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 싹 쓸어서 만렙까지

8화: 의심을 지우는 법
대한이능력관리청 본청 건물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거대한 화강암 요새처럼 솟아 있었다.
각성자와 게이트를 통제하는 국가 최상위 기관답게 로비부터 삼엄한 마력 감지 센서가 번쩍이고 있었다. 슈트를 차려입은 고위 헌터들과 각 길드의 연락관들이 서류 가방을 든 채 분주히 오갔다.
낡은 작업복 대신 깔끔하게 다려 입은 셔츠를 걸친 강도현은 검색대를 통과했다. 품에는 정비소에서 챙겨 온 작업 기록 철과 은색 알루미늄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7층 던전환경관리과 윤아린 팀장실로 가시면 됩니다."
안내 데스크 직원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오른 도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은 차분했다. 어제 C급 현장에서 검증받은 0.41%의 정화 수치는 분명 업계의 상식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하지만 상식을 뒤흔들면 필연적으로 의심이 뒤따른다.
'기계는 속이지 못했지만 사람의 눈은 더 지독하게 파고들겠지.'
도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7층 복도 끝에 위치한 3팀장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맑고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집무실은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된 책상 위에는 수십 권의 현장 데이터 바인더가 꽂혀 있었다. 벽면의 대형 스크린에는 경기권 전역의 게이트 분포도와 실시간 잔여 마력 수치가 빽빽하게 갱신되고 있었다.
그 중심에 윤아린 팀장이 앉아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그녀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손짓으로 맞은편 가죽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강도현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윤 팀장님."
도현이 자리에 앉자 윤아린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늘하면서도 지적인 갈색 눈동자가 도현의 전신을 천천히 훑었다. F급 각성자 특유의 미약한 마력 파동을 읽어내려는 기색이었다.
"시간 엄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는 생략하죠. 서로 바쁜 몸이니까요."
윤아린은 책상 서랍에서 두툼한 파일 하나를 꺼내 도현 앞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겉면에 붉은색 글씨로 '철비늘 채석장 정밀 검증 결과 보고서'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마그나-7 탐침 결과는 저도 실시간으로 확인했습니다. 0.41%. 경이적인 수치입니다. 대한민국에서 C급 던전 사후 처리를 1% 미만으로 끝낸 사례는 최근 5년간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평가가 후하시군요."
도현이 덤덤하게 대꾸하자 윤아린의 입꼬리가 가늘게 비틀렸다.
"칭찬이 아닙니다, 강 대표님. 의문이죠."
윤아린이 보고서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현장 반입 장비 목록과 약품 소모 내역이 형광펜으로 줄쳐져 있었다.
"마그나-7은 지하 1미터 암반 틈새의 미세 마력 잔류까지 분자 단위로 투과 분석합니다. 그 말은 암갑 도마뱀들이 흘린 규산염 마력이 현장에서 완전히 증발했거나 소멸했다는 뜻입니다."
윤아린의 손가락이 표 한 칸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클린 던전이 채석장으로 반입한 물품은 고작 20리터짜리 중화제 말통 세 개와 흡착포 세 박스가 전부였습니다. 질량 보존 법칙과 마력 역학의 기초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코웃음을 칠 분량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기존 공정대로라면 그 현장의 마력을 전부 씻어내기 위해 3등급 마력 감쇠제가 최소 1.5톤은 투입되어야 합니다. 흡착 필터도 수십 개를 태워야 하고요. 하지만 강 대표님은 고작 60리터의 액체로 C급 던전 전체를 백지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윤아린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현장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A급 분석가의 압박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어지간한 하청 업체 대표였다면 말문이 막혀 식은땀을 흘릴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챙겨 온 알루미늄 케이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정밀 가공된 황동 노즐 부품과 검붉은 분말이 담긴 밀봉 유리관이 들어 있었다.
"팀장님께서는 전제를 잘못 짚으셨습니다."
"전제요?"
"예. 마력을 '씻어낸다'고 생각하시니까 1.5톤이라는 계산이 나오는 겁니다."
도현은 케이스에서 황동 노즐을 꺼내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
"던전 마수는 무기물이 아닙니다. 생체 조직이죠. 특히 암갑 도마뱀은 피부 표면에 단단한 규산염 마력 피막을 형성해 물리 공격을 튕겨냅니다. 사후에도 이 피막이 유지되기 때문에 일반 세척제를 들이부으면 겉만 씻겨 나가고 속의 잔여 마력은 암반 틈으로 스며들어 굳어버립니다."
도현은 태연한 목소리로 미리 준비해 둔 공정 일지를 펼쳤다.
"저는 씻어내지 않았습니다. 사체와 암반에 남은 마력 피막의 화학 결합을 끊었을 뿐입니다."
"결합을 끊었다?"
"규산염 마력 피막은 섭씨 40도 이상의 약알칼리 환경에서 특정 킬레이트 촉매제와 반응하면 급격한 상전이를 일으킵니다. 마력이 고체에서 불안정한 기체 상태로 변하면서 자체 붕괴를 시작하죠."
도현이 밀봉 유리관을 가리켰다.
"이게 제가 독자 배합한 다공성 광물성 촉매제입니다. 흡착포로 바닥 배수 균열을 먼저 차단한 상태에서 이 촉매제를 도포하면 잔류 마력이 사체 내부에서 연쇄 반응을 일으켜 상쇄됩니다. 씻어낼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자멸시키는 방식입니다."
윤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황동 노즐과 유리관을 집어 들고 꼼꼼히 살폈다. 분석가 특유의 계산 능력이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표정에 드러났다.
"……촉매 상쇄 반응이라고요? 하지만 그런 반응을 유도하려면 마수의 체내 마력 순환 경로와 잔여 핵의 위치를 오차 없이 짚어내야 합니다. C급 마수의 잔류 마력 결절점을 비각성자나 F급이 육안으로 판별하는 건 불가능해요."
도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육안으로 보지 않습니다. 냄새와 소리로 압니다."
"냄새와 소리?"
"마수가 죽고 나면 신경망이 썩으면서 고유의 마력 스파크가 튑니다. 타닥거리는 미세한 파열음과 특유의 비릿한 유황 냄새가 나죠. 저는 5년 동안 던전 청소 현장에서 남들이 버린 피와 내장을 치우며 살았습니다. 헌터들은 마수를 죽이는 법만 알지만 청소부는 마수가 어떻게 썩고 분해되는지를 압니다."
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현실감은 서류 몇 장으로 흉내 낼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도현은 '부산물 흡수' 특성을 통해 마력의 흐름과 사체의 구조를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그 감각적 경험을 기존의 화학 방역 이론과 절묘하게 엮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전문성으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윤아린은 한참 동안 도현의 작업 일지와 화학 배합표를 들여다보았다. 붉은 펜으로 수식을 검증하던 그녀의 손끝이 마침내 멈추었다.
"……이론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군요."
윤아린이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상전이 촉매와 반응 순서 제어라. 헌터 협회 연구원들도 생각하지 못한 접근법입니다. 현장 데이터와 완벽하게 일치해요."
"의심이 풀리셨습니까?"
"의심은 해소됐습니다. 다만 경탄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윤아린은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그녀의 표정에서 취조관 같은 냉랭함이 걷히고 행정 책임자로서의 진지한 눈빛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강 대표님. 오늘 아침 일찍 태성 길드 대외협력실에서 본청 국장실로 연락이 왔었습니다."
도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태성이요?"
"예. 어제 신우성 팀장이 망신을 당한 건 아실 겁니다. 태성 측에서는 클린 던전이 허가받지 않은 불법 약품을 사용했거나 위험 물질을 살포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귀사의 사업자 면허를 정지시키라고 압력을 넣더군요."
"치졸하군요."
"대형 길드의 생리가 원래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수억 원을 들여 방역팀을 써도 못 내는 결과를 일개 F급 1인 업체가 냈으니 자존심이 상한 거죠. 게다가 태성이 지금까지 던전 사후 처리를 얼마나 날림으로 해왔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으니까요."
윤아린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전 거절했습니다. 관리청은 길드의 하수인이 아닙니다. 데이터가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면 우리는 그 기술을 보호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어 또 다른 서류철을 꺼냈다. 이번 서류는 겉면에 검은색 바탕과 붉은색 테두리가 둘러싸인 1급 위험 현장 보고서였다.
탁.
서류가 도현의 눈앞에 놓였다.
"강 대표님의 그 독자 공정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이 현장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도현은 서류의 표지를 읽었다.
[긴급 사고 지정: 경기 남부 B급 던전 '흑연 암혈'][상태: 레이드 실패 후 폐쇄][초기 잔여 오염도: 72.8%][발생 위험: 2차 마력 폭발 및 오염 안개 확산]
B급 던전.
순간 도현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C급 채석장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상위 등급 던전이었다. 보고서 요약본을 훑어내려 가자 상황의 심각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흘 전 중견 길드 공격대가 보스 공략에 실패하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채 후퇴했습니다. 내부에는 B급 화염 마수인 '흑염 살무사'와 '화염 암랑'의 사체 수십 구가 뒤엉켜 썩어가고 있어요."
윤아린의 설명이 이어졌다.
"방치된 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동굴 내부의 유황 가스와 반응해 마력 폭주 안개가 발생했습니다. 잔여 오염도가 72%를 넘겼어요. 이대로 사흘만 지나면 던전 내부 압력이 한계를 넘어 지상으로 오염이 터져 나오는 브레이크 전조 현상이 발생합니다."
"대형 길드 방역팀은 왜 투입하지 않습니까?"
"태성을 비롯한 1군 길드 방역팀에 입찰을 타진했으나 전부 거부했습니다. 오염도가 너무 높아 방호복이 녹아내릴 위험이 있고 실패했을 때의 책임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죠."
윤아린이 도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현재 관리청 던전환경관리과는 비상입니다. 상층부에서는 군부대 공병대를 투입해 게이트 자체를 매몰 폭파하자는 극단적인 의견까지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던전 내부의 막대한 자원은 영구 폐기되고 인근 지역의 지맥 오염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도현에게 계약서 초안을 내밀었다.
"클린 던전에 B급 '흑연 암혈'의 긴급 특수 정화 권한을 위탁하고자 합니다. 성공 보수는 C급 기준의 다섯 배인 8천만 원입니다. 정화 목표치는 15% 이하입니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신생 1인 업체에게 국가 기관이 직접 B급 던전 단독 정화 계약을 맡기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고개를 쉽게 끄덕이지 않았다.
"조건이 하나 더 붙어 있겠죠."
"예. 영리하시군요."
윤아린의 목소리가 엄숙해졌다.
"이 계약은 관리청 3팀의 직권으로 발주하는 특별 임무입니다. 만약 정화에 실패해 마력 폭주가 일어나거나 제한 시간 내에 목표치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클린 던전의 환경 관리 사업자 면허는 즉시 영구 취소됩니다. 귀하의 F급 헌터 자격도 정지될 수 있고요."
성공하면 관리청의 공인 파트너로 도약하지만 실패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외줄 타기였다.
그러나 도현의 시선은 8천만 원이라는 수당에도 실패의 위험에도 머물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보고서에 적힌 '마수 사체 수십 구 방치'라는 문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B급 화염 마수 사체 수십 구…….'
지금까지 흡수한 것은 고작 E급 지네나 C급 도마뱀 부산물이었다. 그런데 B급 상위 마수의 피와 뼈와 정수가 동굴 전역에 널려 있다는 뜻이었다.
일반 방역팀에게는 목숨을 앗아가는 독성 오염 구역이겠지만 도현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스탯의 만찬장이었다.
도현은 펜을 집어 들기 전 서류의 한 조항을 가리켰다.
"수당은 관리청 기준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계약서 제5조에 특약 한 줄만 추가해 주십시오."
"어떤 특약입니까?"
"‘던전환경관리법 제9조에 의거하여 현장에 방치된 마수 사체, 골격, 마석 파편 및 오염 부산물 일체의 소유권과 반출 권한은 클린 던전에 영구 귀속된다.’ 이 문구를 명문화해 주십시오."
윤아린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부산물 소유권이요? 흑연 암혈의 사체들은 맹독과 화염 마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마석조차 상품 가치가 떨어집니다. 가공 비용이 더 들어갈 텐데요."
"치우는 건 제 몫입니다. 쓰레기라 해도 제가 땀 흘려 치운 부산물의 권리는 온전히 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게 제 사업 철칙입니다."
도현의 단호한 태도에 윤아린은 잠시 침묵하더니 픽 웃음을 흘렸다.
"지독한 실리주의자로군요. 좋습니다. 어차피 관리청 입장에서도 처치 곤란한 폐기물들이니까요."
윤아린은 즉석에서 계약서 단말기를 조작해 특약 조항을 삽입했다. 그리고 관리청 직인을 찍은 뒤 도현에게 건넸다.
징-
도현의 서명과 함께 계약 체결 알림이 단말기에 떠올랐다.
[대한이능력관리청 특별 정화 인가 완료][대상: B급 던전 '흑연 암혈'][책임 사업자: 클린 던전 (대표 강도현)][특약: 현장 방치 부산물 전량 소유권 이전 승인]
관리청의 공식 인가 도장이 찍힌 정식 계약서였다. 이제 태성 길드가 아니라 관리청 장관이 오더라도 현장의 시체는 합법적으로 도현의 소유였다.
"작업 기한은 내일 정오까지입니다. 현장 통제선에는 관리청 경비 병력이 배치될 겁니다. 부디 살아서 나오십시오, 강 대표님."
윤아린이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그녀의 차가운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깨끗하게 비워놓겠습니다."
집무실을 빠져나와 관리청 본청 로비를 나서는 도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셔츠 깃을 스쳤지만 몸 안에서는 정수를 각성했을 때와 같은 뜨거운 마력이 조용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B급 던전.'
그곳에 버려진 거대한 힘의 찌꺼기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