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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2화

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

전 남친과 공동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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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조건의 무게

회의실 안에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 소리와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대표님, 원료 공급 단가는 다음 달 결제 때 조정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인상안을 밀어붙이시면 저희 생산 일정 전체가 꼬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현장 미팅 때 다시 말씀 나누시죠.”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맺은 강도윤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는 넥타이 없는 셔츠 소매를 늘 그렇듯 한 번 접어 올린 상태였다. 피로가 쌓였을 때 얹히는 특유의 미간 주름도 여전했다.

도윤이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선 윤서진을 바라보았다. 3년 만에 마주친 시선이었다.

“왔어?”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짧은 인사였다. 도윤의 목소리는 너무나 무던해서 지난 3년이라는 세월이 마치 어제 퇴근하고 오늘 아침 다시 출근한 사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서진은 손에 쥐고 있던 계약서를 회의실 중앙의 원목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종이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닿았다.

“이름, 설명해.”

서진은 감정을 담지 않으려 문장을 짧게 끊었다. 도윤은 테이블 위의 서류를 흘끗 본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은 채 똑바로 앉았다.

“투자사 한태우 파트너 쪽 조건이었어. 리브랜딩 총괄 권한을 가진 대표가 정식으로 취임해 공동서명권을 가져야 시드 투자 18억 원을 집행하겠다고 했거든.”

“그 조건에 왜 내 이름이 들어가 있냐고 묻는 거야.”

“모아의 브랜드를 가장 빠르게 진단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을 찾다 보니 네 이름이 나왔어.”

도윤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사과도 없었고 변명도 없었다. 오직 숫자와 경영 판단만 남겨둔 건조한 어조였다. 서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서진의 속을 얽어매었다.

“내 동의도 안 받고 투자 계약서에 내 이름을 미리 인쇄해 두는 게 도윤 씨가 일하는 방식이었어?”

“미리 인쇄해 둔 건 투자사 법무팀 서류 양식이야. 오늘 네가 거절하면 계약안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협상해야 해.”

도윤이 피곤한 기색으로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안경을 벗은 그의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너한테 부담 주려던 건 아니야. 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일?”

서진의 입가에 실소가 번졌다.

“사적인 감정은 빼고 계약서 조건만 보라는 뜻으로 들리네.”

“그게 서로에게 깔끔하니까.”

도윤은 안경을 다시 쓰며 서류 봉투에서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모아의 월별 현금흐름표와 원자재 재고 현황 요약본이었다. 붉은색으로 표시된 수치들이 기말 잔액란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다음 달 용기 수거용 트럭 운용비와 천연 향료 원재료 대금 결제가 밀려 있어. 이번 투자금 18억 원이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모아는 석 달 안에 문 닫아.”

“그래서 날 벼랑 끝에 같이 세운 거야?”

서진이 현금흐름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투자 조항을 똑똑히 읽었어. 내가 정식 취임한 뒤 사임하면 투자자가 경영개입권을 행사하고 우선매수권을 발동한다고 적혀 있더군. 이건 나를 대표로 존중하는 조항이 아니야. 나를 묶어 둬서 회사 퇴로를 막아 버리는 닻이지.”

“닻이 아니라 회사에 필요한 사람을 세운 거다.”

도윤이 똑바로 서진을 응시했다.

“계약서 7조를 보면 주요 결정은 모두 공동서명으로 하게 되어 있어. 내가 독단으로 회사를 운영하지 못하도록 너한테도 완벽한 거부권이 부여된다는 뜻이야.”

“그 거부권을 행사하려면 내가 이 회사 공동대표로 취임해야 하잖아.”

서진은 의자에 깊숙이 앉으며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3년 전 두 사람이 헤어지던 날에도 도윤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굴면서 정작 중요한 정보는 나누지 않던 얼굴.

“도윤 씨가 나를 불렀든, 투자자가 내 이름을 요구했든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가 왜 이 짐을 같이 져야 하는지야. 내가 모아를 살려야 할 이유가 있나?”

도윤의 입술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는 테이블 위의 서류를 만지작거리다 낮게 말했다.

“네가 3년 전에 처음 스케치해 줬던 그 브랜드 문장,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서진의 손끝이 일순간 굳었다. 모아 사무실 입구 서류를 보며 메모장에 적었던 문장. '덜 쓰는 생활이, 덜 불편한 생활이 되게 한다.'

하지만 서진은 과거의 추억이나 감정에 휘말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과거 팔이는 하지 마.”

서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끄적인 메모 때문에 내가 지금 망해가는 회사에 밧줄을 대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착각이야.”

“그럼 네가 원하는 조건이 뭐야.”

도윤이 피하지 않고 물었다. 그 역시 서진이 단순히 감정적 발끈함으로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서진은 일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명확한 대가를 요구하는 사람이었다.

서진은 회의실 테이블 중앙으로 몸을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 뼘 정도로 좁혀졌다.

“공동대표 받아들일게.”

도윤의 눈빛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서진은 쉬지 않고 다음 문장을 이어 갔단.

“대신 조건이 있어. 모아의 브랜드 총괄 권한은 나한테 완벽하게 넘겨.”

“완벽한 권한이라니.”

“브랜드 정체성 재정립, 리브랜딩 방향, 모든 대외 메시지와 마케팅 캠페인, 고객 소통 방식에 대한 전권. 그리고 그에 따른 예산 집행 우선순위 결정권. 내 기획에 도윤 씨가 공동서명권을 핑계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마.”

도윤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재무와 물류 생산망은 회사의 뼈대다. 그 영역과 마케팅 예산이 엉키면 당장 공급망 결제가 끊겨.”

“생산과 재무는 도윤 씨 영역으로 인정할게.”

서진은 단호하게 그어 내렸다.

“도윤 씨가 숫자를 다루고 공급망을 챙겨. 내가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대신 모아가 고객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어떤 언어로 말할지는 내가 결정해. 서로의 영역에 절대 침범하지 않는 것. 공동대표를 하겠다면 그게 내 조건이야.”

회의실 안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도윤은 서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윤서진은 3년 전 이별의 상처로 돌아서던 여인이 아니었다. 자기 분야에서 완벽한 주도권을 쥐고 대등한 조건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은 완전한 전문가였다.

도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브랜드 및 고객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전권은 윤서진 대표에게 위임한다. 단, 지출 규모가 계약상 제한액을 넘을 때는 사전 협의를 거친다.”

“협의지, 허락이 아니야.”

서진이 덧붙이자 도윤이 아주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승낙의 표시였다.


서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볼펜을 집어 들었다. 시드 투자 계약서 동의 서명란의 빈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진은 망설임 없이 '윤서진' 석 자를 정갈하게 적어 내렸다.

서명이 끝나자 도윤이 계약서를 가져갔다. 서류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 끝이 아주 잠깐 스쳤다. 차갑고 건조한 촉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손을 떨어뜨렸다.

도윤이 회의실 문을 열자 바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민재와 하린의 시선이 동시에 쏠렸다.

“어떻게 됐어?”

민재가 묻자 서진이 먼저 걸어 나오며 짧게 답했다.

“취임하기로 했어. 대신 모아의 모든 브랜드 메시지와 고객 소통은 제 결재를 거칩니다.”

민재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하린 역시 두 눈을 반짝이며 서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잘됐어요! 디렉터님... 아니, 대표님!”

도윤도 서류철을 품에 안은 채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이민재 이사, 투자사 법무팀에 서명 완료 서류 전달하고 시드 투자금 1차 집행 일정 확정받아.”

“알았어. 지금 바로 처리할게.”

그때 하린의 노트북 화면에서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하린이 화면을 확인하다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대표님, 투자사 한태우 파트너님한테 메일이 왔는데요...”

“내용이 뭔데?”

도윤이 묻자 하린이 읽어 내려갔다.

“'윤서진 공동대표 취임 절차 완료를 확인했습니다. 계약서 12조에 따라 정식 취임일로부터 90일 이내에 재구매율 상승 및 브랜드 신뢰도 지표 1차 보고서를 이사회에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과 미달 시 우선매수권 협의가 즉시 개시됩니다.' ...라고 적혀 있어요.”

하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90일. 18억 원의 투자금이 들어오는 대신, 모아의 생존을 증명해야 할 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진과 도윤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3년 만에 재회한 전 남친과 전 여친의 머뭇거림은 온데간데없었다. 두 사람은 이제 회사의 운명을 걸고 투자자의 압박에 맞서야 하는 12개월의 동업자였다.

서진이 하린을 돌아보며 나직하지만 명확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하린 씨, 내일 아침 9시에 전 직원 브랜드 진단 회의 소집해 주세요. 모아가 왜 고객의 신뢰를 잃었는지부터 하나씩 뜯어봅시다.”

도윤 역시 서진을 향해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덧붙였다.

“재무와 생산 재고 보고서도 아침 미팅 전까지 정리해 두지.”

두 공동대표의 첫 번째 일침이 모아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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