을 째고 환부를 소독하는 연기예요. 쥐벼룩 독이 번진 환자라 불을 피워 태우지 않으면 온 골목에 역병이 돌거든요. 직접 검사해 주시겠다면 기꺼이 비켜드리겠습니다."
세라가 한쪽으로 비켜서며 진료소 안쪽을 가리켰다. 피를 닦아낸 붉은 헝겊들과 잿빛 대야가 널브러져 있었고 매캐한 유황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경비병들의 얼굴이 질렸다.
"빌어먹을 계집이 어디서 수작이야! 덩치가 크고 온몸에 피를 흘리는 죄인을 보지 못했나?"
"글쎄요. 아침부터 실려 온 환자라면 저기 누워 있는 하수도 청소부 영감뿐인데요. 쥐에 물려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중인데 대원님께서 대신 상처를 들여다보시겠어요?"
세라가 핏물이 떨어지는 거즈를 들고 다가가자 수색대장은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퉤! 이런 구더기 소굴에 기사 놈이 숨어들 리가 없지. 주교님의 명령이다. 파문자 카일을 숨겨준 자는 즉결 화형이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당장 보고해라!"
"빛의 가호가 함께하길 빕니다."
세라가 고개를 숙이자 경비병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계단 위로 허둥지둥 올라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자 세라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연기를 빼낸 뒤 비밀 벽을 두드렸다.
"나오세요. 개들은 돌아갔어요."
벽돌이 밀려나며 카일이 걸어 나왔다. 장검을 쥔 그의 눈동자에서 경계심은 풀려 있었다.
"능숙하더군."
"빈민가에서 살아남으려면 사제들과 경비병들을 속이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까요. 브라함 주교가 벨타 전역에 계엄령을 내렸어요. 수색망은 점점 좁혀올 거예요. 여기서 오래 버틸 수는 없어요."
카일은 탁자 위의 피 묻은 명부 조각을 응시했다. 심장 깊은 곳의 백염은 여전히 고요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내 이름을 훔친 자들을 불태워라.'
카일은 장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서늘한 금속음이 울렸다.
"아이들이 이송되는 날짜가 언제지?"
세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틀 뒤 밤이에요. 그믐달이 뜨는 날 구휼소 뒤편 폐광 배수로를 통해 마차가 움직인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틀인가."
카일은 고개를 들었다. 상처로 얼룩진 얼굴 위로 단단한 결의가 떠올랐다.
"충분하다. 몸을 추스르고 그 마차를 막는다."
"혼자서는 무리예요. 구휼소 경비대는 일반 병사들과 달라요. 주교의 사병들이 지키고 있죠. 저도 가겠어요. 아이들의 상태를 아는 건 저뿐이고 길을 아는 것도 저예요."
카일은 그녀의 단호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물러설 기색이 없는 눈동자였다.
"위험하다."
"살리고 나서 혼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세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쳤다.
"아이들을 살리고 나서 교단이든 주교든 마음껏 불태우세요. 그 뒷감당은 제가 도울 테니까요."
타락한 교단이 버린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짜 태양의 불꽃을 품은 파문당한 기사와 버려진 성흔을 품은 치료사. 어둠에 물든 도시 벨타에서 거짓을 정화하기 위한 첫 번째 성약이 조용히 맺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