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교수가 제자들을 너무 잘 키움

2화: 검의 소음이 걷히는 순간
쿨럭, 쿨럭!
어둑한 새벽 공기 속에서 유진 에르하르는 격렬한 기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비릿하고 차가운 액체가 치밀어 올랐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틈새로 검붉은 핏물이 번져 나왔다.
“하아…… 젠장.”
유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심장 주변을 옥죄는 지독한 냉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체온이 순식간에 떨어지며 손끝이 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렸다.
소매를 걷어 올리자 왼쪽 손목에 깊게 박힌 검붉은 문양이 불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소멸의 인장.’
8년 전 별의 균열이 무너지던 참사 속에서 몸속 깊이 새겨진 저주였다.
매달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발작은 몸속의 생명력을 땔감 삼아 타오르며 폐부의 마나 통로를 얼어붙게 만들고 피를 토하게 했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입가와 턱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바닥에 튄 핏방울까지 꼼꼼하게 훔쳤다.
위이잉.
장갑을 낀 손끝에서 희미한 미풍이 일더니 바닥과 공기 중에 남은 미세한 혈흔과 비릿한 냄새를 깨끗하게 흩어 버렸다. 마나의 과잉을 털어내는 유진 고유의 소소한 조작이었다.
그는 피로 검붉게 물든 손수건을 뭉쳐 서랍 가장 깊숙한 비밀 칸에 밀어 넣고 자물쇠를 잠갔다.
“발작 주기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군.”
유진은 쓰린 목을 매만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원래는 한 달에 한 번꼴이던 각혈 주기가 며칠씩 앞당겨지고 있었다.
어제 카일의 검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공백술을 아주 살짝 쓴 탓도 있었을 것이다. 마나를 비워 내는 사소한 개입조차 시한부의 몸에는 결코 가벼운 부담이 아니었다.
무리해서 마나를 쓰면 남은 3년조차 채우지 못하고 바스러질 터였다.
‘역시 조용히 연구실에 처박혀 쉬는 게 정답이야.’
유진은 삐걱거리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가슴팍을 짓누르는 둔탁한 통증을 억누르며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동쪽 하늘에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서서히 번져 오고 있었다.
오늘쯤이면 어제 그 문제아 카일 녀석이 자퇴서를 들고 오거나 행정실로 달려가 배정을 취소해 달라고 난리를 칠 터였다.
눈을 감고 마나도 쓰지 않은 채 허공을 백 번 베라니. 그 어떤 혈기 왕성한 검사 지망생이 그런 해괴하고 무성의한 과제를 참아내겠는가.
‘학생 하나가 포기하면 나머지 녀석들도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임시 지도반 규정상 학생 정원의 절반 이상이 수업을 거부하면 반은 자동으로 폐강된다.
그렇게 폐강 처리만 깔끔하게 끝내면 남은 시간은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평온하게 퇴직금을 챙길 수 있다.
유진이 막 차가운 물 한 잔을 따라 목을 축이려던 찰나였다.
쾅! 쾅! 쾅!
제7 연구실의 두꺼운 참나무 문이 부서져라 울렸다.
새벽의 고요를 단숨에 찢어발기는 거친 노크 소리였다.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왔나?’
생각보다 성미가 급한 녀석이었다. 밤새 이를 갈다가 해가 뜨자마자 항의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
유진은 헛기침을 한 번 삼키며 일부러 느릿하게 걸어가 문고리를 돌렸다. 어차피 쫓아낼 녀석에게 친절을 베풀 필요는 없었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
끼이익.
문이 열리며 드러난 광경에 유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문지방 앞에 서 있는 것은 잔뜩 벼르고 온 항의자가 아니었다.
땀과 먼지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년이었다.
카일 로웬.
소년의 꼴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어제 입고 있던 낡은 가죽 갑주는 땀에 절어 번들거렸고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검은 머리칼은 이마에 엉망으로 달라붙어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유진의 시선을 끈 것은 카일의 두 손이었다.
손바닥 곳곳의 굳은살이 터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검자루를 쥐었던 손가락 마디마디는 탈진으로 인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유진이 멍하니 입을 열었다.
“너…… 꼴이 왜 그래?”
그러자 카일이 무릎을 꿇듯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는 밤새 쇠를 긁은 것처럼 바싹 갈라져 있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굳건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교수님. 명하신 과제를 모두 마쳤습니다.”
“……뭐?”
“어젯밤 9강의실에서 눈을 감은 채 백 번의 검격을 완수했습니다.”
카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금빛 눈동자에는 피로 따위는 흔적도 없이 타오르는 맹렬한 확신과 전율이 서려 있었다.
유진은 턱이 빠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진짜로 다 했다고? 그걸?’
그냥 귀찮아서 도망치라고 던진 헛소리였다.
눈을 감고 허공을 백 번 베라는 무의미한 반복을 밤새도록 쉬지 않고 매달려 끝내고 왔다는 말인가?
유진은 소년의 피투성이 손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퇴서 내러 온 게 아니고?”
“자퇴라니요!”
카일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제게 이토록 위대한 길을 열어 주셨는데 제가 왜 도망치겠습니까!”
‘아니, 난 그냥 네가 도망쳤으면 좋겠는데.’
유진의 속마음은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건조하게 물었다.
“그래서. 눈 감고 백 번 휘두르니까 뭐가 좀 달라졌어?”
“예.”
카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처음에는 저를 조롱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열 번째를 넘어가고 쉰 번째를 지나자 깨달았습니다. 제 검을 가로막고 있던 것은 부족한 마나가 아니라 제 눈과 조급함이 만들어낸 쓸데없는 소음이었다는 것을요.”
카일의 손이 허리춤의 낡은 검자루로 향했다.
“교수님께서 손가락 하나로 제 마나를 비워 내셨을 때의 그 감각. 그 허(虛)의 경지를 흉내 내기 위해 밤새 검을 내질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백 번째에 도달했을 때…… 제 검에서 불필요한 소음이 완전히 걷혔습니다.”
유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녀석, 상상력이 풍부한 건가 아니면 그냥 미친 건가?’
손가락으로 마나를 비워 낸 것은 공백 문장으로 꼬인 마나의 매듭을 끊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무슨 ‘허의 경지’라느니 ‘소음을 걷어냈다’느니 거창하게 포장하고 있었다.
유진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건 누구나 해.”
“보여 드리겠습니다.”
카일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가라앉았다.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겠습니다.”
동쪽 별관 뒤편의 작은 공터.
아직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공터에는 차가운 새벽바람만이 맴돌고 있었다.
공터 한가운데에 선 카일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릉.
어제 강의실에서 들렸던 거칠고 둔탁한 마찰음과는 사뭇 달랐다. 낡은 검날이 칼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서늘하게 공기를 갈랐다.
유진은 팔짱을 낀 채 연구실 외투 깃을 세우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디 한번 보자.’
유진은 솔직히 믿지 않았다.
검술이라는 것은 수년간의 체계적인 훈련과 마나 연공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고작 하룻밤 눈을 감고 백 번 휘둘렀다고 해서 근본적인 결함이 고쳐질 리 없었다.
유진의 회색 눈동자에 미약한 마나의 파동이 일었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지만 인장의 고통을 무시하며 공백의 시야를 열었다.
상대의 마나 흐름과 구조적 결함을 꿰뚫어 보는 유진만의 감각이 펼쳐졌다.
그 순간 카일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스으읍.
카일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소년의 몸속에서 마나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흐름이었다.
어제의 카일은 검술학부의 방식을 흉내 내며 온몸의 마나를 억지로 쥐어짜 검신에 밀어 넣으려 했다. 그 탓에 마나가 혈관 속에서 제멋대로 충돌하며 거친 소용돌이를 일으켰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카일은 마나를 검에 억지로 밀어 넣지 않았다.
오히려 불필요하게 끓어오르는 마나를 차분하게 비워 내고 있었다.
시각을 차단하자 검의 무게와 공기의 저항 그리고 자신의 호흡만이 남았다.
마나는 억지스러운 폭포수가 아니라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처럼 최소한의 양만 칼날 중심을 따라 매끄럽게 정렬되었다.
‘어……?’
유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나의 낭비가 사라져 있었다.
쓸데없이 혈관을 짓누르며 밖으로 튀어 나가던 잉여 마나가 거짓말처럼 걷혀 있었다.
오직 검을 똑바로 뻗기 위해 필요한 가장 순수하고 응축된 최소한의 마나만이 칼끝에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쉬아악!
카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파열음이 아니었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소음이 아니라 팽팽하게 당겨진 비단을 단숨에 베어내는 듯한 서늘하고 정갈한 절단음이었다.
칼날이 지나간 궤적을 따라 새벽안개가 한 줄기 깔끔한 직선으로 갈라졌다.
흔들림이 없는 완벽한 일격.
카일은 검을 내지른 자세 그대로 멈춰 서서 천천히 숨을 뱉었다.
후우우.
소년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한계를 깨뜨린 자만이 품을 수 있는 벅찬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유진은 입을 다문 채 굳어 버렸다.
‘……이게 왜 진짜 됨?’
유진의 뇌리가 정지했다.
그는 정말로 카일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다. 그냥 마나를 너무 무식하게 쥐어짜길래 눈 감고 힘이나 빼라는 뜻으로 툭 던진 말이었다.
그런데 이 소년은 그 대충 던진 한마디를 나침반 삼아 밤새도록 혼자 마나 구조의 결함을 깎아내고 기어이 정답에 도달해 버렸다.
재능이었다.
이론적인 지식은 전무할지 몰라도 몸으로 부딪쳐 감각을 흡수하는 직관적인 무재(武才)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검술학부 교수 놈들은 대체 뭘 보고 이 녀석을 낙제시킨 거야?’
마나의 양에만 집착하던 돌팔이 귀족 교수들이 원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버린 꼴이었다.
카일이 검을 거두며 유진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철컥.
“교수님의 가르침이 맞았습니다.”
카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제 눈이 검을 가리고 있었고 제 욕심이 마나를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신 빈 곳을 향해 검을 뻗었을 때 비로소 제 칼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스승님.
호칭이 어느새 교수에서 스승으로 바뀌어 있었다.
카일의 눈빛은 이제 단순한 존경을 넘어 종교적인 광신에 가까워져 있었다.
유진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망했다.’
완전히 틀어졌다.
이러면 이 녀석은 절대로 자퇴서를 내지 않는다. 아니 마탑이 무너져도 유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기세였다.
유진은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헛기침을 삼켰다.
“흠. 흠.”
그는 뒷짐을 진 채 최대한 거만하고 무심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럭저럭 꼴은 갖췄네.”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겨우 겉핥기 수준일 뿐이지. 그 정도도 못 했으면 오늘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했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카일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유진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 열정 덩어리를 어떻게 떼어내야 할까.
더 가혹하고 불가능한 과제를 던져서 스스로 나가떨어지게 만들어야 하나?
유진이 머리를 쥐어짜며 다음 계책을 세우려던 바로 그때였다.
파드득!
새벽하늘을 가로지르며 푸른빛을 띤 금속 전령새 한 마리가 빠르게 날아왔다.
마탑 행정부의 공식 전령 마도구였다.
전령새는 유진의 머리 위를 선회하더니 부리에 물고 있던 붉은색 통보 문서를 툭 떨어뜨렸다.
유진이 반사적으로 문서를 받아챘다.
봉투를 뜯자 익숙하면서도 달갑지 않은 행정관의 서명이 적힌 통지서가 나타났다.
[기초이론학부 특별 지도반 2차 배정 통보]
- 대상자: 마리아 벨로아 (마도공학부 2학년)
- 사유: 허가받지 않은 고출력 마도회로 조작 및 학부 작업장 폭파 사고로 인한 징계 처분.
- 지침: 금일 오전 9강의실로 출석 예정. 담당 교수는 즉시 학생을 인수하여 지도를 개시할 것.
유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마리아 벨로아……”
벨로아 공작가의 방계이자 마도공학부 최고의 문제아.
기계를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치다가 연구실을 통째로 날려 먹었다는 그 악명 높은 폭탄이었다.
카일 로웬 하나만으로도 골치가 터질 지경인데 이제는 연구실을 폭파하는 마도공학도까지 굴러들어 온다는 말이었다.
카일이 유진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유진은 구겨진 통지서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푸른 아침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어지러워 보였다.
“……아니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시한부 3년.
조용히 쉬다 가려던 유진 에르하르의 은퇴 계획은 첫날부터 완전히 꼬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