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 옆집에 이사 왔습니다

1화 [벽 하나 너머]
한윤서는 현관 바닥에 붙은 보호 비닐부터 떼어 냈다.
비닐 끝이 손가락에 걸려 한 번 끊어졌다. 윤서는 남은 조각을 다시 잡아당겼다. 새 마룻바닥이 오후 빛을 받아 옅게 반짝였다.
오래 살 집은 아니어도 괜찮았다. 하린이 편히 잠들고 윤서가 누구의 퇴근 시간에도 맞추지 않은 저녁을 만들 수 있으면 됐다.
“엄마, 이 상자는 내 방 거야?”
거실 한가운데에서 하린이 물었다. 아이는 노란 토끼 가방을 멘 채였다. 가방 안에는 물병과 색연필 몇 자루가 들어 있을 뿐인데도 오늘 꼭 메고 오겠다고 우겼다.
“응. 침대 옆에 둘 거야. 먼저 신발 벗어 놓고.”
“토끼도 새집 구경해도 돼?”
“토끼는 신발 안 신고 들어오니까 돼.”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윤서는 잠깐 웃었다.
웃음은 거실 벽에 기대 둔 도면 통을 보자마자 옅어졌다.
다음 주 목요일에는 모과하우스 1층 라운지 리모델링 제안 면접이 있었다. 이 건물에 사는 사람들이 첫 클라이언트가 될 수도 있었다. 이사 상자 사이에 도면을 세워 둔 건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도망쳐 들어온 집이 아니었다. 윤서가 자기 이름으로 일을 시작할 장소였다.
“엄마, 여기 창문 엄청 커.”
하린이 거실 창에 이마를 가까이 댔다. 골목 건너 세탁소의 바랜 간판과 낮은 담장 위 화분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창문은 손으로 밀지 마. 잠금부터 볼게.”
윤서는 주머니에서 줄자를 꺼냈다. 창턱 높이와 손잡이 위치를 확인하고 하린의 키를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아이가 혼자 열지 못할 정도면 충분했다.
그때 복도에서 바퀴 끄는 소리가 났다.
낮고 무거운 소리였다. 누군가 커다란 상자를 문턱에 넘기고 있었다.
하린이 현관 쪽으로 뛰었다.
“옆집도 이사하나 봐!”
“문 열지 말고 기다려.”
윤서는 아이보다 먼저 현관에 닿았다. 문을 조금 열자 2층 복도 끝 창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길게 누워 있었다. 맞은편 202호 앞에는 검은 여행 가방 하나와 아직 테이프도 뜯지 않은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상자를 들던 남자가 허리를 폈다.
윤서의 손이 문고리에서 멈췄다.
강도현이었다.
도현도 움직이지 않았다. 짙은 회색 티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말려 있었고 손등에는 포장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해외에 있던 사람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화 너머에서 들었을 때보다 훨씬 갑작스러웠다.
그가 먼저 윤서의 이름을 불렀다.
“윤서.”
하린은 윤서의 옆구리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눈이 동그래졌다.
“아빠?”
도현의 시선이 아이에게 내려갔다. 무릎을 굽히려던 그는 윤서를 봤다.
윤서는 그 뜻을 알았다. 안아도 되냐는 말 없는 질문이었다.
목 안쪽이 타들어 갔다. 하린은 아빠를 본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기쁨을 윤서의 당황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손만 깨끗하면.”
도현은 바로 복도 끝 세면대로 갔다. 비누 거품을 충분히 내고 손을 닦은 뒤에야 하린 앞에 앉았다.
“하린아.”
“아빠가 왜 여기 있어?”
“여기로 이사 왔어.”
“몇 호?”
도현이 202호 문을 가리켰다. 하린은 숫자를 한 번 읽고 윤서를 돌아봤다.
“엄마는 201호잖아.”
“그러네.” 도현이 낮게 말했다.
하린은 그제야 그에게 달려갔다. 도현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렸지만 얼굴을 파묻지는 않았다. 윤서 쪽을 한 번 더 본 뒤에야 하린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윤서는 그 조심스러움이 고마운지 미운지 판단하지 못했다. 그가 늘 이렇게 물어봤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날카롭게 스쳤다.
“언제 돌아왔어?”
“어제. 파견은 끝났어.”
“여기가 회사 근처야?”
도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기도 하고.”
대답 뒤에 남은 말이 있었다. 윤서는 묻지 않았다. 지금은 복도였고 하린은 도현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아이 앞에서 어른들의 빈자리를 꺼낼 생각은 없었다.
“짐 많아?” 도현이 물었다.
“괜찮아.”
“현관 앞 상자만 안으로 넣어 줄게.”
“됐어. 기사님이 다시 올라올 거야.”
윤서가 문을 닫으려는 순간 현관 옆에 둔 상자가 옆으로 기울었다. 안에서 유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윤서가 손을 뻗기도 전에 도현이 상자 아래를 받쳤다.
“이건 내가 들게.”
“도현아.”
“깨지면 위험해.”
그 말은 반박하기 어려웠다. 도현은 하린을 바닥에 내려놓고 상자를 들었다. 상자 겉면에는 ‘주방 유리’라고 윤서의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는 묻지 않고 윤서가 손으로 가리킨 자리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딱 현관 안쪽이었다. 거실 쪽은 한 발도 넘지 않았다.
윤서는 그의 운동화가 새 바닥을 밟는 소리를 들었다. 과거에는 당연했던 발소리였다. 이제는 허락한 만큼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소리였다.
“여기까지.”
윤서가 말했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하린이 그의 바지자락을 잡았다.
“아빠 집도 보고 싶어.”
윤서는 아이의 손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보지 않으려 했다. 대신 신발장 위에 올려 둔 열쇠 두 개를 바라봤다. 하나는 자신의 것, 하나는 하린이 더 자라면 맡길 것이었다.
“오늘은 안 돼.”
하린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왜?”
“오늘은 우리 집 정리하는 날이야. 아빠도 자기 집을 정리해야 하고.”
“잠깐만 보면 안 돼?”
도현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아빠가 정리 끝내고 사진 보내 줄게. 하린이가 보고 싶은 건 내일 엄마랑 먼저 이야기하자.”
윤서는 그 말에 시선을 들었다. 도현은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이를 설득하는 일도 윤서에게 넘기지 않았다. 다만 기다리겠다는 듯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면접교섭 일정 말고는 미리 상의해.”
윤서가 또박또박 말했다.
“옆집이라고 달라지는 건 아니야.”
도현의 얼굴에서 기쁨이 아주 조금 지워졌다. 대신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그래. 내가 먼저 물을게.”
“하린이가 혼란스러우면 안 돼.”
“알아.”
짧은 대답이었다. 예전 같으면 윤서는 왜 늘 알기만 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알았다면 왜 혼자 결정했느냐고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은 그의 사정을 듣는 일이 아니었다. 하린의 침대를 조립하고 내일 아침 먹을 그릇을 꺼내는 일이었다.
도현이 한 박자 뒤에 말했다.
“내일 저녁에 통화할 수 있어? 하린이랑 만나는 방식은 정해야 할 것 같아.”
윤서는 잠시 생각했다. 거절한다고 해서 복도 맞은편의 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피한 만큼 하린의 기대만 커질 수도 있었다.
“하린이 자고 나서. 열 시 전까지.”
“응. 그때 전화할게.”
도현은 하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린은 두 손으로 아빠의 손을 붙잡으려다 윤서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내일 사진 꼭 보내 줘.”
“약속.”
202호 문이 닫혔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윤서는 문을 완전히 닫지 못한 채 한동안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얇은 문 하나와 벽 하나가 생겼다고 해서 과거까지 나뉘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
하린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아빠가 옆집이면 맨날 볼 수 있어?”
윤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의 방으로 가 상자에서 하늘색 이불을 꺼내 침대 위에 폈다. 작은 방이 아직 낯설어서 이불 한 장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맨날 보는 건 약속해야 하는 일이야.”
“약속하면 돼?”
“엄마랑 아빠가 하린이가 편한지 먼저 생각하고 정할 거야.”
하린은 이불 무늬를 한참 만졌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말해도 돼?”
“물론이지.”
“나는 아빠 집 구경하고 싶어.”
“알겠어. 그 말은 엄마가 기억할게.”
윤서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하린의 손끝은 따뜻했다. 적어도 이 아이가 어른들의 표정을 읽으며 다음 약속을 기다리게 하지는 않겠다고 윤서는 마음속으로 정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갈 무렵 윤서는 거실 불을 켰다. 창에 비친 집은 아직 상자 투성이였다. 그래도 식탁 하나와 아이의 침대 하나는 제자리를 찾았다.
맞은편 벽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망치 소리가 한 번 났다.
윤서는 도면 통을 열어 라운지 평면도를 꺼냈다. 사람은 가까이 살아도 서로의 집을 함부로 넘지 않아야 했다. 공간을 만들 때도 같은 원칙이었다.
벽을 세우는 건 밀어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편히 문을 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윤서는 현관 쪽을 보지 않고 연필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