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의 퇴로까지 재는 던전 측량사

2화: 지도 끝에서 무너진 벽
배유찬은 새 지도를 인쇄하지 않았다. 사고가 난 방의 북동쪽 통로에 점선을 그어 두고, 각 선 옆에 측정 시간과 불확실성 범위를 적었다. 지도 분석가 고은채는 출력본을 들고 말했다. “이렇게 쓰면 파티가 길을 못 찾는다고 할 거예요.”
“길을 모르는 곳을 아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은채는 대답 대신 서버에서 복구한 파일을 열었다. 배포 전에는 경로가 점선이었고, 수정 후에는 굵은 녹색 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관리 계정으로 바뀐 시각은 사고가 난 날 오전이었다. 변경 사유 칸은 비어 있었다.
“관리자가 일부러 안전 경로로 바꿨을 가능성이 있어요.”
“가능성은 기록하되 이름은 아직 쓰지 맙시다.”
정태경은 임시 측량팀을 꾸렸다. 유찬, 은채, 부상에서 회복 중인 세혁, 그리고 장비를 든 방패병 한 명. 목표는 사고 방의 새 기준점을 세우고 붕괴된 통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보스와 마주치면 즉시 철수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세혁은 다시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태경은 손의 부목을 풀지 않은 채 갈 수 있는 곳까지만 허락했다.
입구에서 유찬은 새 기준점을 문틀에 고정했다. 위치는 던전 경계의 바깥쪽, 지형 변화가 적은 암반이었다. 그는 좌표를 두 번 읽고 은채가 별도 장비로 확인하게 했다. 이전에는 자신의 기록만 믿고 한 번에 넘어간 부분이었다. 세혁은 그 과정을 지켜보다가 “귀찮을 정도로 확인하네요”라고 했다.
“귀찮아야 하는 일입니다.”
사고 방까지는 지도대로 움직였지만, 남쪽 갈림길에서 바닥의 경사가 달라졌다. 바람이 그쪽으로 흘렀다가 갑자기 되돌아왔다. 유찬은 작은 먼지 구슬을 바닥에 놓아 흐름을 확인했다. 구슬은 금이 간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래에 빈 공간이 생긴 듯했다.
“지도에는 단단한 바닥으로 되어 있어요.” 은채가 말했다.
“기존 측정은 일주일 전입니다. 지금은 빈 공간이 생겼을 수 있어요.”
태경이 방패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첫 두 번은 묵직한 소리가 났다. 세 번째는 낮고 텅 빈 울림이었다. 그녀는 바로 후퇴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세혁이 뒤로 물러나던 순간, 뒤쪽 벽이 크게 울렸다. 먼지가 쏟아지고 입구로 돌아가는 통로가 반쯤 무너졌다.
“모두 바닥에 엎드려요!” 태경이 외쳤다.
유찬은 몸을 낮추고 측량기를 감쌌다. 돌가루 사이로 공기 흐름이 바뀌었다. 무너진 벽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그는 작은 센서로 방향과 풍속을 확인했다. “오른쪽 벽 뒤에 공간이 있습니다. 통로일 수도 있고 단순한 빈 틈일 수도 있어요.”
“다른 길이 있다는 뜻이야?”
“확인 전에는 모릅니다.”
태경은 방패를 세우고 앞을 살폈다. 유찬은 벽에 귀를 대지 않고, 장비로 진동을 읽었다. 주기적인 울림은 없었다. 보스가 벽을 미는 소리라면 더 큰 진동이 동반되어야 했다. 그는 안전줄을 바깥 기준점에 묶고, 좁은 틈으로 작은 탐사 구슬을 보냈다. 화면에는 돌벽과 끊어진 기둥,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가 보였다.
“사람이 지나갈 공간은 있어요. 폭은 70센티미터 정도, 하강 경사는 18도.”
세혁이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볼게요. 체구가 작으니까.”
“부목을 댄 손으로 기어가면 안 돼요.” 유찬이 말했다.
“뒤에 길이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태경이 자신의 방패를 벽에 기대었다. “유찬이 줄을 걸고 먼저 구슬을 보내. 세혁은 뒤에서 시야를 보조해.”
세혁은 입술을 깨물었지만 받아들였다. 유찬은 허리에 안전줄을 걸고 벽의 파편을 치웠다. 입구가 넓어질 때마다 먼지가 떨어져 동료들이 숨을 가렸다. 그는 무리하게 몸을 밀어 넣지 않고, 균열이 진행되는 방향을 확인했다. 틈의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광택이 있었다. 누군가 전에 이 통로를 지나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구슬 화면은 아래쪽에서 막혔다. 돌무더기가 통로를 가로막았지만 그 옆으로 바람이 흐르고 있었다. 유찬은 길이가 긴 측량 막대를 넣어 돌의 흔들림을 확인했다. 바깥쪽 돌은 고정되어 있었고, 안쪽의 작은 파편만 움직였다. 그는 큰 돌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태경은 가벼운 파편을 하나씩 꺼내고, 유찬은 빠져나오는 공기의 방향을 확인했다.
그때 뒤쪽에서 짐승의 포효가 울렸다. 보스가 방 쪽으로 돌아온 것이다. 태경은 출구를 막아 시간을 벌었다. 세혁은 한 손으로 활을 들 수 없었지만, 화살 하나를 바닥에 굴려 보스의 주의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화살이 갑각에 부딪히자 괴물이 방향을 틀었다.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어?” 은채가 물었다.
태경은 답하지 않았다. 유찬은 바닥에 새 균열이 생기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의 퇴로마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는 탐사 구슬을 좁은 틈 너머로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아래로 이어진 낮은 공간 끝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던전 입구 쪽의 표식이 반사된 것인지, 다른 방의 마력인지 알 수 없었다.
“측정값으로는 출구라고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공기는 바깥쪽으로 흐릅니다.”
태경은 보스가 다음 돌진을 준비하는 걸 보고 말했다. “그 길을 선택하자. 모두 안전줄에 묶여.”
유찬은 선두에 섰다. 통로는 지도 끝에 그려지지 않은 길이었다. 그는 한 걸음마다 거리와 기울기를 읽어 팀원에게 알렸다. “세 걸음 뒤 낮은 턱. 왼쪽 벽은 약하니 손 대지 마세요.” 세혁은 뒤쪽에서 그 지시를 반복해 은채에게 전달했다. 말이 끊기지 않도록 사람마다 한 문장씩 맡았다.
네 번째 걸음에서 돌이 내려앉았다. 유찬의 오른발이 틈에 끼었지만, 안전줄이 그를 잡아당겼다. 그는 발을 비틀어 빼려 하지 않고, 뒤로 몸을 낮춰 하중을 줄였다. 태경이 줄을 당겨 주고 은채가 부서진 파편을 치웠다. 발목에는 통증이 있었지만 걸을 수 있었다.
그들은 낮은 공간을 지나 좁은 경사로에 도착했다. 유찬은 풍속이 빨라지는 걸 확인했다. 이쪽이 입구로 이어질 확률은 높았지만, 그 너머에 보스가 있을지도 몰랐다. 태경은 먼저 탐사 구슬을 보내고, 세혁은 거울로 반대편을 비췄다. 공간은 비어 있었다.
한 사람씩 빠져나온 뒤, 뒤편 통로가 무너졌다. 돌이 떨어지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던전 입구는 가까웠고, 모두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 유찬은 통로의 임시 지도를 펼쳐 방금 이동한 길을 점선으로 그렸다. 지도 바깥에 있었던 길은 이제 측정 기록으로 남았다.
세혁은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이번에는 선을 믿은 게 아니라, 당신이 읽어 준 숫자를 믿었어요.”
“숫자도 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이 확인해야 합니다.”
던전 출입 기록을 정리하는 동안 길드 운영팀장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유찬에게 이번 경로를 공식 지도에 반영해 달라고 했다. 보스가 통로를 바꾼 건 맞지만, 임시 경로가 효과를 보였으니 다음 파티가 들어가기 전에 배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 경로는 아직 한 번만 확인했습니다. 붕괴 위험과 보스 위치가 바뀌면 막힐 수 있어요.”
“그럼 얼마나 더 들어가야 확정할 수 있습니까?”
유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숫자는 현장에 나가 보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팀장은 “이번에도 당신이 늦추면 보스 공략 일정이 깨집니다”라고 압박했다. 세혁이 그 말을 듣고 유찬보다 먼저 나섰다.
“제 손이 부러질 뻔한 길을 다음 파티한테 안전하다고 넘기지 마세요.”
팀장은 세혁에게 아직 치료 중인 사람은 작전 결정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세혁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지팡이를 놓지 않았다. 태경은 운영팀장에게 추가 측량 인력과 안전 장비를 요청했다. 단순히 지도를 늦추는 게 아니라, 확인에 필요한 조건을 적어 냈다.
“다음 진입은 보스의 위치가 고정된 시간대에 정찰하고, 양쪽 출구에 안전줄을 설치합니다. 측량팀은 세 명 이상, 구조팀은 별도로 대기해야 합니다.”
“예산이 나올까요?” 은채가 물었다.
“그건 길드가 결정할 일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최소 조건을 적는 거고요.”
팀장은 요구서를 받아 들고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그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 구조팀을 한 명으로 줄이는 안을 꺼냈다. 태경은 고개를 저었다. “통로 붕괴 때 한 사람은 줄을 잡고, 한 사람은 파편을 치우고, 한 사람은 측정해야 했어요. 하나라도 빼면 그 길은 못 씁니다.”
유찬은 자신의 발목에 감긴 임시 붕대를 내려다봤다. 방금 넘어졌을 때 생긴 통증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다음 진입까지 최소 이틀은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운영팀장은 한숨을 쉬었지만, 이번에는 일정표를 지우지 않았다.
은채는 태블릿에서 관리자 계정 사용 기록을 다시 열었다. 마지막 접속은 사고 당일 새벽, 길드 본부가 아니라 던전 입구의 중계 단말에서 이루어졌다. 기록에는 사용 장비의 일련번호도 남아 있었다. 측량팀 장비가 아니라 보스 사냥팀의 전술 태블릿이었다.
태경이 유찬을 보았다. “전술팀이 지도 선을 바꾼 이유가 뭘까?”
“모릅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들어온 시간을 파티 출입 기록과 대조해야 해요.”
세혁은 숨을 삼켰다. 사고 전날 자신에게 지도를 건넨 사람이 누군지 떠올리려 했다. “박정호는 아니었어요. 그 이름은 제가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가 낮았고, 왼쪽 손에 검은 장갑을 꼈어요.”
유찬은 그 진술을 기록하고, 이름을 지웠다. 확실하지 않은 이름은 지도의 보류 선처럼 남겨 두어야 했다.
그때 은채가 복구 서버에서 새 변경 로그를 찾았다. 사고 전 지도 수정 권한을 가진 계정은 세 개였다. 그중 하나는 현재 길드가 해체한 측량팀의 관리자 계정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직 그 계정을 사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