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악녀는 다이아몬드로 복수한다

3화: 흑랑의 거래 조건
빗방울을 가르며 다가오는 횃불의 불빛이 젖은 암벽을 붉게 물들였다.
어둠 속에서 쇠사슬과 말발굽 소리가 빗소리를 가르고 쏟아져 들어왔다.
"생존자다! 저기 바위 아래에 사람이 있다!"
비탈길을 내려온 사내들은 북부 변경군의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철제 흉갑 위에 새겨진 문양은 검은 늑대. 북부 변경공 카시안 루베른의 군대였다.
"이쪽이다! 들것을 가져와!"
병사 둘이 진흙탕을 가로질러 세레나가 선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피투성이가 된 마부와 산산조각 난 마차 잔해를 본 그들의 눈이 커졌다.
"마차 파편에 찍힌 문장을 봐라. 벨로아 공작가다. 수도에서 온 마차야!"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마차 잔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길이 푸른 광맥의 균열 쪽으로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그쪽은 손대지 마세요."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빗속을 갈랐다. 세레나의 회청색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차 상판이 위쪽 바위를 간신히 받치고 있습니다. 잔해를 건드리면 자갈더미가 쏟아져 내릴 겁니다."
"아, 아가씨…… 아니 영애님?"
"저는 서 있을 수 있으니 그 마부부터 살피세요. 왼쪽 다리와 팔이 부러졌고 늑골에도 부상이 있습니다. 함부로 일으키면 뼈가 내장을 찌르니 부목부터 대야 합니다."
부상자의 상태를 짚어내는 세레나의 어조는 침착하고 단호했다.
방금 마차 사고를 겪은 귀족 영애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냉정했다.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부의 응급 처치에 매달렸다.
세레나는 자연스럽게 바위 벽을 등지고 섰다.
찢어진 소매 안쪽에는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 원석이 숨겨져 있었다. 품속 깊은 곳에는 어머니의 은빛 브로치와 채무 승계서와 폐광 임차권 서류가 안전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곳에 광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자신이 바위의 결을 읽었다는 기이한 감각 역시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가진 것이 없을 때 드러난 가치는 축복이 아니라 약탈의 명분이 될 뿐이었다.
그때 산길 위쪽에서 거센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두두두!
어둠을 뚫고 거대한 흑마 한 필이 비탈길을 내달려 내려왔다. 빗물에 젖은 칠흑 같은 털망토를 휘날리며 사내가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육중한 군화가 진흙을 딛는 순간 주변 병사들이 일제히 가슴에 주먹을 얹었다.
"사령관님!"
북부의 흑랑, 변경공 카시안 루베른이었다.
장신에 다부진 체격, 흘러내린 흑발 아래로 서늘한 짙은 청안이 드러나 있었다. 카시안은 부하들의 경례를 물리치며 곧장 현장을 훑었다. 전복된 마차와 피 묻은 암벽 앞에 홀로 선 세레나를 차례로 담았다.
"벨로아 공작가의 마차가 국경에서 전복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카시안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살아남은 자는 둘인가."
"예, 사령관님. 부상당한 마부와 공작가 영애님뿐입니다. 다른 마부 한 명과 말들은 비탈 아래 급류로 휩쓸렸습니다."
보고를 들은 카시안이 세레나에게 다가왔다.
"네가 세레나 벨로아로군."
"그렇습니다. 변경공 전하."
세레나는 이마의 통증을 억누르며 단정하게 답했다. 카시안의 시선이 세레나의 피 묻은 이마를 훑었다.
"이마의 상처가 깊다. 서 있는 것조차 고작일 텐데 눈빛은 또렷하군."
"뼈는 부러지지 않았으니까요."
"피를 많이 흘리면 제 발로 걷지도 못한다. 일단 거처로 옮긴다."
카시안은 지체 없이 돌아섰다.
"부상자는 야전 병영으로 후송해라. 이 여인은 내 지휘 막사로 데려간다."
국경 능선 평지에 세워진 변경군의 전초 막사 안은 난로의 열기로 훈훈했다.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밖의 폭우는 차가운 밤비로 바뀌어 지붕을 두드렸다.
"영애님, 젖은 코트를 벗으셔야 상처를 살필 수 있습니다."
위생병이 다가오자 세레나는 소매 안감의 원석을 누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코트는 벗지 않겠습니다. 소독약과 거즈, 붕대만 탁자 위에 놓아두세요. 머리와 손의 상처는 제가 직접 처치하겠습니다."
세레나의 단호한 태도에 위생병은 약병과 붕대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세레나는 옷매무새를 다잡으며 찢어진 소매의 원석과 품속 서류가 안전함을 재차 확인했다. 물통에 비친 그림자를 보며 신음 한마디 없이 피를 닦아내고 손바닥에 붕대를 감았다.
처치가 끝났을 때 털망토를 벗은 카시안이 안으로 들어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처치가 제법 능숙하군."
카시안이 탁자 위의 피 묻은 거즈와 단정하게 감긴 붕대를 보며 말했다.
"수도의 온실에서 자란 공작 영애치고는 피를 무서워하지 않아."
"온실 속의 화초였다면 십만 골드의 빚을 짊어지고 이 눈보라 치는 북부까지 쫓겨오지도 않았겠지요."
세레나는 피하지 않고 카시안의 푸른 눈을 마주 보았다.
"마부는 무사합니까?"
"정강이가 부러졌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내일 읍내 의원으로 옮겨질 거다."
"다행이군요."
"남의 목숨을 걱정할 처지는 아닐 텐데."
카시안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벨로아 공작이 널 버렸다. 에드릭 왕세자와의 파혼 통고서와 제4광구 부채 승계서와 함께."
세레나의 눈썹이 잘게 꿈틀거렸다. 서류를 꺼내기도 전에 카시안은 이미 전말을 알고 있었다.
"소식이 빠르시군요."
"루메인은 내 영지다. 마차가 출발한 날부터 왕도의 전갈이 내 집무실에 와 있었다. 공작가의 장녀가 광산 투자에 눈이 멀어 빚을 지고 파혼당했다는 소문과 함께 말이지."
"그 말을 믿으십니까?"
"내가 멍청이로 보이나?"
카시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북부 제4광구는 지난 삼 년간 채굴이 중단된 곳이다. 그런데 반년 만에 십만 골드의 부채가 발생했다고? 장부를 아는 자라면 누구나 비웃을 조작이지."
그는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벨로아 공작은 북부 광산 경계석을 밀어내며 내 광맥을 침범하려다 실패했다. 군납 광석의 품질을 조작하다 감사원의 추적을 받자 썩은 부채를 털어낼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다."
세레나는 숨을 삼켰다. 카시안은 벨로아 가문의 비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사기극의 각본은 완벽했지. 사생아 동생은 피해자 행세를 했고 너는 악녀가 되어 북부의 폐광으로 던져졌다. 십만 골드의 빚에 깔려 동토에서 조용히 굶어 죽으라는 뜻이다. 네가 죽어야 조작된 장부의 진실도 묻힐 테니까."
적나라한 진실 앞에서도 세레나는 눈동자를 흔들지 않았다.
"전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의 뜻대로 죽어줄 생각이 없습니다."
세레나는 코트 안쪽에서 양피지 서류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이 서류에는 십만 골드의 채무뿐만 아니라 루메인 폐광의 십 년 임차권이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 폐광에서 다시 시작할 겁니다."
"폐광이라."
카시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갱도는 반쯤 무너졌고 바닥에서는 짠물만 솟구치는 염광 인근의 쓰레기장이다. 아무리 뛰어난 감정사라도 돌멩이에서 금을 캘 수는 없다."
"돌멩이인지 보석인지는 제가 확인합니다."
세레나의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소매 안쪽의 차가운 원석이 그녀의 확신을 지탱하고 있었다.
카시안은 세레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계산과 자존심을 읽어낸 사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좋다. 네가 죽을 생각이 없다는 건 확인했어."
카시안이 품 안에서 두꺼운 서류 한 장을 꺼내 탁자 위로 밀어 넣었다.
"그렇다면 내 쪽에서도 제안을 하나 하지."
세레나는 시선을 내려 문서 상단의 제목을 읽었다.
[혼인 합의 계약서]
문서 중앙에는 이미 카시안 루베른의 친필 서명과 검은 늑대 인장이 날인되어 있었다.
"내 아내가 되어라, 세레나 벨로아."
막사 안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팽팽해졌다. 당황스러운 요구였지만 세레나는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이유를 묻겠습니다. 어째서 쫓겨난 빈털터리 악녀를 안주인으로 들이려 하십니까?"
"첫째, 왕실이 내 목을 죄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카시안이 망설임 없이 패를 깠다.
"황제와 왕세자는 북부를 견제하려 수도 영애와의 정략혼을 강요하고 있다. 충성스러운 첩자를 내 침실에 넣겠다는 뜻이지. 그 강제 혼인을 막으려면 명분상 흠잡을 데 없는 고위 귀족 출신의 아내가 필요하다."
"벨로아의 장녀라면 혈통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겠지요."
"그래. 게다가 넌 에드릭에게 버림받았으니 왕실의 개가 될 염려도 없지."
카시안이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둘째, 네가 쥔 폐광 임차권이다. 네가 내 공작부인이 된다면 그 폐광의 관할권은 루메인 변경령의 직속 보호 아래 들어간다. 벨로아의 사냥개들이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지."
세레나는 서류의 조항들을 빠르게 훑었다.
"제게 주어지는 대가는 무엇입니까?"
"북부의 완벽한 신변 보장."
카시안이 잘라 말했다.
"네가 내 아내로 있는 한 수도의 채권자들도 벨로아의 자객들도 너를 건드리지 못한다. 십만 골드의 채무는 내가 법적으로 유예시키고 방패가 되어 주지. 폐광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고 자금과 채굴 인력도 지원하겠다."
"기간은요?"
"삼 년이다."
카시안이 세레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삼 년 뒤 계약이 만료되면 흠 없는 신분과 막대한 위자료를 쥐여서 자유롭게 떠나게 해주마. 혼인 생활 동안의 동침이나 신체적 접촉은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대외적인 공작부인의 역할만 수행하면 된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추방당한 영애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소매 안쪽의 다이아몬드 원석을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단단한 결정면이 손바닥을 찔러왔다.
누군가의 방패 뒤에 숨는 것은 언제든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동정이나 시혜로 맺어진 관계는 이익이 다하는 순간 깨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허수아비 신부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가 되어야 했다.
세레나는 계약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변경공 전하."
그녀의 회청색 눈동자가 난로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이건 구원이 아닙니다. 거래지요."
"거래라."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의 침실을 채우는 장식품이나 방패막이 인형으로 살 생각이 없습니다. 십만 골드의 부채는 제 손으로 갚을 것이며 폐광의 가치 또한 제 방식으로 증명해 보일 겁니다."
세레나는 깃펜을 들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의 조항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조건이 너무 일방적이군요. 북부의 안주인으로서 제가 치러야 할 의무와 얻어야 할 권리의 지분을 다시 정해야겠습니다."
"지분?"
"예.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사업의 동업자가 되어야 하니까요."
세레나의 단언에 카시안의 짙은 청안이 깊게 일렁였다.
"내게 계약 조건을 수정하겠다는 건가?"
"동업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협상입니다. 서명은 그 뒤에 하지요."
물러섬 없는 영애의 서늘한 선언이 타오르는 장작 소리 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