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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판(神判)의 마스터 변호인9화

신판(神判)의 마스터 변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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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두 번째 의뢰인

청년의 떨리는 손끝에서 종이 한 장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상단에 붉은 먹물로 찍힌 세 글자가 선명했다.

원한귀(怨恨鬼).

그 아래에는 거친 필체로 사유가 적혀 있었다.

‘이승에 대한 집착 및 저승 입문 질서 교란. 원한을 품고 분류를 거부한 자.’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칼날에 베였던 손바닥의 붕대 사이로 통증이 번졌지만 손을 떼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청년이 마른침을 삼켰다. 목깃을 쥔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윤서진입니다.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스물여섯.”

나는 그의 목깃 아래를 보았다. 찢긴 옷감 틈으로 드러난 상처는 날붙이가 깊숙이 파고든 자상이었다. 검붉은 기운이 흉터 주변을 안개처럼 감돌았다. 망자의 몸에 남은 치명상의 흔적이었다.

“이 회부표를 어디서 받았습니까?”

“초군문 앞 분류소였습니다.”

윤서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기계 소리가 끊어지고 암흑이 찾아왔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안개 낀 강가였고 흰 이름표 하나만 쥐여 있었습니다.”

박덕순이 털신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고개를 들어 청년을 보았다.

“관리들이 망자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명부를 내밀자 거기에는 ‘사망 원인: 흉기 자상’이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옆에 ‘가해자: 불상, 종결 상태: 수사 중’이라는 글자가 보였습니다.”

윤서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골목길이었습니다. 뒤에서 누군가 달려와 목덜미를 찔렀습니다. 돈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시비도 없었습니다. 그냥 찌르고 달아났습니다. 쓰러지는 순간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날 찌른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눈을 감을 것 같았습니다.”

윤서진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관리에게 물었습니다. 저를 죽인 놈이 잡혔는지 경찰이 찾아냈는지 물었습니다. 그자가 죗값을 치르는 걸 봐야 떠날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산 자의 일은 끝났으니 체념하라고요. 죽은 자가 미련을 두고 버티는 것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짓이라면서요.”

윤서진의 숨이 거칠어졌다.

“물러서지 않자 제 이마에 붉은 먹을 칠하고 이 종이를 쥐여 주며 끌어냈습니다. 가해자를 찾는 집착은 살의와 같으니 지옥에 가서 그 성질을 태우라면서요. 칼에 맞아 죽은 제가 왜 죄인입니까? 왜 제가 벌을 받아야 합니까?”

억울함과 공포가 뒤섞인 절규였다. 주변에 모여 있던 다른 망자들이 술렁였다.

나는 윤서진의 떨리는 어깨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승 국선 변호인을 선임하시겠습니까?”

윤서진이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변호… 인이요?”

“저는 염라대왕에게 임시 자격을 부여받은 저승 국선 변호인 강한결입니다. 기적을 일으켜 살려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정당한 의문을 원한으로 둔갑시켜 형벌을 가하려는 부조리에 맞서 싸울 수는 있습니다. 절차를 따지고 권리를 지키는 싸움을 함께하시겠습니까?”

윤서진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단단하게 굳었다.

“도와주십시오. 제가 왜 죽어야 했는지 그것 하나만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그의 승낙이 닿는 순간 왼쪽 손목의 신판 팔찌가 묵직한 열기를 뿜어냈다.

피고인 윤서진의 변호인 선임 의사를 확인하여 정식 기록으로 채택함.

붉은 문장이 허공을 가르며 회부표 한구석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저승 법정에 두 번째 사건이 정식으로 접수되는 순간이었다.


이태가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그의 시선이 윤서진의 목 언저리에 머물렀다.

“어떠냐, 이태.”

“타인을 해치려는 살의나 파괴의 기운은 전혀 없어요.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뿐입니다. 거짓으로 꾸며내는 냄새도 없어요.”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살의 원인을 묻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것을 저승 관료들은 원한귀라는 낙인으로 덮어씌웠다.

원한귀란 산 자를 해치거나 영혼의 순환을 방해하는 악귀를 뜻한다. 구체적인 위해 행동이나 악의가 증명되어야 성립하는 중죄였다. 그런데 초군문 분류소는 분류를 서두르려 질문을 던진 피해자를 원한귀로 묶어 버렸다.

나는 회부표 하단에 찍힌 또 다른 인장을 살폈다.

‘관할: 화탕지옥(火湯地獄) 예비 심문 회부.’

화탕지옥. 끓는 가마솥과 유황 불길 속에서 타인의 삶을 불태운 죄를 다스리는 지옥이다.

“윤서진 씨, 찔리던 당시의 상황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자정이 넘은 시각, 가로등이 깜빡이던 골목이었습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돌아보기도 전에 충격이 덮쳤습니다.”

“흉기의 형태를 보았습니까?”

“너무 순식간이었습니다. 다만 날이 얇고 날카로운 쇠 느낌이었습니다. 찌른 자는 제가 쓰러지자 주머니를 뒤적이지도 않고 곧바로 어둠 속으로 달아났습니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습니까?”

“네. 그냥 베어 넘기듯 찌르고 달아났습니다.”

묻지마 범죄. 혹은 계획된 표적 습격.

어느 쪽이든 윤서진은 명백한 피해자였다.

“이태, 저 회부표를 발부한 접수처가 어디냐?”

“회랑 끝, 연결 통로에 있는 제칠계호 창구예요. 각 지옥으로 호송하기 전에 문서를 정리하는 곳이죠.”

“가자.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자들의 발목부터 잡아야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다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치밀었다.

“변호인님!”

윤서진이 손을 뻗었고 이태가 재빠르게 내 팔을 받쳤다.

“무리하지 마세요. 상처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걸을 수 있다. 억울하게 불 속에 던져질 사람을 두고 앉아 있을 수는 없어.”

박덕순이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등 뒤로 느끼며 나는 제칠계호 창구를 향해 발을 떼었다.


제칠계호 창구는 쇠창살로 둘러싸인 삭막한 방이었다.

책상 뒤편에는 푸른 관복을 입은 서리가 두루마리 더미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나졸들이 주변을 지켰다.

내가 창살 앞에 서자 서리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 번호표 내밀어.”

“번호표가 아니라 이의 신청서와 변호인 선임계를 내러 왔습니다.”

내 목소리에 서리의 붓이 뚝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목의 신판 팔찌로 향했다.

“당신… 도산지옥에서 귀마 판관님의 칼날을 가라앉혔다는 그 변호사인가?”

서리의 눈빛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렇습니다. 망자 윤서진의 변호인 강한결입니다.”

나는 회부표를 창살 틈으로 밀어 넣었다.

“이 청년에게 발부된 원한귀 회부 처분의 법적 근거를 묻고자 합니다.”

서리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초군문 분류 규정에 따른 처분이다! 사망 확인을 거치고도 순순히 따르지 않고 가해자를 들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집착을 버리지 못했으니 원한귀가 마땅하다.”

“저승 사법 규정 제몇 조 몇 항에 피살 원인을 묻는 행위를 원한귀로 특정하여 처벌하라는 조항이 있습니까?”

내 차가운 추궁에 서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세부 조항까지 일개 서리가 외우고 다닐 성싶으냐! 이승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으면 영혼에 원한의 불꽃이 깃든다. 그것을 방치하면 다른 망자들에게까지 악귀의 기운이 전염된다!”

“추상적인 비유로 죄를 창조하지 마십시오.”

나는 창살을 짚으며 힘주어 말했다.

“원한귀란 타인을 해하려는 위해 행위나 구체적인 파괴 의사가 확인되었을 때 적용하는 죄목입니다. 윤서진 망자가 누구를 때렸습니까? 어떤 기물을 부쉈습니까? 저승 관리를 폭행하거나 다른 망자를 해친 적이 있습니까?”

“그건….”

“없습니다. 이 청년이 한 것은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 진실을 묻고 호소한 것뿐입니다. 그것이 어찌하여 타인을 해치려는 원한귀의 죄악이 됩니까?”

서리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떨었다. 그러다 책상을 내리쳤다.

“그렇다면 왜 화탕지옥으로 회부되었겠는가!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길 같은 분노는 화탕의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분류 판관의 정식 결재가 떨어진 사안이다!”

“그 관할 배당이야말로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서리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화탕지옥은 탐욕과 방화, 타인의 터전을 불태운 죄를 다스립니다. 칼을 맞고 숨진 피해자의 슬픔을 어찌 불태운 죄와 동일시합니까? 가해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비명을 죄악의 불꽃이라 부르며 끓는 솥에 던지겠다는 겁니까?”

서리의 턱이 굳었다. 나졸들도 내 논리에 압도되어 창대를 꽉 쥐었다.

“서리, 지금 당장 윤서진 망자의 초군문 접수 원부와 피살 명부 요약본을 열람하게 해 주십시오. 정식 변호인으로서 증거 조사를 요구합니다.”

“대외비다! 열람 권한이 없다!”

서리가 버티자 나는 손목을 높이 치켜들었다.

신판 팔찌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안개가 창살을 타고 흘러들어가 서리의 책상 위를 물들였다.

저승 국선 변호인의 정식 증거 열람 및 절차 확인 요구를 기록함.
정당한 이유 없는 증거 열람 거부는 절차적 방어권 침해로 간주됨.

서리의 책상 한가운데에 새겨진 붉은 문장이 서슬 퍼렇게 타올랐다.

서리는 공포에 질려 붓을 떨어뜨릴 뻔했다.

“보여 줄 테니 그 불길부터 거두어라!”


서리가 떨리는 손으로 철제 서랍을 열어 누런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초군문 피살 망자 명부 요약: 윤서진.’

두루마리가 책상 위에 펼쳐졌다.

명부에는 윤서진의 신원과 사망 당시의 상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망자: 윤서진. 향년 26세.
사망 시각: 자정 무렵.
사인: 좌측 쇄골하 동맥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발견 장소: 이승 서울 모처 주택가 골목길.’

그리고 그 아래 적힌 문장들이 내 눈을 사납게 찔렀다.

‘가해자: 불상(不詳).
흉기: 불상(不詳).
범행 동기: 미상.
이승 수사 상태: 현장 폐쇄회로 화면 부재 및 목격자 없음. 수사 장기 미결 예상.’

가해자 불상. 흉기 불상.

윤서진의 목숨을 앗아간 자의 정체는 물론 그를 찔렀던 칼날의 실체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 보십시오.”

윤서진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명부를 가리켰다.

“이승에서도 아무것도 밝히지 못했습니다. 날 찌른 놈이 누구인지, 흉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승은 이 종이 한 장으로 입을 다물라 합니다. 가해자는 지금도 이승에서 숨 쉬고 있을 텐데요!”

청년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명부의 여백을 짚었다.

이승의 사법이 밝혀내지 못한 미결의 구멍. 저승 관료들은 진실을 요구하는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원한귀라는 족쇄를 채워 지옥으로 떠넘기려 했다.

“가해자의 이름도 흉기의 존재도 특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를 먼저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서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선언했다.

“원인과 행위자가 빠진 반쪽짜리 문서입니다. 이 상태로 윤서진 망자를 화탕지옥으로 이송하는 것은 위법입니다.”

서리가 식은땀을 닦으며 항변했다.

“화탕지옥의 예비 심문 기일이 이미 지정되었다! 이송 명령은 상부의 결재를 거친 것이라 일개 서리가 취소할 수는 없다!”

“이송 명령을 취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긴급 이의 신청을 접수하고 본안 심리가 개시되기 전까지 형벌 집행과 이송을 잠정 유예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신판 팔찌를 들어 서리의 장부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피고인 윤서진에 대한 원한귀 회부 처분에 중대한 절차적·실체적 하자가 존재함을 이유로 긴급 이송 정지 및 증거보전을 신청함.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서리의 장부 표지에 내 요구가 붉은 글씨로 봉인되었다.

서리는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화탕지옥 주심 판관에게 이 이의 신청서를 함께 올리겠다. 하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다. 화탕지옥의 판관들은 도산지옥의 귀마 판관보다 훨씬 더 성격이 불같다. 이승의 진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결국 가마솥 속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증명할 겁니다.”

나는 뒤로 물러서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철창을 빠져나와 회랑으로 돌아왔을 때 윤서진이 내 앞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변호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 말을 이렇게 끝까지 들어준 분은 처음입니다.”

“고마워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이제 겨우 첫발을 뗐을 뿐입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화탕지옥은 분노와 원한의 불길을 다스리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억울함이 죄가 아니라 정당한 권리임을 밝혀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명부가 지워버린 이승의 진실을 저승 법정으로 끌고 와야 합니다.”

“이승의 진실을 어떻게 가져옵니까? 우리는 이미 죽어서 저승에 갇혀 있는데요.”

윤서진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저승의 칠흑 같은 허공을 응시했다.

살아 있는 가해자. 사라진 흉기. 그리고 어둠 속에 묻힌 진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수천 년 동안 망자들에게 굳게 닫혀 있던 금기의 통로를 열어야만 했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유일한 문.

귀문관(鬼門關).

“방법이 있습니다.”

내 목소리가 고요한 회랑에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그 문을 열어 당신을 찌른 칼날의 진실을 반드시 법정에 세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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