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악녀는 다이아몬드로 복수한다

4화: 동업자의 서명
타닥, 타다닥.
벽난로 속에서 마른 장작이 타오르며 붉은 불꽃을 튀겼다.
지휘 막사 안의 온기는 훈훈했으나 탁자를 사이에 둔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살얼음판처럼 차가웠다.
카시안 루베른이 밀어놓은 [혼인 합의 계약서]는 묵직한 양피지 냄새를 풍겼다. 문서 하단에는 흑랑의 문장이 찍힌 붉은 밀랍 인장과 카시안의 친필 서명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내게 계약 조건을 수정하겠다는 건가?"
카시안이 낮게 읊조렸다. 짙은 청안이 호기심과 경계를 담고 세레나의 얼굴을 훑었다.
"북부의 법정이라 해도 계약의 기본은 대등한 합의입니다. 변경공 전하."
세레나는 깃펜을 집지 않았다. 대신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양피지의 조항들을 차례로 짚었다.
"첫머리에는 신변 보호를 약속하면서 뒤따르는 단서 조항들은 제 권리를 지우고 있군요."
세레나의 손끝이 제3조에서 멈췄다.
['혼인 기간 중 세레나 벨로아가 보유한 루메인 폐광의 모든 채굴권 및 자산 처분권은 루메인 변경령 군사령부에 위탁되며 그 운용은 전적으로 변경공의 결정에 따른다.']
세레나가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폐광의 채굴권과 자산 처분권을 변경령으로 전면 귀속시킨다. 이것이 첫 번째 독소 조항입니다."
"폐광은 벨로아 공작가의 손길이 닿았던 위험 구역이다."
카시안이 팔짱을 끼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곳에 공작가의 사냥개들이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려면 변경군의 관할 아래 두어야 해. 군사적 방호 구역으로 묶지 않으면 네가 판 구덩이에 채권자들이 먼저 들이닥칠 거다."
"통제와 탈취는 다릅니다."
세레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5조는 더 가관이더군요. '공작부인으로서의 대외적 교섭 및 상거래는 변경공의 사전 서면 승인을 거쳐야 한다.' 전하. 이것은 동업 계약서가 아닙니다. 저를 북부의 금고 안에 가두고 장부를 빼앗으려는 감금 증서지요."
카시안의 눈썹이 잘게 꿈틀거렸다.
"수도에서 쫓겨난 영애에게 변경령의 이름을 걸고 장사를 허락할 만큼 내가 한가해 보이나?"
"저는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란 적이 없습니다."
세레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힘이 있었다.
"공작가에 머무는 동안에도 대외 거래 장부와 왕실 납품 내역을 검토한 것은 저였습니다. 루시아와 아버지가 숫자를 조작해 십만 골드의 빚을 덮어씌운 것도 장부의 빈틈을 밝혀낼 제 눈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지요."
세레나는 사내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제가 전하의 그늘 아래 숨어 경제 활동을 포기한다면 공작가는 법정에 성년 후견인 지정 소송을 걸 겁니다. 제가 무능하여 재산을 다룰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폐광 임차권을 강제로 회수하려 들겠지요.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도 벨로아의 광산 침범을 막을 명분을 잃습니다."
카시안의 입술이 다물렸다.
세레나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다. 그녀는 단순한 귀족 영애가 아니었다. 상속법과 채무 관계 그리고 귀족 사회가 약자를 집어삼키는 법적 사냥 방식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원하는 조건은 뭐지?"
세레나는 주저 없이 탁자 구석의 빈 양피지와 잉크병을 끌어당겼다. 깃촉이 잉크에 젖어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글씨가 단정하게 새겨졌다.
"첫째 루메인 폐광의 탐사와 채굴과 세공 및 유통에 관한 사업 운용권은 세레나 벨로아에게 속합니다. 변경령은 상단의 독자적인 경영에 부당하게 개입할 수 없습니다."
세레나의 깃펜이 거침없이 내달렸다.
"둘째 루메인 변경령은 폐광 일대의 치안 경비와 외부 위협 차단 및 북부 운송망의 독점적 사용 권한을 제공해야 합니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수익 배분입니다."
세레나는 깃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보았다.
"폐광 사업에서 발생하는 순이익 중 육십 퍼센트는 제 몫으로 귀속되며 사십 퍼센트는 변경령의 군비 및 물류 지원금으로 배분합니다."
카시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새었다.
"육십 퍼센트라. 내 병사들이 칼을 차고 보초를 서며 내 마차가 길을 여는데 정작 이익의 태반은 네가 가져가겠다는 소리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폐광이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세레나는 차분하게 받아쳤다.
"바닥에서 짠물만 솟구치는 구덩이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것은 온전히 제 지식과 기술의 몫입니다. 존재하지 않던 이익의 사십 퍼센트라면 변경령의 입장에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 순수한 흑자입니다."
"그 버려진 돌멩이에서 단 일 골드도 건지지 못한다면?"
"십만 골드의 부채를 갚지 못해 제가 먼저 파멸하겠지요."
세레나의 회청색 눈동자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넷째 십만 골드의 허위 채무에 대해 전하는 삼 년간 변경령의 사법권을 발동하여 수도 채권자들의 강제 집행을 유예시켜야 합니다. 그 삼 년 안에 저는 벨로아의 장부 조작을 입증해 부채를 무효화하거나 제 손으로 전액 상환할 것입니다."
세레나는 마지막 문장을 양피지 하단에 정갈하게 적었다.
"다섯째 삼 년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날 본 혼인은 상호 합의하에 조용히 해지되며 저는 변경령의 어떠한 간섭도 없이 완전한 독자 상단으로 독립합니다. 서로에게 추가적인 위자료나 소유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서걱.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세레나가 양피지를 돌려 카시안 앞으로 밀었다.
카시안은 세레나가 작성한 조항들을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사내의 서늘한 청안이 글자를 짚을 때마다 막사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 여인은 구원을 바라는 난민이 아니었다. 자신이 쥔 패의 무게를 알고 대등한 이익을 나누어 갖는 상인이었다.
카시안이 종이를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조항은 명료하군. 하지만 내 쪽에서도 두 가지 조건을 추가하겠다."
"말씀하십시오."
"첫째 왕실 감사원이나 사교계의 공식 석상에서는 빈틈없는 변경공 부인의 예를 다해야 한다. 황제와 왕세자가 보낸 첩자들이 네 표정 하나에서도 의심을 품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연기해라."
"제 생존을 위해서도 당연한 의무입니다."
"둘째 폐광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벨로아 가문이 조작한 광산 경계석이나 군납 비리에 관한 물증을 발견한다면 즉시 내게 공유해야 한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벨로아는 지난 수년간 불량한 광석을 북부 군납품으로 밀어 넣었다. 그로 인해 내 부하들이 목숨을 잃었고 내 형님 또한 전선에서……."
사내가 말을 멈추며 턱을 굳혔다.
오른쪽 어깨를 쥐는 사내의 손끝에 억눌린 분노가 스며 있었다. 세레나는 그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았으나 캐묻지 않았다. 상대의 상처를 존중하는 것이 거래의 첫 번째 예의였다.
"약속하지요. 가문의 비리를 파헤치는 일은 제 목표와도 일치하니까요."
세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안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다. 협상은 끝났다. 서기관을 불러와라."
잠시 후 군복 위에 외투를 걸친 중년 사내가 공증용 인장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루메인 변경군 소속 법무 서기관이자 왕실 공인 자격을 지닌 군 공증관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사령관님."
"양피지를 새로 펼쳐라.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 조항을 정식 공증 서식에 맞춰 두 통 작성한다."
공증관은 세레나가 수정한 조항들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쫓겨난 공작 영애에게 폐광의 독점적 운영권을 넘기고 이익의 육십 퍼센트를 배분한다는 내용에 서기관의 손이 떨렸다.
"사령관님…… 이 조항은 영지의 재정 규정에 비추어 너무 지나치게 영애 측에 유리합니다. 게다가 독자 운영권이라니요."
"내가 승인했다. 사견은 접어두고 기록해라."
카시안의 서늘한 눈빛에 공증관은 침을 삼키며 깃펜을 움직였다.
사각사각.
서기관의 깃펜이 두 장의 두꺼운 양피지 위를 오갔다.
새벽 공기가 희뿌옇게 밝아오는 동안 막사 안에는 법적 문구가 완성되었다.
"이상으로 계약 조항의 작성을 마쳤습니다."
공증관이 두 통의 계약서를 탁자 위에 펼쳤다.
카시안이 먼저 깃펜을 들어 문서 하단에 서명했다. 거침없고 굵은 필체였다.
이어 세레나가 깃펜을 건네받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세레나 벨로아.'
이 서명이 끝나면 그녀는 더 이상 벨로아의 버려진 죄인이 아니었다. 북부의 방패를 쥔 동업자이자 자신의 이름으로 상단을 일궈낼 상인이었다.
칙, 치익.
공증관이 붉은 밀랍을 녹여 서명 옆에 떨어뜨렸다.
카시안이 반지에 새겨진 검은 늑대의 인장을 밀랍 위에 힘껏 찍어 눌렀다. 이어 공증관이 제국의 공증 압인을 덧대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제국 법령 제42조 및 변경령 조례에 의거하여 루메인 변경공 카시안 루베른 각하와 세레나 벨로아 영애의 삼 년 기한 동업 혼인 계약이 정식으로 성립되었음을 공증합니다."
공증관은 붉은 인장이 굳은 계약서 한 통을 카시안에게 올리고 다른 한 통을 세레나에게 건넸다.
세레나는 차가운 밀랍이 굳은 양피지를 받아 들었다. 이 얇은 종이 한 장이 앞으로 삼 년간 그녀의 목숨과 권리를 지켜줄 가장 견고한 방패였다.
세레나는 계약서를 접어 코트 안쪽 깊숙한 주머니에 넣었다. 파혼서와 부채 승계서가 닿아 있는 그 자리에 새로운 동업 계약서가 묵직하게 안착했다.
공증관이 물러간 뒤 카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을 벗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곳곳에 굳은살이 박이고 오래된 검 흉터가 스친 거칠고 단단한 손이었다.
"이제 넌 루메인의 안주인이자 내 동업자다. 세레나."
세레나는 붕대를 감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사내의 큰 손을 마주 잡았다.
거칠고 뜨거운 온기가 차가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동정 어린 온정이 아니라 혹독한 전장에서 등을 맞댄 전우의 악수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카시안."
두 사람의 시선이 새벽의 푸른 어스름 속에서 단단히 맞물렸다.
막사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밤새 대지를 때리던 거센 폭우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대신 희뿌연 안개와 서리가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막사 앞 공터에는 변경군의 기마대와 보강된 사륜마차가 출발 준비를 마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 한편에서 들것에 실린 마부가 의무병들의 부축을 받아 읍내로 향하는 마차로 옮겨지고 있었다. 세레나가 다가가자 정강이에 부목을 댄 마부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아가씨……."
"움직이지 마세요."
세레나가 나직하게 제지했다.
"읍내 의원으로 가면 치료비는 변경령에서 지불할 겁니다. 뼈가 붙을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치료받으세요."
마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쫓겨나신 처지인데도 미천한 마부의 목숨을 챙겨주시고……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당연한 대가일 뿐이지요."
세레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부를 실은 마차가 먼저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세레나는 옷깃을 여미며 찢어진 소매 안쪽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작고 단단한 다이아몬드 결정이 여전히 그 자리에 차갑게 머물러 있었다.
"출발 준비가 끝났다."
흑마에 올라탄 카시안이 고삐를 쥐며 세레나를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눈빛은 아침 안개처럼 서늘했다.
"루메인 본성에 도착하면 네가 상상하던 화려함 따위는 없을 거다. 왕도의 사교계가 떠들어대던 대공가의 영화는 이 북부에는 존재하지 않아."
카시안이 채찍 끝으로 북쪽의 험준한 산맥을 가리켰다.
"비어 있는 곳간과 차가운 돌벽뿐이다. 그리고 폐광에는 귀족을 증오하고 언제든 폭동을 일으킬 준비가 된 거친 광부들만이 득실거리지."
그것은 엄포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냉정한 경고였다. 하지만 세레나의 눈동자에는 두려움 대신 서늘한 생기가 감돌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마차의 발판을 밟고 올라섰다. 마차 문을 잡은 채 카시안을 돌아보며 또렷하게 대꾸했다.
"텅 빈 곳간과 거친 광부들이라면 오히려 좋습니다."
"뭐라고?"
"처음부터 남의 손때가 묻지 않은 백지여야 제 방식대로 장부를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요."
세레나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새벽안개를 뚫고 솟아오르는 햇살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카시안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출발한다."
말발굽 소리가 얼어붙은 대지를 박차며 울려 퍼졌다.
기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세레나를 태운 마차가 북부의 심장부인 루메인 본성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버려진 악녀가 보석의 제국을 세우기 위한 첫 번째 행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