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선언하자 에러가 발생했다

4화: 시나리오의 반격
소식당 문을 나서자마자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뺨을 세차게 때렸다.
에밀리아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넘어진 의자를 바로세우는 소리와 의사를 부르라는 베른의 다급한 외침이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 쥔 펜던트는 단단하고 차가웠다. 품속의 이혼 청구서 또한 흐트러짐 없이 심장 위에 닿아 있었다.
그녀가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시야 한구석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치직, 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허공에 굵은 테두리의 사각형 창이 떠올랐다.
[경고: 메인 시나리오 이탈 감지]
[메인 NPC의 비정상적 행동으로 인해 서사 무결성이 14% 저하되었습니다.]
[긴급 보정 과제 생성 중……]
에밀리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단순한 상태 관찰 문구가 아니었다. 이전의 푸른빛과 달리 피처럼 짙은 붉은 안개가 글자 주변을 타오르듯 감싸고 있었다.
[메인 퀘스트: 깨어진 신뢰의 봉합]
[설명: 로젠버그 공작가의 후계자 카일과의 갈등은 허용 범위를 초과했습니다. 배우자로서의 본분을 기억하고 카일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십시오.]
[수행 조건: 카일 로젠버그의 분노 완화 및 이혼 요구 철회 의사 표명]
[제한 시간: 00:05:00]
[거부 시 제재: 신체 강제 제어 및 의식 통제율 20% 상승]
“사과……?”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앞의 글자들은 그녀에게 카일의 발치에 엎드려 용서를 빌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매일같이 겪었던 그 굴욕적인 순종을 이제는 세상의 법칙 자체가 강요하려는 모양이었다.
제한 시간의 초침이 1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명치 부근에서 기분 나쁜 압박감이 솟구쳤다. 발을 돌려 다시 소식당으로 향하라는 보이지 않는 줄이 온몸을 휘감아 당기는 듯했다.
발목이 저릿하게 굳어 오고 혀끝이 마비되며 머릿속에서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문장이 환청처럼 메아리쳤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를 옭아매던 힘인가.’
자신의 생각인 줄 알았던 비굴함과 체념이 실은 이 붉은 글자가 심어 놓은 통제였다는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두려움이 목을 죄어 왔지만 심장 한구석에서는 불꽃 같은 분노가 치밀었다.
“에밀리아!”
복도 끝에서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구둣발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거칠게 울리며 다가왔다. 카일이었다. 단정하던 금발 몇 가닥이 이마 위로 어지럽게 흘러내려 있었고 푸른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살기가 번뜩였다.
“어머니께 무슨 짓을 한 거지?”
카일이 에밀리아의 어깨를 낚아채듯 붙들었다.
손가락 끝에 실린 악력이 뼈를 바스러뜨릴 듯 거셌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카일의 푸른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 뜬 정보창이 붉은빛을 받아 기이하게 일렁였다.
[개체명: 카일 로젠버그]
[상태: 격분 / 통제 욕구 폭발]
[행동 가중치: 통제 94 / 압박 88 / 배려 0]
통제와 압박의 수치가 이전보다 훨씬 더 높게 치솟아 있었다. 배려는 아예 바닥을 드러낸 채였다.
“대답해. 어머니가 왜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으셨는지 네가 모를 리 없잖아!”
“의사를 부르셨으니 진찰을 받으시겠지요.”
에밀리아는 고통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가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것을 온 식당 안의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것을 제 탓으로 돌리시겠습니까?”
“네 혓바닥이 문제였어!”
카일이 턱을 바짝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감히 이혼을 입에 올리고 어머니의 명령을 면전에서 거역했지. 네가 주제를 모르고 날뛰니까 집안에 이런 흉흉한 일이 생기는 거다!”
그의 시선이 에밀리아의 품으로 떨어졌다. 겉옷 안쪽에 숨겨진 이혼 청구서를 빼앗으려는 속셈이었다.
“그 종이 쪼가리부터 내놔. 당장 내 눈앞에서 찢어 버릴 테니까.”
카일의 손이 뻗어 오는 순간 눈앞의 붉은 창이 거칠게 점멸했다.
[제한 시간: 00:02:40]
[신체 강제 제어 준비 중: 복종 반응 유도]
머릿속에서 경고음처럼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손가락에 힘이 빠지고 품속의 서류를 순순히 카일에게 건네주라는 강렬한 충동이 신경을 짓눌렀다. 무릎이 저절로 꺾여 바닥에 닿을 듯 무거워졌다.
‘절대로 안 돼.’
에밀리아는 이를 악물고 혀끝을 강하게 깨물었다.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피 맛이 몽롱해지던 정신을 번쩍 깨웠다.
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카일의 손목을 강하게 쳐냈다.
짝!
정적이 감돌던 복도에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카일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하녀들이나 집사조차 숨을 죽이고 올려다보는 공작가의 후계자인 자신을 아내가 손수 쳐낸 것이었다.
“네가 지금…… 감히 내 손을 쳐?”
“다가오지 마십시오.”
에밀리아는 서늘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그녀의 시선은 카일의 얼굴 너머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퀘스트 창 아래에는 두 개의 버튼이 깜박이고 있었다.
[수락] / [거절]
수락을 누르면 카일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는 꼭두각시로 되돌아갈 터였다. 그렇다고 거절을 누르면 제재가 발동해 의식을 강제로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정해진 선택지 따위는 따르지 않아.’
에밀리아는 관찰자의 눈으로 창의 구조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공작부인의 상태창에서 글자를 바꿨을 때 보였던 미세한 코드의 결이 떠올랐다. 시스템의 창은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가 작성한 문장의 나열이었고 틈새가 존재했다.
그녀가 의식을 집중하자 붉은 퀘스트 창의 오른쪽 상단에 희미한 회색 기호가 떠올랐다.
[창 닫기 (X)]
[프로세스 옵션: 하위 작업 목록]
일반적인 인물이라면 결코 보지 못했을 작은 관리 기호였다. 에밀리아는 주저 없이 그 기호에 시선을 맞추고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열어.’
작은 보조 메뉴가 물결치듯 펼쳐졌다.
[작업명: 메인 시나리오 복귀 요청_004]
[상태: 강제 실행 대기]
[선택 가능 명령: 일시 중지 / 우선순위 변경 / 강제 종료(Kill)]
강제 종료.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에밀리아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갔다. 사과하라는 명령 자체를 없애 버릴 수 있는 길이었다.
[경고: 활성화된 메인 시나리오 작업을 강제 종료하면 심각한 예외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외 발생 시 서사 안정성이 추가로 8% 감소합니다. 계속하시겠습니까?]
‘안정성이 무너지든 말든, 내 삶이 망가지는 것보다 중요할까.’
에밀리아는 망설임 없이 [강제 종료]를 눌렀다.
쩌저적!
허공에서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붉게 타오르던 퀘스트 창에 거대한 균열이 가더니 수만 개의 붉은 파편으로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작업이 관리자 예외로 강제 중단되었습니다.]
[오류 코드: TASK_FORCE_TERMINATED_BY_OBSERVER]
[서사 안정성 8% 저하 (현재 안정성: 78%)]
[시스템 무결성 주의 단계 진입]
동시에 에밀리아의 목과 사지를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족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숨이 탁 트이며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명치를 옥죄던 충동도 카일에게 머리를 숙이라던 강박도 거짓말처럼 씻겨 나갔다.
“……?”
카일이 갑자기 멈칫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차가워졌다가 풀려난 기이한 위화감을 그 역시 감지한 모양이었다. 카일은 영문을 모른 채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무슨 바람이…….”
“카일.”
에밀리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낮고 단단하게 울리는 음성에 카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앞에 선 에밀리아의 표정은 그가 알던 가련하고 유약한 아내의 것이 아니었다.
어떤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깊고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머니께 사과할 생각은 없습니다.”
“에밀리아, 너……!”
“그리고 이 서류를 당신 손으로 찢는 일도 없을 겁니다.”
에밀리아는 옷깃을 여미며 품속의 청구서를 단단히 고정했다.
“사흘 뒤 황실 신년 연회가 열리지요.”
카일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했다.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지?”
“제국의 고위 귀족들과 중앙 법원의 대법관들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입니다. 공작가에서 제 목소리를 묻어 버리려 한다면 저는 그곳에서 공작가의 추문과 이혼 청구를 정식으로 공론화할 것입니다.”
“미쳤군! 황실 연회에서 이혼 소동을 벌이겠다고? 감히 로젠버그의 이름을 진흙탕에 처박을 셈이야?”
“로젠버그의 이름을 진흙탕에 던진 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들입니다.”
에밀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
“제 방에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한 걸음이라도 제 허락 없이 들이미는 하인이 있다면 즉시 가문의 사병을 부르는 대신 황실 헌병대에 폭행과 감금 미수로 고발장을 보낼 테니까요.”
“멈춰! 에밀리아!”
카일이 뒤에서 고함을 질렀지만 에밀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처소로 걸어갔다.
복도 끝에 서 있던 하녀들이 질린 얼굴로 벽에 달라붙어 길을 비켰다. 에밀리아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육중한 참나무 문을 닫고 안쪽에서 빗장을 굳게 걸어 잠갔다.
철컥.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완벽한 고요가 찾아왔다.
에밀리아는 문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조종하려던 세상의 손아귀를 제 손으로 쳐냈다는 강렬한 전율이었다.
그녀는 목에 걸린 자줏빛 펜던트를 쥐었다. 어머니의 유품은 온전히 그녀의 품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품속의 이혼 청구서는 사흘 뒤 황실의 심장부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시야 한구석에서 푸른빛의 작은 알림이 조용히 깜박이고 있었다.
[관찰자 권한이 갱신되었습니다.]
[다음 대상과의 접촉을 준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