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전문 변호사의 첫 연애

1화: 기록실의 카메라
박세린은 가정법원 법률상담을 마치고 기록실 앞 접수대를 지나던 중이었다.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 장태경이 그녀를 불러 촬영 문의서를 내밀었다. 오래된 조정 절차를 기록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그는 당사자 이름과 사건번호를 가리고 법원 밖에서 촬영하면 되는지 물었다. 세린은 그가 직접 작성한 문의서의 공개 범위란을 읽었다. 사건 기록은 접수대 안에 있었고 두 사람에게 건네지지 않았다.
“이 문의서만으로 당사자의 공개 동의가 확인되는 건 아닙니다.”
“비식별 처리해서 촬영할 생각입니다.”
“이름을 지워도 사건의 세부 내용으로 당사자를 알아볼 수 있어요.”
태경은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럼 촬영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범위가 가능한지 알려 주세요.”
세린은 그가 반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혼 조정 기록은 법원 규정과 당사자 동의가 필요했고, 자료의 일부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태경은 기록을 찍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라, 절차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자처럼 보였다.
“기록실 안은 촬영할 수 없습니다. 공적 자료를 이용한 다큐멘터리는 별도의 심사 절차가 필요합니다. 당사자 동의가 있어도 법원 허가를 받아야 하고요.”
“그러면 기록 대신 공간을 촬영해도 될까요?”
“법원 시설은 사전 허가가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신청하겠습니다.”
태경은 문의서를 접고 가족이 보관하던 조정 일정표 사본을 그 위에 올렸다. 세린이 물으려 하자 그는 그것도 함께 보여 줬다. 조정위원의 이름이 손가락 사이로 보였다.
“그 사건에 개인적인 관계가 있습니까?” 세린이 물었다.
“어머니가 이 조정을 받았습니다.”
세린의 손이 멈췄다. 태경이 가져온 일정표에 적힌 조정위원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두 가족 사이에 이런 접점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어머니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고, 세린은 부모가 이혼하지 않은 이유를 자세히 듣지 못했다.
“그럼 더더욱 촬영은 진행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록을 공개하려는 게 아닙니다. 당시 조정 절차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확인하고 싶어요.”
“가족의 사건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것과, 법원 기록을 확인할 권한은 다릅니다.”
“압니다. 그래서 허가를 신청하려는 겁니다.”
세린은 일정표를 태경에게 돌려줬다. 더 구체적인 확인은 기록 담당자에게 맡기기로 했다. 태경은 문의서에 기록 열람과 별도로 조정 절차에 관한 일반 설명을 요청하는 내용을 적었다. 그는 카메라를 켜지 않은 채 복도 끝의 닫힌 조정실 문을 바라봤다.
“어머니가 여기 앉아 계셨겠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을 봐야 알 수 있어요.”
“기록을 볼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적법한 열람 신청과 당사자 권한이 확인되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태경은 접수대의 기록 담당자에게 신청 방법을 물었다. 담당자는 신청 사유와 가족관계를 확인할 자료 목록을 건넸다. 세린은 사건 당사자의 대리인도, 열람 심사자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이름을 발견한 뒤에는 개인적인 관련까지 생겼다. 그녀는 일반적인 질문에만 답하고 접수대에서 물러났다.
며칠 후, 태경은 법원 밖의 작은 카페에서 세린을 만났다. 그는 허가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질문하고 싶다고 했다. 세린은 변호사와 신청자의 사적 만남이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 사건 관련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요.”
“그게 가능할까요?”
“제가 먼저 묻지 않으면요.”
세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태경은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기회를 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기록을 대신 설명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열람 결과가 나오면 공식 채널로 안내받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카메라 가방을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받는 사람에 태경 어머니의 이름이 적힌 오래된 편지의 사본이었다. 세린은 읽지 않으려 했지만, 봉투 겉면에 적힌 글씨는 익숙했다. 세린의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이 편지는 기록실에 있던 건가요?”
“아니요. 아버지 집에서 찾았습니다.”
“그럼 기록 열람과는 별개네요.”
“맞아요. 이건 제 가족 물건입니다. 보여 드릴지 말지 제가 정할 수 있습니다.”
태경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읽어 달라고 부탁하려고 가져온 건 아닙니다. 세린 씨가 아는 글씨인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세린은 봉투를 보았다. 받는 사람은 태경의 어머니였지만 어떤 사연으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태경이 가져온 일정표의 서명과 같은 손글씨라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 글씨가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편지를 공개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태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록 담당자의 연락을 받은 그는 통화를 마친 뒤 안내받은 범위를 세린에게 말했다. 신청은 일부 승인되었지만 개인 기록과 세부 진술은 제외됐다. 절차 안내 문서와 비식별된 일정표만 볼 수 있었다. 그는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걸로 충분합니까?” 세린이 물었다.
“충분하지 않겠죠. 그래도 허용된 범위부터 보겠습니다.”
그는 편지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세린은 그가 카페를 떠난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법원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아버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록은 자신의 호기심만으로 열어 볼 수 없었다.
그날 밤 세린은 어머니의 오래된 서랍을 정리했다. 자필 메모 중에 ‘태경 모친, 기록 열람 안내’라는 문장이 있었다. 날짜는 부모의 조정이 끝난 뒤였다. 세린은 메모를 사진으로 남기고 서랍에 넣었다. 이것이 태경의 가족과 어머니의 관계를 증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머니가 그 사건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안내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다음 날 사무실에 온 의뢰인은 아이의 연습장 한 장을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아빠가 또 늦었다’고 적혀 있었다. 세린은 연습장을 의뢰인 쪽으로 밀었다. 상대가 약속을 세 번 바꾼 날짜는 연락 내역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제가 참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아이에게 맡기지 않을 일을 고르는 거예요.”
의뢰인은 종이를 도로 접었지만 쉽게 가방에 넣지 못했다. 세린은 말없이 기다렸다. 자신이라면 어머니의 손글씨를 증거 한 장으로 받아들였을 것 같았다. 오래된 봉투만 손에 넣으면, 집에서 입을 다물었던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명확했던 경계가 자기 서랍 앞에서는 흐려졌다.
상담이 끝났을 때 태경에게 메시지가 왔다. 편지를 촬영하지 않고 사본도 더 만들지 않겠다는 말 뒤에 짧은 질문이 붙어 있었다. ‘카페에 두고 가신 우산은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세린은 그제야 가방이 가볍다는 걸 알았다.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우산을 놓고 온 자신이 우스웠다.
‘로비에 맡겨 주세요.’
보내고 나서 그 문장을 보았다. 부탁도 인사도 없는 말투는 상담 일정을 잡을 때와 같았다. 그녀는 다시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덧붙였다. 태경의 답장은 십 분쯤 뒤 왔다. ‘제가 남의 우산을 잘 잃어버려서요. 이번에는 먼저 보내 놓겠습니다.’
세린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누르다가 혼자 있는 사무실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웃어도 될 일인데 왜 허락을 찾고 있을까. 그녀는 의뢰인에게서 받은 일정표를 정리하고, 남은 커피를 버렸다. 차가워진 컵을 들고 있던 손이 아까보다 가벼웠다.
오후에 로비로 내려가니 우산과 쪽지가 함께 있었다. ‘검은 우산이 셋이라 손잡이 흠집으로 찾았습니다.’ 손잡이 끝에는 세린이 어머니와 함께 고른 때부터 있던 작은 흠집이 있었다. 남이 알아본 흔적 하나가 이런 기분을 만들 줄은 몰랐다. 태경은 편지뿐 아니라 어제 그녀가 만지작거리던 우산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전화했다. 벨이 세 번 울리는 동안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쪽지는 왜 붙이셨어요?”
“다른 우산을 가져가시면 제가 하나 더 잃어버린 사람이 되잖아요.”
“우산을 찾았다고 연락드린 거예요.”
“다행입니다.”
세린은 다음 말을 생각하다가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사건 번호를 읽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어제 커피값은 제가 안 냈죠?”
“다음에 내셔도 됩니다.”
“다음 만남을 약속한 건 아닌데요.”
“알아요. 그럼 우산 찾은 걸로 충분합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이 빠지지 않았다. 세린은 통화를 끊고도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쉽게 밀고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어서 편했고, 정말 돌아서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어서 조금 서운했다. 그녀는 그 감정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저녁에 어머니의 서랍을 다시 열었다. 법원에서 가져온 문서는 하나도 없었다. 전날 찾은 메모 옆에, 어머니가 취미 수업에 가져가던 작은 수첩이 있었다. 세린은 맨 뒤 빈 장에 자기 질문을 썼다. 어머니는 왜 조정위원을 했을까. 왜 집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태경의 아버지 집에 어머니의 편지가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수첩 앞쪽에는 화분 그림이 여럿 있었다. 어머니가 다육식물의 이름을 틀리게 적고 옆에 정답을 고친 흔적이었다. 세린은 그 페이지를 오래 바라봤다. 어떤 서류에도 남지 않을 만큼 작은 실수,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던 하루. 어머니에게 그런 시간도 있었다는 것을 자꾸 잊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전화하려다 화면을 껐다. 다시 켰다. 주말에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를 보내는 데 십 분이 걸렸다. 답은 단 한 줄이었다. ‘네 좋아하는 찌개 해 놓을게.’ 무엇을 물을지는 아직 적지 않았지만, 세린은 수첩을 잠그지 않고 식탁에 놓았다.
그때 태경이 다시 연락했다. 열람 신청에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족관계 서류에는 어머니가 윤혜진으로 적혀 있었지만 오래된 사건의 이름은 윤정화였다. 그는 어머니가 오래전 개명했다고 들었으나, 그 시기를 확인할 자료를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 낸 서류만으로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세린은 우산 곁에 놓인 쪽지를 뒤집었다. 태경은 다시 업무에 관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록실 담당자에게 확인해야 한다고 답한 뒤, 어머니의 수첩을 한 장 더 넘겼다. 그림 아래 짧은 이름이 있었다. ‘정화 씨에게 줄 화분.’ 처음 만난 남자의 가족이 오래된 자기 집 식탁까지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