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선언하자 에러가 발생했다

5화: 기사단장 제이드
제국 황궁의 벨베데레 대연회장은 인간이 빚어낼 수 있는 온갖 사치가 집약된 전장이었다.
천장 높이 매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신 백색 광휘를 쏟아내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황금빛 기둥 아래로는 붉은 비단 카펫이 끝없이 펼쳐졌다. 홀 한편에서는 궁정 악단의 현악 사중주가 우아한 왈츠 곡조를 자아내며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화려한 보석과 깃털 장식으로 치장한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음악처럼 감미롭지 않았다. 잔 너머로 오가는 시선들은 누군가의 실족과 가문의 위기를 낚아채려는 사냥꾼의 것에 가까웠다.
그 찬란하고 냉혹한 공간의 육중한 유리문이 열렸을 때 연회장의 소음이 일순 꺾였다.
에밀리아는 고개를 꼿꼿이 세운 채 홀 안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차림새는 연회장에 모인 다른 귀부인들과 완벽하게 대비되었다. 공작가의 문양이 수놓인 비단 드레스 대신 밤하늘처럼 깊고 짙은 흑남색 실크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번잡한 보석 장신구는 전부 배제했다. 오직 쇄골 아래 닿아 있는 어머니의 자줏빛 펜던트만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반짝였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에밀리아의 자태는 고풍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한 자루의 칼날을 연상시켰다.
“에밀리아, 걸음을 늦춰라.”
등 뒤에서 억눌린 분노가 담긴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카일이었다. 그는 사흘 동안 처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가문의 집사마저 문전박대했던 에밀리아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기색이 역력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금발 아래 푸른 눈동자에는 초조함과 살기가 뒤엉켜 있었다.
카일이 성큼 다가와 에밀리아의 팔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황실 연회다. 온 제국의 눈과 귀가 쏠려 있는 자리란 말이다. 네가 사흘 전 내게 지껄였던 그 망발을 여기서도 떠들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라.”
에밀리아는 몸을 부드럽게 비틀며 카일의 손길을 스쳐 지나듯 피했다.
그녀의 담담하고 냉담한 태도에 카일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주변에 서 있던 몇몇 귀족들이 그 모습을 훔쳐보며 부채 뒤로 입을 가렸다.
에밀리아는 카일을 똑바로 응시하지도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 손을 억지로 잡으려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공작가의 후계자가 아내의 팔을 꺾는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으시다면요.”
“너……!”
“사흘 동안 충분히 생각하셨을 텐데요. 제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에밀리아의 입술 끝에 서늘한 호선이 그려졌다.
그녀의 시야 가장자리에 옅은 반투명 창들이 어른거렸다. 연회장에 모여든 귀족들의 머리 위에 떠오른 정보들이었다.
[개체명: 바네사 백작부인]
[소속: 수도 사교계 사교클럽]
[주요 성향: 권력 지향 / 가십 확산]
[로젠버그 가문 호감도: 65]
[개체명: 펠릭스 자작]
[소속: 제국 재무부 차석]
[주요 성향: 기회주의]
[로젠버그 가문 호감도: 72]
공작가의 위세에 기대어 알랑거리거나 에밀리아의 처지를 동정하며 비웃던 자들의 본질이 몇 줄의 글자로 요약되어 있었다. 그들 모두 예외 없이 ‘개체명(Entity)’이라는 분류 아래 묶여 있었다.
이 세계가 정해 놓은 규칙 안에서 살아가는 꼭두각시들.
에밀리아는 품속에 감추어 둔 단단한 양피지의 감촉을 느꼈다. 카일의 서명이 또렷하게 박힌 이혼 청구서였다. 사흘 전 찢기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 그 서류는 오늘 밤 공작가의 오만한 목덜미를 겨눌 비수가 될 터였다.
에밀리아는 망설임 없이 인파를 헤치고 연회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은 홀 중앙 높은 단상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에는 짙은 자주색 법관 복을 입고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노신사가 서 있었다. 제국 중앙법원의 수석법관 바스티안 백작이었다. 황실의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법전을 고수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에밀리아가 바스티안 백작을 향해 방향을 틀자 카일의 안색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카일은 빠른 걸음으로 에밀리아를 앞질러 가로막아 섰다. 그의 장신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에밀리아의 시야를 가렸다.
“어디를 가려는 거지?”
카일이 이를 갈며 물었다.
“중앙법원의 수석법관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공작가의 며느리로서 제국의 어른께 예를 갖추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거짓말하지 마. 네 품에 든 그 더러운 종이를 들이밀 생각이잖아!”
카일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음성을 극도로 낮추었다. 하지만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에는 맹독 같은 적의가 뚝뚝 떨어졌다.
“감히 황실 신년 연회에서 이혼 소송을 공식 청구하겠다고? 네 친정이 완전히 몰락해서 기댈 곳 하나 없는 처지라는 걸 잊었나? 네가 이따위 추태를 부리면 로젠버그가 너 하나쯤 소리소문없이 없애 버리지 못할 줄 알아?”
“해보시지요.”
에밀리아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카일의 푸른 눈을 쏘아보았다.
“로젠버그가 저를 없앤다면 내일 아침 제국의 모든 언론과 귀족원에는 당신이 빼돌린 제 어머니의 지참금 내역과 사기 횡령 혐의가 적힌 고발장이 도착할 것입니다.”
“뭐라고?”
“제가 사흘 동안 제 방에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공작가가 숨기고 싶어 하는 그 모든 썩은 내를 이미 신뢰할 만한 대리인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제가 무사히 이혼하지 못한다면 공작가는 온 대륙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에밀리아의 서늘한 선언에 카일의 동공이 사납게 흔들렸다.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상태창이 거칠게 점멸했다.
[개체명: 카일 로젠버그]
[상태: 극심한 불안 / 체면 손상 공포]
[행동 가중치: 통제 98 / 체면 95 / 위기감 90]
통제와 체면의 수치가 동시에 한계치까지 치솟으며 충돌하고 있었다. 공작가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과 눈앞의 아내를 짓밟아야 한다는 욕구가 카일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카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에밀리아의 손목을 움켜쥐려 했다. 물리적인 힘으로라도 그녀를 끌고 나가 연회장 밖 마차에 가두어 버리겠다는 악의가 번뜩였다.
“닥쳐. 헛소리는 마차 안에서나 지껄여라. 네가 미쳐서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하면 아무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연회장 입구를 지키고 있던 근위병들의 장창이 바닥을 세차게 내리쳤다.
쿵! 쿵! 쿵!
묵직한 금속음이 대리석 바닥을 타고 홀 전체로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궁정 악단의 연주가 뚝 끊겼다.
화려한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던 연회장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대연회장의 거대한 중앙 출입문으로 쏠렸다.
황실 의전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제국 중앙기사단장, 제이드 폰 알스터 경 입장하십니다!”
그 이름이 울려 퍼지는 순간 연회장 안의 귀족들이 수군거리며 황급히 좌우로 갈라섰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카일조차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고 굳어 버렸다.
문이 활짝 열리며 한 남자가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압도적인 기세였다.
칠흑 같은 흑철색 정복 위에 눈부신 은빛 망토를 걸친 남자는 연회장의 어떤 귀족보다도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균형 잡힌 걸음걸이마다 묵직한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빛을 받아 차갑게 부서지는 백은색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신의 조각품처럼 완벽하면서도 서늘했다. 굵은 이목구비와 날카롭게 뻗은 콧날 그리고 무엇보다 보는 이를 얼어붙게 만드는 핏빛 붉은 눈동자가 연회장의 공기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의전용 장검은 단 한 번도 뽑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의 피비린내를 품고 있는 듯 살벌한 기운을 뿜어냈다.
제이드 폰 알스터. 제국의 황제를 수호하는 최강의 검이자 사교계의 그 어떤 권력자도 함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존재였다.
에밀리아 역시 숨을 죽인 채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남자가 연회장 중앙의 붉은 카펫을 밟고 지나가는 순간 에밀리아의 시야가 기이하게 일렁였다.
지지직거리는 미세한 정전기음이 귓가를 스쳤다.
에밀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남자의 머리 위에 떠오른 글자는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 왔던 그 어떤 문구와도 전혀 달랐다.
그곳에는 [개체명]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User: Master_Admin]
[상태: 인게임 접속 중 (Active)]
[보안 등급: Level 0 (최고 관리자)]
[식별 코드: JADE_ALSTER_00]
[접속 프로토콜: DIRECT_NEURAL_LINK]
허공에 떠 있는 글자는 일반적인 푸른빛도 시스템 경고의 붉은빛도 아니었다. 깊고 투명한 백은색의 광채가 글자 주변을 환하게 밝히며 일렁이고 있었다.
‘User……? 마스터 어드민……?’
에밀리아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카일도 공작부인도 저 수많은 귀족들도 모두 ‘개체’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직 이 남자만이 ‘사용자(User)’이자 ‘관리자(Admin)’라는 이질적인 단어를 머리 위에 띄우고 있었다.
이 세계의 창조자이거나 혹은 이 세계의 바깥에서 온 자라는 뜻인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는 찰나 제이드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붉은 눈동자가 연회장의 귀족들을 무심히 훑어 지나갔다. 누구에게도 머물지 않던 그 차가운 시선이 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에밀리아에게 닿는 순간 거짓말처럼 우뚝 멈추었다.
시간이 멎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이드의 붉은 눈동자에 명확한 ‘인지’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는 수백 명의 인파 속에서도 에밀리아를 단번에 찾아낸 것처럼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카일이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는 기사단장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알스터 경. 오늘 연회에 참석하실 줄은 몰랐…….”
카일이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제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카일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카일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펄럭이는 은빛 망토의 자락이 카일의 어깨를 매몰차게 치고 지나갔다.
“……!”
카일의 말이 목구멍에 걸려 턱 막혔다. 허공에 내밀어졌던 그의 손이 우스꽝스럽게 굳어 버렸다. 주변 귀족들의 시선이 카일의 얼어붙은 얼굴에 내리꽂혔다.
제이드의 긴 다리가 멈춰 선 곳은 카일의 등 뒤 바로 에밀리아의 정면이었다.
남자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주 서자 서늘한 박하 향과 미세한 쇳내음이 섞인 체향이 에밀리아의 코끝을 스쳤다. 압도적인 체격 차이에서 오는 위압감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보랏빛 눈동자로 남자의 붉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제이드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 위에 얹었다. 기사의 완벽하고 절제된 경례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젠버그 공작부인.”
낮고 단단한 중저음이 에밀리아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에밀리아의 시야 한구석에서 푸른빛 알림창이 전례 없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경고: 인가된 관리자 권한(Admin)과의 근접 접촉 발생]
[데이터 링크 동기화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보안 채널이 일시적으로 개방됩니다.]
귓가에 울리던 정전기음이 사라지고 제이드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제이드의 입꼬리에 아주 미세한 호선이 걸렸다. 다른 귀족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큼 은밀하고 깊은 웃음이었다.
“밤하늘의 정해진 궤도를 벗어난 별이 가장 눈부시게 타오르는 법이지요.”
제이드의 붉은 눈동자가 에밀리아의 품속 이혼 청구서가 숨겨진 위치를 아주 찰나 동안 훑고 지나갔다.
“당신의 그 위험하고 흥미로운 궤도 이탈을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군요.”
그것은 단순한 사교적 인사가 아니었다.
남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에밀리아가 품고 있는 서류를, 그녀가 시나리오를 거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떠 있는 시스템의 비밀을.
에밀리아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이 지독한 감옥 같은 세계에서 마침내 진짜 대화가 통하는 상대와 마주했다는 전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