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선언하자 에러가 발생했다

6화: 깎여 나가는 서버
제이드 폰 알스터가 남긴 묵직한 여운은 연회장의 공기를 싸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남자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에밀리아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 황실 의전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족들이 황급히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 침묵을 찢고 다가온 것은 살의에 가까운 분노였다.
“에밀리아.”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카일 로젠버그였다. 연회장 한가운데서 기사단장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던 그의 얼굴은 핏기를 잃고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는 모욕감과 광기가 소용돌이쳤다.
“기사단장과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카일이 짓씹듯 속삭였다. 주변 시선을 의식해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떨리는 턱 끝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알스터 경이 왜 너 따위에게 먼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무슨 짓을 속삭인 거냐고!”
에밀리아는 한 걸음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시야 한쪽에 떠오른 카일의 정보 창이 붉은빛으로 사납게 요동쳤다.
[개체명: 카일 로젠버그]
[상태: 극도의 분노 / 체면 파탄 공포 / 통제 불능]
[행동 가중치: 이성 상실 92 / 폭력성 88 / 체면 회복 95]
[시나리오 보정 기제: 강제 개입 중 - 대상을 즉시 굴복시킬 것]
붉은 글씨가 경고음처럼 깜빡였다. 시스템의 보정 기제가 카일의 이성을 갉아먹으며 폭력을 종용하고 있었다. 에밀리아가 이혼을 요구하자 세계의 규칙 자체가 카일을 채찍질하는 셈이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에밀리아는 메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스터 경은 그저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건넸을 뿐입니다. 공자께서 제게 보여준 적 없는 상식적인 예의를요.”
“입 닥쳐!”
카일이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가락이 에밀리아의 팔목을 낚아채려 들었다.
그러나 에밀리아는 카일의 손길이 닿기 직전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밤하늘을 닮은 흑남색 드레스 자락이 서늘한 궤적을 그렸다.
카일의 손이 허공을 긁었다. 주변 귀족들의 입가에 조소 어린 미소가 스쳤다. 카일의 관자놀이에 푸른 핏대가 솟구쳤다.
“너는 미쳤어. 머리가 완전히 돌아버린 게 분명해.”
카일이 주머니 속에서 작은 은빛 호루라기를 꺼내 들었다. 연회장 내부에서 엄격히 금지된 사병 호출용 도구였다.
“감히 사교계 한복판에서 이딴 망신을 줘? 네 발로 나가지 않겠다면 묶어서라도 끌고 갈 테니까.”
삐익.
날카로운 파동음이 연회장을 뚫고 퍼졌다. 에밀리아의 시야에는 푸른색 음파 파장이 선명하게 시각화되어 뻗어 나갔다.
쿵. 쿵.
연회장 외곽 테라스로 통하는 아치형 유리문이 거칠게 열렸다.
검은 망토에 은빛 사자 문장을 새긴 사병 넷이 난입했다. 연회장 경비를 피해 테라스 회랑에 잠입해 있던 공작가의 직속 호위무사들이었다.
“공자님, 무슨 일이십니까?”
“연회장에 무장 사병이라니…….”
귀족들이 웅성거렸으나 카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병들에게 손짓했다.
“부인이 극심한 착란 증세를 보이고 있다. 즉시 가문의 마차로 호송해 본관 서쪽 별채로 압송하라. 저 입에서 헛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결박해!”
“명령을 받듭니다.”
사병들의 머리 위에도 회색빛 정보 창이 일제히 출력되었다.
[개체명: 로젠버그 사병 A, B, C, D]
[명령: 메인 NPC 에밀리아의 강제 구인]
[상태: 무력 행사 대기]
사병들이 거친 기세로 좁혀들었다. 철갑을 두른 손들이 에밀리아의 어깨와 양팔을 꺾기 위해 뻗어 나왔다.
뒤는 테라스 난간이었고 앞은 무장한 장정 넷과 카일이 막아서고 있었다. 누구 하나 공작가의 폭주를 막아서지 않았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떨지 않았다.
그녀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흑남색 실크 안감 너머로 차가운 서류가 손끝에 닿았다. 카일의 서명이 박힌 이혼 청구서, 그리고 어머니의 자줏빛 펜던트였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
차가운 결의가 뼛속 깊은 곳에서 들끓었다.
저들에게 끌려간다면 기다리는 것은 갇혀 지내는 영원한 침묵뿐이었다. 고통받도록 설계된 시나리오의 꼭두각시로 살다 버려지는 운명.
그 끔찍한 굴레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세계를 부숴버리는 편이 나았다.
에밀리아는 서류를 품에 단단히 쥔 채 차가운 눈동자로 카일을 응시했다.
“명령을 거두십시오, 카일.”
“뭐라고?”
“저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당신이 만든 감옥으로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에밀리아의 목소리는 연회장의 공기를 울릴 만큼 맑고 서늘했다.
“이 결혼은 끝났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로젠버그와의 모든 인연을 끊어낼 것입니다!”
존재 자체를 내던진 절대적인 거부 선언이었다.
그 순간 에밀리아의 망막 전체가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치지직! 찌르르르!
고막을 찢을 듯한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붉은 경고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긴급 경고: 메인 NPC의 서사 거부율 100% 임계치 도달]
[강제 구인 시나리오 이벤트 실행 중 논리적 오류 검출]
[오브젝트 간 물리 엔진 및 서사 앵커 충돌 발생]
[예외 처리 실패: EXCEPTION_ACCESS_VIOLATION]
[메인 시나리오 무결성 붕괴 시작]
[서사 안정성 급락: 78% → 69% → 61%]
우지끈!
거대한 유리창이 깨져나가는 듯한 파열음이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땅이 흔들렸다.
쿠구구구궁!
“……?!”
카일이 휘청이며 바닥을 짚었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파도처럼 굽이쳤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들이 미친 듯 흔들리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쏟아냈다.
챙강! 쨍그랑!
샹들리에에서 떨어진 수천 개의 크리스털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 지진이다!”
“피해! 기둥 쪽으로 가!”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잔이 깨지고 탁자가 뒤집히며 붉은 포도주가 바닥을 적셨다.
하지만 에밀리아의 눈에는 단순한 지진으로 보이지 않았다.
갈라진 바닥 틈새로 붉고 푸른 코드 텍스트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벽면에 칠해진 황금빛 도료가 사각 타일 모양으로 번쩍이며 일그러졌다. 세상의 껍질이 벗겨지며 숨겨진 가상 구조물의 뼈대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세계가 깎여 나가고 있었다.
에밀리아가 시나리오를 거부하자 세상을 지탱하던 마나와 데이터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크윽……!”
에밀리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관자놀이를 불로 지지는 듯한 지독한 두통이 강타했다. 안정성이 60%대까지 깎여 나가면서 발생한 시스템 반동이 신경망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의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눈앞에서 카일의 사병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움직임은 허공의 글리치 현상으로 인해 프레임이 끊기듯 버벅거렸다.
[개체명: 로젠버그 사병 A]
[상태: 물리 앵커 손상 / 지연 시간(Latency): 3,200ms 발생]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어.’
에밀리아는 이를 악물며 떨리는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눈동자에 푸른색 디버깅 포인터가 맺혔다. 사병들의 머리 위에 뜬 명령 프로세스가 보였다.
손끝에 차가운 전류가 튀었다.
‘멈춰.’
에밀리아는 사병들의 행동 루틴을 향해 거부의 의지를 쏘아 보냈다.
[디버그 개입: 개체들의 행동 우선순위 강제 재조정]
[네트워크 지연(Latency) 강제 추가: +5,000ms]
지지직!
에밀리아를 잡으려던 사병 넷의 팔이 허공에서 굳어 버렸다. 마치 투명한 벽에 막힌 것처럼 그들은 에밀리아를 눈앞에 두고도 손가락 하나 뻗지 못했다.
“뭐 하는 거냐!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저 계집을 잡아!”
바닥을 짚고 일어난 카일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사병들은 에러 메시지가 뜬 인형처럼 제자리에서 기괴하게 팔을 떨 뿐이었다.
“이 쓸모없는 것들이……!”
카일의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성을 잃은 남자의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챙-!
서늘한 금속음과 함께 카일의 장식용 검이 뽑혀 나왔다.
“내가 직접 끌고 가겠다. 넌 내 아내야! 내 허락 없이는 숨도 쉴 수 없어!”
카일이 검날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바닥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그의 눈빛만은 오직 에밀리아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에밀리아는 피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품속의 이혼 청구서를 꺼내 카일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베어보십시오.”
에밀리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조소가 흘렀다.
“이 종이를 베든 내 목을 베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으니까.”
“죽어!”
카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바로 그 찰나였다.
콰아아앙-!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칠흑 같은 그림자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챙-!
은빛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카일이 휘두른 장검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손목이 꺾이며 칼이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져 굴렀다.
“커헉……!”
카일이 바닥으로 나뒹굴며 비명을 내질렀다.
먼지 속에서 거대한 백은빛 망토가 휘날렸다.
제이드 폰 알스터였다.
그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 칼집째로 카일의 검을 쳐낸 상태였다.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는 만년설보다 차가운 살기가 맺혀 있었다.
“황실의 신년 연회장 한복판에서 무장 사병을 동원하고 제국의 귀족 부인에게 칼을 겨누다니.”
제이드의 묵직한 음성이 요동치던 연회장을 짓눌렀다.
“로젠버그 공작가가 황실을 상대로 반역이라도 일으키겠다는 뜻인가?”
“알, 알스터 경……!”
카일이 욱신거리는 손목을 쥔 채 바닥을 기며 올려다보았다.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이드의 머리 위에서 백은빛 글자가 환하게 빛났다.
[User: Master_Admin]
[관리자 권한 발동: 구역 내 물리 엔진 안정화 명령 실행]
[SYS_STABILIZE_SECTOR_01]
제이드가 검집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찍자 연회장을 뒤흔들던 지진의 진동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깨진 대리석 사이로 피어오르던 붉은 노이즈들이 남자의 은빛 오라에 억눌리며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완벽한 복구는 아니었다.
연회장 바깥 테라스 너머 제국 수도의 밤하늘에는 거대한 붉은 균열이 번개처럼 흉측한 흉터를 남기고 있었다.
제이드가 천천히 몸을 돌려 에밀리아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등 뒤에 선 에밀리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품속의 이혼 청구서를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흔들리는 공기 속에서 깊게 얽혔다.
제이드의 붉은 눈동자에 경탄과도 같은 은밀한 열기가 스쳤다.
“대담하군요, 부인.”
제이드가 낮게 속삭였다. 그의 입꼬리에 서늘하고도 짙은 미소가 걸렸다.
“당신의 그 결심 하나가 이 세계의 하늘을 찢어발겼습니다.”
연회장의 바닥은 굳어졌으나 하늘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깎여 나간 세계의 틈새로 진짜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