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판(神判)의 마스터 변호인

10화: 귀문관
제칠계호 창구를 등지고 회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마다 왼쪽 다리가 묵직하게 욱신거렸다.
도산지옥의 칼날에 찢겼던 상처가 아물 틈도 없이 찬 기운을 머금고 맥박을 쳤다. 손바닥을 칭칭 감은 무명 붕대 위로도 붉은 핏물이 번져 나왔다. 뼈마디를 파고드는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지만 숨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변호인님, 제발 무리하지 마십시오.”
윤서진이 안절부절못하며 내 곁을 따랐다. 스물여섯 청년의 얼굴에는 방금 서리의 장부에 찍힌 붉은 인장에 대한 놀라움과 함께 여전히 걷히지 않은 짙은 불안이 서려 있었다.
이태가 내 반대편 팔을 단단히 받쳐 주며 말했다.
“서리의 장부에 도장을 찍어 놨으니 당장 화탕지옥 가마솥으로 끌고 가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저 창구 너머에서 풍기는 냄새가 좋지 않아요. 유황 타는 냄새와 성마른 기름 냄새가 점점 짙어지고 있어요.”
“화탕지옥에서 독촉장이 내려오고 있다는 뜻이겠지.”
우리는 일반 심판 대기 회랑의 긴 석조 의자로 돌아왔다.
의자 한쪽에 앉아 있던 박덕순이 인기척을 느끼고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품에 꼭 안고 있던 털신을 쓰다듬다 말고 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무죄 등본이 삐져나온 보따리를 무릎에 얹은 채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르신. 우선 급한 불은 껐습니다.”
내가 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자 윤서진이 그 곁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걸쳤다. 박덕순이 청년의 창백한 안색과 목덜미의 붉은 흉터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 이 험한 곳에 이런 몹쓸 것을 목에 달고 왔누. 세상에 남겨 둔 사람들은 어쩌고….”
그 말 한마디에 윤서진의 어깨가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가 계십니다. 시장 골목 한구석에서 평생 채소를 다듬어 절 키우셨습니다. 그날 밤에도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갈 테니 먼저 주무시라고 전화를 드렸는데….”
윤서진이 목을 움켜쥐었다. 쇄골 아래 깊숙이 팬 상처 주변으로 검붉은 한기가 일렁였다.
“병원 영안실에 제 시신이 누워 있을 겁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내 아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야 했는지 어머니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실 텐데… 저승에서는 저보고 억울함을 묻지 말라고 합니다.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 한 죄로 지옥 솥에 들어가 타 죽으라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법입니까?”
박덕순이 거친 손을 뻗어 윤서진의 떨리는 손등을 가만히 덮었다.
“나도 그랬어요. 내 아이를 버리지 않았다고 도윤이를 살리려고 진료소에 맡겼을 뿐이라고 수십 번을 울부짖어도 저자들은 내 말을 비웃으며 칼산으로 밀어 넣었지요. 하지만 이 변호사님이 끝까지 종이를 뒤지고 글자를 바로잡아 주셨어요. 그러니 넋을 놓지 말아요. 바른길을 찾아 주실 테니까요.”
윤서진이 눈물을 삼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손바닥의 상처가 쓰라렸지만 머릿속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진 씨, 제칠계호 창구에서 확인한 당신의 피살 명부에는 치명적인 구멍이 있습니다. 가해자 불상, 흉기 불상. 이 두 글자가 적혀 있는 한 저승의 관료들은 당신을 사건의 온전한 피해자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제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명백한 피해의 증거 아닙니까?”
“상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승의 사법은 책임을 덮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가해자가 밝혀지지 않은 살인 사건은 저승 행정 입장에서 ‘미결의 빚’입니다. 원인을 밝히려면 이승의 수사를 추적해야 하고 이승의 사법과 연결되어야 하니까요. 그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저들은 피해자에게 원한귀라는 죄목을 씌워 화탕지옥으로 치워 버리는 편법을 썼습니다.”
내 설명에 윤서진이 주먹을 쥐었다.
“그럼 저는 그저… 저들의 서류를 편하게 정리하기 위해 지옥으로 가야 했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화탕지옥의 예비 심문은 도산지옥보다 훨씬 잔혹합니다. 도산지옥이 행위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화탕지옥은 영혼의 감정을 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해자를 향한 당신의 의문과 슬픔을 ‘원한의 화염’으로 규정하여 끓는 솥 속에서 태워 없애려 할 겁니다. 그 법정에 서기 전에 우리는 명부의 공백을 채워야 합니다.”
이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공백을 채운다는 건… 가해자와 흉기를 찾아낸다는 뜻인가요? 하지만 이승의 수사도 아직 미결이라면서요. 저승에 갇힌 우리가 어떻게 산 자들의 땅에 있는 것을 알아내요?”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의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랐지만 벽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저승에도 이승과 닿아 있는 유일한 사법 통로가 있습니다.”
박덕순의 눈이 커졌고 이태의 콧날이 씰룩였다.
“설마… 귀문관(鬼門關)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귀문관이다.”
내 목소리가 서늘한 회랑의 돌벽에 부딪혀 잔잔하게 울렸다.
“이승의 현장을 저승 법정으로 소환하지 않고서는 저 부실한 명부를 뒤집을 수 없다. 문을 열러 가자.”
귀문관으로 향하는 길은 도산지옥의 칼바람과는 또 다른 냉혹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회랑을 벗어나 북쪽 통로의 끝자락으로 들어서자 공기 자체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발아래 깔린 흑요석 바닥은 망자들의 슬픔과 미련을 빨아들인 듯 짙은 먹빛을 띠고 있었다. 길목 양옆에는 붉은 부적이 빽빽하게 붙은 석주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기운이 너무 서늘해요.”
이태가 내 옷자락을 쥐며 주변을 경계했다.
“여기는 초군문이나 도산지옥과 달라요. 저 너머에서 산 자들의 냄새와 죽은 자들의 원통한 냄새가 한데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어요. 경계가 찢어질 듯 팽팽해요.”
저 멀리 안개 너머로 거대한 흑철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가 수십 길에 달하는 문은 통째로 벼려 낸 무쇠로 만들어져 있었고 문짝 표면에는 수천 개의 쇠사슬과 봉인 부적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문루 위에는 사나운 도깨비 형상의 석상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금기의 관문, 귀문관이었다.
관문 아래에는 푸른 먹물로 물들인 관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긴 철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그의 흉배에는 백호가 새겨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커다란 청동 열쇠 뭉치가 묵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귀문관을 지키는 사법 감찰관이자 수문관이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수문관이 철퇴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하는 쇳소리와 함께 바닥의 흑요석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멈춰라. 이곳은 망자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금역이다. 일반 심판 대기표를 지닌 자들이 어찌하여 귀문관의 봉인석 앞까지 기어들어 왔느냐!”
수문관의 매서운 눈빛이 윤서진의 목에 남은 자상과 내 손목의 신판 팔찌를 훑었다.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품 안에서 작성해 둔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망자 윤서진의 변호인 강한결입니다. 귀문관 사법 통제 규정에 따라 이승 사건 현장 검증 및 증거 소환 신청서를 제출합니다.”
수문관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내민 서류를 흘겨보더니 기가 찬다는 듯 냉소를 터뜨렸다.
“증거 소환? 일개 피살 망자의 변호 따위를 위해 귀문관을 열어 달라고?”
그가 철퇴 끝으로 종이를 쳐내려 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서류를 굳게 쥐었다.
“저승 소송법 제십사 조에 따르면 공소 사실의 핵심 요건인 범죄 도구와 행위자가 불상으로 남아 있을 때 피고인 측은 객관적 사실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이승과의 경계 통로를 통한 증거보전을 신청할 권리가 있습니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수문관의 호통이 관문 앞을 뒤흔들었다.
“음과 양의 경계는 태초 이래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닫혀 있어야 마땅하다. 귀문관은 천명을 받아 이승의 망자를 인도하는 저승사자만이 제한적으로 넘나드는 문이다. 저승 판관들의 최고 회의조차 신중을 기하는 이 문의 빗장을 한낱 미결 살인 사건의 흔적 따위를 보기 위해 열어젖히겠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윤서진이 수문관의 서슬 퍼런 기세에 질려 한 걸음 물러섰다.
“변호인님… 역시 무리인 것 같습니다. 저 거대한 문을 일개 망자인 저 때문에 열어 줄 리가….”
“물러서지 마십시오 윤서진 씨.”
나는 청년의 어깨를 단단히 짚었다. 그리고 수문관을 똑바로 응시했다.
“수문관님, 귀문관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이유가 음양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억울한 망자에게 누명을 씌워 불길 속에 던져 넣는 것이 저승이 말하는 음양의 조화입니까?”
“말을 삼가라! 저승 사법을 모욕하는 언사는 그 자체로 중죄다!”
“모욕이 아니라 법리입니다.”
내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금 제 손에 들린 명부에는 윤서진 망자를 찌른 흉기도 가해자의 이름도 없습니다. 실체적 진실을 입증할 책임을 방기한 채 피해자의 슬픔을 원한귀의 악의로 왜곡하여 화탕지옥으로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볼 문을 닫아걸고 피해자를 태워 죽이는 것이 귀문관 감찰관이 지켜야 할 사법 정의입니까?”
수문관의 턱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궤변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네놈은 일개 죽은 영혼일 뿐이다. 염라의 칙령이 없는 한 이 문턱을 넘을 수도 문틈을 열 수도 없다. 썩 물러나라!”
수문관이 철퇴를 들어 올려 우리를 향해 겨누었다. 주변을 지키던 나졸들도 일제히 창끝을 세웠다.
창끝이 턱밑까지 다가왔지만 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두운 통로 속에서 둔탁한 쇳빛을 띠고 있던 신판 팔찌가 내 심장 박동과 호응하듯 붉은 맥박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염라의 칙령을 원하십니까?”
팔찌의 붉은 보석이 서서히 타올랐다.
도산지옥의 판석을 가라앉히고 제칠계호 서리의 책상에 새겨졌던 그 서슬 퍼런 법정의 기록 권능이었다.
저승 국선 변호인의 피고인 방어권 행사 및 객관적 증거 수집 청구를 공인함.
형벌 법정 회부 전 사실 조사를 방해하는 자는 적법 절차 위배로 즉시 탄핵의 대상이 됨.
팔찌에서 뻗어 나온 붉은 광선이 거대한 흑철 관문의 문턱에 닿았다.
치지지직 하는 마찰음과 함께 문턱에 새겨진 고대 저승의 법문들이 붉은빛에 반응하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쇠사슬이 덜컹거리며 쇳소리를 냈다.
수문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가 쥔 철퇴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이것은… 대왕님의 친필 인장…?”
“염라대왕께서 내리신 49일 저승 국선 변호인의 직무 권한입니다.”
나는 붉은빛이 감도는 손목을 수문관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수문관님, 당신이 지키는 귀문관 또한 염라대왕의 통치와 저승 사법 규정 아래에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판관의 자의적 처분으로 무고한 망자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왕께서는 제게 적법 절차를 감시하고 기록할 권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 그렇다 한들…!”
수문관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더듬었다.
“대왕님의 팔찌라 하여 무조건 귀문관의 봉인을 풀 수는 없다! 이승의 사건 현장을 비추는 일은 저승의 사법 시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권능이다. 망자의 영혼이 이승의 빛을 직접 마주하면 이승에 집착이 생겨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는 악귀로 변질될 위험이 있단 말이다!”
“그렇기에 정식 절차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서류를 다시 수문관의 가슴팍에 내밀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영혼이 직접 이승으로 건너가는 월경이 아닙니다. 저승 소송법에 명시된 영사대(影寫臺)를 통한 증거 소환입니다. 이승 사건 현장의 시공간을 저 거대한 문루의 거울에 투영하여 범행 당시 사용된 흉기의 형태와 현장의 객관적 흔적만을 검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수문관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영사대를 통한 증거 소환. 그것은 고대 저승 법전에 엄연히 존재하는 합법적인 절차였다. 다만 판관들이 귀찮고 번거롭다는 이유로 수백 년간 서랍 속에 묻어 두었던 잊힌 조항이었다.
“영사대를 가동하려면… 조건이 있다.”
수문관이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의 오만하던 눈빛은 이미 신판 팔찌의 권능과 흠잡을 데 없는 법리에 완전히 꺾여 있었다.
“어떤 조건입니까?”
“영사대는 아무 기억이나 비추지 않는다. 망자가 찔리던 당시의 정확한 시공간 좌표가 기억 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어야 하며 그 기억 속에 사리사욕이나 타인을 해치려는 살의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왜곡된 감정이 개입하면 영사대의 거울은 깨어지고 오히려 저승의 혼란만 가중된다.”
수문관이 윤서진을 쏘아보았다.
“네놈이 그 끔찍한 피살의 순간을 거짓 없이 추호의 악의 없이 있는 그대로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 살을 에는 칼날의 고통을 다시 마주하고도 영혼이 부서지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말이다!”
윤서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죽음의 공포가 다시 그를 덮쳐오는 듯했다.
나는 윤서진의 곁에 섰다.
“서진 씨, 혼자 감당하게 두지 않습니다. 변호인이 함께 봅니다. 당신을 찌른 칼날의 실체를 확인해야만 당신의 눈물을 죄악이라 부르는 자들의 입을 막을 수 있습니다.”
윤서진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피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그 결의를 바라보며 이태가 조용히 다가가 청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태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이태의 맑은 눈동자가 수문관을 향했다.
“거짓은 없습니다. 이 사람의 기억 속에는 타인을 해치려는 살의도 원한으로 오염된 독기도 없어요. 오직 왜 자신이 그 차가운 골목길에서 쓰러져야 했는지에 대한 정직하고 아픈 진실뿐입니다.”
수문관은 이태를 바라보며 탄식하듯 숨을 내뱉었다. 영혼의 순수함을 꿰뚫어 보는 신수(神獸)의 기운을 그 역시 본능적으로 감지한 터였다.
더 이상 거부할 명분은 저승 법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록관, 문을 열 준비를 하라.”
수문관이 떨리는 손으로 허리춤에서 커다란 청동 열쇠를 꺼냈다. 그가 흑철 관문의 중앙에 박힌 거대한 도깨비 문양의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비틀었다.
쿠구구구궁―!
대지를 뒤흔드는 묵직한 굉음과 함께 수천 개의 쇠사슬이 풀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흑철 문짝이 삐걱거리며 안쪽으로 서서히 벌어졌다. 문틈 사이로 짙은 먹구름과 푸르스름한 안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틈새를 통해 이승의 바람이 밀려왔다.
축축하고 차가운 아스팔트 냄새. 늦은 밤 도시의 매캐한 공기.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빗소리와 함께 앵앵거리는 경찰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저승의 서늘한 적막을 찢었다.
윤서진이 문틈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이 냄새는… 그날 밤입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 골목길의 냄새예요.”
문루 상단에 설치되어 있던 거대한 청동 거울, 영사대가 푸른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거대한 화면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주황색 가로등.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좁은 골목길의 바닥.
그곳에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가던 스물여섯 청년의 뒷모습과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수문관이 장부를 펼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저승 국선 변호인 강한결의 신청에 따라 망자 윤서진 피살 사건에 대한 귀문관 영사대 증거 조사를 개시한다.”
내 왼쪽 손목의 신판 팔찌가 붉은 화염처럼 뜨겁게 맥동했다.
귀문관 증거 조사 절차가 정식 개시됨을 공인함.
이승의 미결 증거가 저승 법정의 정식 기록으로 편입됨.
나는 문틈 너머로 비치는 차가운 골목길의 어둠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범의 그림자. 그리고 그의 손에 쥐여 있던 사라진 칼날.
명부가 가리고 저승 관료들이 외면했던 진실의 실체가 마침내 차가운 거울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