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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당한 성기사의 이단 정화록1화

파문당한 성기사의 이단 정화록

파문당한 성기사의 이단 정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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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내 이름을 훔친 자들을 불태워라

축축하고 비린 새벽 안개가 자갈 깔린 벨타 광장 위로 낮게 깔려 있었다.

아우렐 왕국 동부 변방의 소도시 벨타. 국경과 맞닿아 늘 거친 바람이 몰아치는 이곳 중앙 광장에는 날이 밝기도 전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광장 한복판에 높게 세워진 목조 처형대였다.

처형대 중심 기둥에 묶인 쇠사슬이 살갗을 파고들 때마다 차가운 쇳소리가 울렸다. 카일 레오넬은 턱 끝을 타고 떨어지는 피를 말없이 삼켰다.

열두 살에 수련검을 잡고 스물일곱이 될 때까지 단 하루도 벗지 않았던 백은 갑옷은 이미 산산조각 났다. 가슴팍에 새겨져 있던 태양 성표는 정과 망치질에 짓이겨져 형체를 잃었고 정의를 지키겠노라 맹세했던 성검은 사흘 전 종문 재판정 바닥에서 두 동강 났다.

지금 카일의 몸에 남은 것은 피와 흙먼지로 얼룩진 넝마 같은 리넨 튜닉 한 장뿐이었다. 굵은 밧줄과 강철 사슬이 온몸을 옥죄어 숨을 들이쉬는 순간마다 갈비뼈가 삐걱거렸다.

"죄인 카일 레오넬은 고개를 들어 교단의 판결을 들어라!"

처형대 계단을 밟고 올라선 사제 엘반이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치며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벨타 교구를 다스리는 브라함 주교의 수석 보좌이자 이번 즉결 처형을 총괄하는 대리인이었다.

엘반의 하얀 비단 사제복 위에는 금실로 수놓인 태양관 문양이 아침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그 화려함과 처형대에 묶인 카일의 처참한 몰골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뚜렷한 권력의 격차를 과시하고 있었다.

"전직 성기사 카일 레오넬은 들어라. 너는 태양신 솔라리스의 교단이 위임한 기사의 직무를 저버리고 불경한 독단과 항명으로 위계를 어지럽혔다. 나아가 신성한 성물을 훼손하고 동료 기사들을 해치려 한 중죄를 저질렀다."

엘반의 목소리가 광장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쌀쌀한 새벽 공기 속에서 주민들은 숨을 죽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교단은 언제나 절대적인 법이었고 주교의 말씀은 곧 신의 뜻으로 통했다.

"이에 거룩한 황금성좌의 권능과 자비로우신 브라함 주교님의 명에 따라 너의 모든 성직과 성기사 서임을 영구히 박탈한다. 너는 이 자리에서 완전히 파문되었음을 선언한다."

엘반은 품에서 묵직한 쇠망치를 꺼내 들더니 처형대 바닥에 놓여 있던 카일의 서임 인장을 내리쳤다.

콰창!

푸른빛을 내뿜던 신성 인장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그것은 한 인간이 평생 바쳐 온 신앙과 명예를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도륙하는 의식이었다.

"또한 교단의 순결을 더럽힌 배교자에게 태양의 정화를 내린다. 너의 부정한 육신은 성화(聖火) 속에서 남김없이 불타 재가 될 것이며 영혼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카일은 굳어붙은 핏자국으로 뻣뻣해진 입술을 간신히 뗐다.

"교단의 순결이라."

쉰 소리가 섞인 목소리였으나 광장의 소음을 가르고 명확하게 울렸다. 칠흑 같은 흑발 아래로 번뜩이는 카일의 눈빛은 결코 꺾이지 않은 맹수와 같았다.

"묻겠다. 브라함 주교의 지하 제단으로 끌려간 구휼소의 고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엘반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입을 다물지 못할까! 파문당한 죄인 놈이 감히 거룩한 주교님의 존함을 입에 올리느냐!"

"변방의 아이들이 역병에 걸렸다는 거짓 구실로 하나둘 사라졌다. 내가 찾아낸 구휼소 비밀 창고의 양피지에는 아이들의 이름 옆마다 은화의 액수가 적혀 있더군. 거기 찍힌 붉은 인장은 주교의 직인이었다. 그것도 신의 거룩한 뜻인가?"

카일은 찢겨 나간 옷 안감 깊숙이 숨겨 둔 종이 조각의 바스락거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혹독한 고문과 심문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지켜낸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동부 교구의 고아들이 제물로 바쳐지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을 때 카일은 곧바로 상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정당한 조사나 지원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파견된 감사관들은 문서를 묵살했고 가장 믿고 의지했던 성기사단 부단장 루시안마저 고개를 돌린 채 침묵을 택했다.

제도를 믿고 법을 따르려 했던 성기사는 하룻밤 사이에 신성모독의 누명을 쓰고 처형대로 끌려왔다.

"어리석은 놈. 죽는 순간까지 교단을 향해 독을 뿜는구나."

엘반이 들고 있던 쇠막대로 카일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카일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터진 입술 틈으로 검붉은 피가 처형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뼛속까지 울리는 격통 속에서도 카일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엘반을 노려보았다.

"증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너희가 신의 이름을 참칭해 저지른 죄악도 사라지지 않아."

"그 입을 영원히 닫아주마."

엘반이 이를 갈며 손짓하자 처형대 뒤편에 서 있던 거구의 처형인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검은 가죽 두건을 뒤집어쓴 처형인의 손에는 날이 넓은 대검과 놋쇠 단지가 들려 있었다. 단지 안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성유를 부어라."

엘반의 싸늘한 명령에 처형인이 단지를 기울였다.

카일의 어깨와 쇄골 위로 걸쭉하고 차가운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경전에 적힌 성스러운 올리브유나 백향목 기름이 아니었다. 동물성 기름에 유황과 독풀의 진액을 뒤섞어 만든 저열한 인화 물질이었다. 피부에 닿자마자 살갗이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

"불을 붙여 정화하라."

처형인이 부싯돌을 세게 튕기자 시뻘건 불꽃이 횃불 끝에 옮겨붙었다. 검은 그을음이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카일은 고개를 들어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뒤에 숨은 태양은 그 어떤 온기도 빛도 내려주지 않았다.

'솔라리스시여.'

성기사로 서품을 받던 열여덟의 그날부터 심장에 새겨 두었던 주님의 이름이었다. 약한 자를 지키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겠노라 피로 맹세했던 성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교단이 썩어 곪아 터지고 고아들의 피가 지하 제단을 적시는 동안에도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계시는 침묵했고 타락한 사제들은 금관과 성물을 휘두르며 자신들의 탐욕을 신의 뜻이라 포장했다.

진짜 신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기사가 이토록 비참하게 버림받는 것이 정녕 신의 섭리란 말인가.

처형인이 활활 타오르는 불붙은 대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검붉은 불길이 카일의 목덜미를 베어 넘기기 위해 허공을 갈랐다.

"신의 심판을 받아라!"

엘반의 광기 어린 고함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화염의 뜨거운 열기가 목덜미를 바짝 죄어왔다. 검날의 서슬이 살갗을 파고드는 순간 끔찍한 작열감이 전신을 덮쳤다.

숨이 턱 막히는 그 찰나였다.

쿵!

심장이 통째로 내려앉는 듯한 거대한 파동이 카일의 가슴 한가운데를 강타했다.

귀청을 찢을 듯하던 엘반의 외침도 군중의 웅성거림도 살을 지지는 매캐한 기름 냄새도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시간이 얼어붙은 듯한 완전한 정적 속에서 메말라 있던 카일의 영혼 밑바닥으로부터 태초의 태양이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단이 읊어대던 가식적인 기도문 따위가 아니었다. 두꺼운 경전에 빼곡하게 적힌 수천 줄의 교리도 아니었다.

오직 하나의 짧고 준엄한 문장이 벼락처럼 영혼을 꿰뚫고 울려 퍼졌다.

[내 이름을 훔친 자들을 불태워라.]

화르륵!

카일의 가슴팍 정중앙에서 눈이 멀 것 같은 백색의 불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붉은빛도 검붉은 그을음도 없는 지극히 순수하고 찬란한 순백의 화염이었다.

"크아아악?!"

카일의 목을 베려던 처형인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튕겨 나갔다.

대검에 묻어 있던 가짜 기름 불길은 백염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처형인이 들고 있던 놋쇠 단지와 강철 검날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달아오르더니 쇳물이 되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익!

순백의 화염은 거센 파도처럼 카일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카일의 살갗이나 넝마 같은 튜닉은 태우지 않았다. 대신 카일의 찢어진 상처에서 흐르던 피를 순식간에 지혈하고 뼈마디를 쑤시던 고통을 말끔히 씻어내며 그를 옥죄고 있던 강철 쇠사슬만을 무서운 기세로 집어삼켰다.

두껍고 단단하던 사슬 고리들이 백염 속에서 바스러진 모래알처럼 붉은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뭐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엘반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결박에서 완전히 풀려난 카일의 발밑으로 백염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나무 기둥에 금박으로 화려하게 새겨져 있던 교단의 태양 성표가 백염의 혓바닥에 닿자마자 검게 뒤틀리며 불타올랐다.

거짓 맹세와 위조된 성물 그리고 신의 이름을 사칭한 부패만을 정확하게 가려내어 집어삼키는 진짜 태양신의 심판이었다.

"괴물이다! 파문자 놈이 사악한 흑마술을 부린다!"

"경비대! 당장 저놈을 창으로 꿰뚫어라!"

엘반의 찢어지는 비명에 처형대 아래를 포위하고 있던 무장 경비병들이 창을 곧추세우고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카일은 가벼워진 두 발로 처형대 상판을 딛고 섰다.

심장 깊은 곳에서 피어난 백염의 온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굽이쳤다. 과거 성기사 시절 느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정순하고 날카로운 신성이 온몸의 근육과 신경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 한구석에서 무언가 날카롭게 깎여 나가는 듯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보았던 따뜻한 햇살의 기억 하나가 백염의 불길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듯한 기묘한 상실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대가를 곱씹으며 멈추어 설 여유가 없었다.

"비켜라."

카일이 백염을 머금은 처형대의 굵은 난간 기둥을 한 손으로 뜯어내듯 휘둘렀다.

콰아앙!

백색의 화염을 두른 거대한 목재가 쇄도하던 경비병 셋을 한꺼번에 후려쳤다. 굉음과 함께 경비병들이 피를 토하며 허공으로 날아갔고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던 처형대 상판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으악! 불이다!"

"도망쳐라! 처형대가 무너진다!"

광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모여 있던 군중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사제 엘반은 무너져 내린 목재 파편에 다리가 깔려 바닥을 뒹굴며 추하게 비명을 질렀다.

카일은 바닥에 쓰러진 경비병의 허리춤에서 낡은 강철 장검 한 자루를 낚아채듯 뽑아 들었다.

그리고 조금의 지체도 없이 처형대 뒤편의 깊은 석조 배수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쾅!

자갈 섞인 배수로 바닥을 구르며 어깨에 충격이 전해졌지만 카일은 멈추지 않았다. 옷 안감에 숨겨둔 고아 이송 명부를 꽉 틀어쥔 채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벨타의 미로 같은 뒷골목 속으로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등 뒤 멀리서 성기사단의 다급한 호각 소리와 고함이 메아리쳐 왔다.

"놈이 도망쳤다! 파문자 카일을 생포하라!"

"동부 관문을 닫고 골목을 전부 봉쇄해라!"

카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 묻은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심장 깊숙한 곳에는 아주 작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백색의 불씨 하나가 고요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진짜 신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내 이름을 훔친 자들을 불태워라.'

카일의 흑색 눈동자에 차가운 결의가 깃들었다.

교단은 그를 배신하고 거짓으로 파문했다.

하지만 진짜 태양은 그에게 거짓을 태워버릴 불꽃을 내렸다.

파문당한 기사의 정화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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