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신교의 수석 소믈리에

29화: 혁련광의 잔
천인단애(千仞斷崖) 위로 솟은 대장로전은 대낮에도 어두웠다.
검붉은 현무암 기둥마다 서늘한 살기가 서린 위압적인 전각이었다.
좌우로 늘어선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손을 검자루에 얹었다. 무공 한 줌 없는 시종 출신을 향해 서슬 퍼런 살기가 짓눌러왔다.
스스스스.
준우의 반 걸음 앞을 걷던 설아가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한빙진기가 허공을 가르자 짓누르던 기세들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우호법.”
전각 깊은 어둠 속에서 쇠를 긁는 목소리가 울렸다.
“교주의 직속 호위가 어찌하여 시종 놈의 앞잡이가 되어 내 전각을 더럽히는가.”
흑철로 주조된 거대한 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백발을 뒤로 넘긴 노인의 체구는 곰처럼 거대했다. 얼굴 절반은 불에 덴 흉터로 일그러져 있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핏기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신교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장로회의 우두머리 대장로 혁련광(赫連狂)이었다.
탁자 위에는 흑철 술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방 안에는 매캐한 탄내와 독한 주정이 뒤엉켜 진동했다.
혁련광의 붉은 안광이 준우를 꿰뚫을 듯 박혔다.
“네놈이 교주의 눈과 귀를 흐리고 감히 신교의 술값을 주무른다는 시종 놈이냐.”
준우는 물러서지 않고 노인의 시선을 마주 받았다.
“백화전주 강준우입니다.”
“전주?”
혁련광이 거친 콧방귀를 뀌었다. 흉터가 붉게 달아오르며 살기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잡역부 놈이 천마의 비위를 맞추더니 분수를 잊었구나. 북문 저잣거리에서 술 한 병에 은 칠십 냥을 부르게 만들고 광부들에게 동전 몇 닢을 받고 약주를 풀었다지? 상인들과 결탁해 교단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꼬락서니를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혁련광이 흑철 술병을 낚아채 잔에 쏟아부었다.
탁한 핏빛 액체가 차오르자 아지랑이 같은 화염 진기가 일렁였다. 극열한 맹독주였다.
혁련광이 흑철 잔을 준우의 발치 앞 탁자로 밀어냈다.
“네놈 술이 대단하다 하여 친히 불렀다. 어디 내 잔을 채워 보아라.”
노인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마셔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거나 내 입에 맞지 않는다면 목을 비틀어 단애 아래로 던질 것이다. 네놈에게 날 독살할 배짱이 있다면 어디 한번 독을 타 보아라.”
무공을 모르는 자에게 진기를 쏟는 대신 술이라는 영역에서 목숨을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설아의 손이 검집으로 향했으나 준우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준우는 탁자 앞으로 다가가 핏빛 화주에 코를 가까이 댔다.
지독한 알코올과 함께 유황 냄새 그리고 타버린 쑥의 쓴내가 찔러왔다. 혀를 마비시키다 못해 식도를 녹여버릴 독주였다.
준우의 시선이 술잔에서 혁련광의 얼굴로 올라갔다.
“대장로님.”
“겁이 나느냐?”
“그 술을 하루에 몇 잔이나 비우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혁련광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몇 잔을 마시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하루 세 잔 이상 비우지 않으시면 견디지 못하시겠지요. 온몸이 바짝 마르고 혓바닥이 갈라지는 고통을 잊으려 이 독주를 맹물처럼 들이켜고 계십니다.”
준우의 목소리는 파문 없는 호수처럼 담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장로님께서는 지금 술을 맛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혁련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
“맛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비된 혀에 불길과 칼날을 쑤셔 넣고 계실 뿐입니다.”
준우의 단언에 접견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혁련광의 턱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틀렸습니까?”
준우는 노인의 흉터와 목덜미를 침착하게 가리켰다.
“숨을 들이쉬실 때마다 기관지 깊은 곳에서 쇠가 긁히는 쇳소리가 납니다. 아랫입술 안쪽은 하얗게 짓물러 터졌고 혀를 굴리지 못한 채 술을 목구멍 뒤로 털어 넣고 계시지요.”
준우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대장로님의 몸 안에서는 술 향기가 아니라 바짝 타버린 재 냄새와 녹슨 쇠 냄새가 올라옵니다. 사십 년 전 화재 혹은 마공 역류로 입으신 화상 때문입니다. 흉부의 진액이 말라붙었고 설근의 미뢰와 침샘이 굳어버렸습니다.”
혁련광의 동공이 거세게 요동쳤다.
“너…… 네놈이 그걸 어찌 아느냐.”
그것은 혁련광이 평생 숨겨온 치부였다.
교단 최고 원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는 누구에게도 혀가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단맛도 신맛도 떫은맛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혓바닥을 찢는 극심한 통증만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그래서 매일 식도를 태우는 화주를 마셨던 것이다.
준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침이 돌지 않는 혀는 죽은 고기나 다름없습니다. 혀가 굳어 있으니 맛의 층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극만을 좇아 더 독한 불길로 내장을 태우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떤 술을 올린들 대장로님의 혀에는 그저 맹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혁련광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이 탁자를 내리치자 현무암에 손바닥 모양의 균열이 새겨졌다.
“알았다면 어쩔 테냐! 이미 사십 년 전에 타버려 감각을 잃은 혀다! 네놈이 천하제일의 주향사라 한들 썩은 혀로 맛을 느끼게 할 수 있단 말이냐!”
준우는 흔들림 없이 소매 안으로 손을 넣었다.
“불길에는 불길로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준우가 품에서 하얀 백자 호리병과 맑은 비취옥 잔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말라붙은 대지에는 단비를 내려야 싹이 트는 법입니다.”
백자 호리병의 마개가 열리자 매캐한 탄내가 흩어졌다.
새벽 숲길을 걸을 때 스치는 청량한 풀잎 냄새와 은은한 산미가 어우러진 맑은 이슬의 향기였다.
준우는 비취옥 잔을 기울여 술을 따랐다.
맑고 투명한 액체에 연한 비취색 기운이 감돌았다. 옥잔 표면에 서늘한 물방울이 맺혔다.
“이 술은 청화주(淸華酒)입니다.”
준우가 잔을 들어 혁련광 앞으로 밀었다.
“신교 북부의 설빙석으로 냉침하여 화기를 다스렸고 백화전 지하에서 삼 년간 묵힌 매실 발효 진액을 더했습니다. 거친 열기를 씻기 위해 갓 채취한 청련근 수액을 정밀하게 배합했습니다.”
혁련광은 잔을 노려보았다.
코를 찌르는 주정도 열기도 없었다. 그저 맑고 잔잔한 물처럼 보였다.
“이깟 숭늉으로 내 혀를 깨우겠다고?”
“독주는 미각을 마비시키지만 정교하게 설계된 산미와 아미노산은 잠든 침샘을 찌릅니다. 삼키지 마시고 혀끝에서 세 숨 동안 굴려 주십시오.”
혁련광의 눈빛이 흔들렸다.
노인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가 비취옥 잔을 쥐어 들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노인은 잔을 입가로 가져가 천천히 입술을 축였다.
서늘한 액체가 메마른 입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술이 혓바닥 중앙을 타고 퍼지는 순간 혁련광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찌르르!
혀 양옆 깊숙한 곳에서 기분 좋은 자극이 번개처럼 번졌다.
매실 발효액에 응축되어 있던 천연 과실산이 바짝 말라붙어 있던 침샘을 두드렸다. 사십 년 동안 굳어 있던 틈새가 갈라지며 맑은 침이 솟구쳐 나왔다.
“큭……!”
혁련광의 목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침과 술이 뒤섞이자 굳어 있던 미뢰들이 일제히 깨어났다.
혀끝을 감싸는 청련근의 은은한 단맛이 먼저 느껴졌다.
그 뒤를 이어 상쾌하게 입안을 씻어내는 매실의 둥근 산미가 번졌다. 목을 넘어갈 때 혀뿌리에 남는 것은 깊고 구수한 감칠맛이었다.
폐허 같던 입안에 들꽃이 피어나는 듯한 생명력이 차올랐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서늘한 온기가 흉격에 뭉쳐 있던 묵은 화열을 쓸어내렸다.
혁련광의 입술 사이로 맑은 타액이 흘러내렸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침이…… 입안에 침이 고인다.”
굵은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달다. 시고…… 시원하구나. 내가…… 내가 맛을 느끼고 있다.”
사십 년 만이었다.
잿더미 같던 노인의 세계에 마침내 색채와 맛이 돌아온 순간이었다. 절대무신의 눈가에 차오른 눈물이 흉터투성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호위무사들은 대장로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넋을 잃었다.
혁련광은 비어버린 옥잔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잔 바닥에 맺힌 푸른 이슬을 찍어 다시 혀에 대었다. 역시나 달고 상쾌했다. 헛것이 아니었다.
탁.
혁련광이 잔을 내려놓았다. 어깨에서 살기와 위압감이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내가 졌다.”
노인의 목소리는 더는 쇠를 긁는 소리가 아니었다. 침이 돌아 부드러워진 음성이었다.
“천마가 왜 네놈에게 수석 주향사라는 직위를 내리고 네 잔 앞에서 멈추어 섰는지 알겠구나. 네 세 치 혀는 요설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칼이다.”
준우가 포권을 취했다.
“과찬이십니다. 굳어 있던 진액을 틔웠을 뿐입니다. 맹독 화주를 끊으시고 청화주를 하루 반 잔씩 혀로 굴리시면 잃었던 미각이 절반 이상 돌아올 것입니다.”
혁련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준우를 응시했다.
“내 목숨을 구한 셈이구나. 약속대로 네놈 목을 치지 않겠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냐.”
준우가 물러섬 없이 입을 열었다.
“폐광 술성을 불태우려 했던 복면인들에게서 대장로전의 삼각 운송패와 직인 서찰이 나왔습니다. 북문 달무리 주막의 가짜 빙화주 배후에도 대장로전의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설아 역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혁련광을 바라보았다.
혁련광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내가 그따위 짓을 꾸몄다고 생각했느냐?”
“정황이 모두 대장로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놈들.”
혁련광이 차갑게 혀를 찼다.
“내가 그 하찮은 양조장을 없애려 했다면 대낮에 무사 백 명을 끌고 가 가루로 만들었을 것이다. 쥐새끼처럼 밤중에 숨어들어 불장난을 치고 가짜 술이나 파는 짓은 내 방식이 아니다.”
노인은 품 안에서 흑철 인장함을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뚜껑이 열리자 안쪽에 있던 삼각 철패와 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직인의 모서리는 날카로운 흉기에 깎여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보름 전 내 전각의 장로회 보관함에 도둑이 들었다. 서찰용 인장 하나와 운송패 서른 개가 사라졌다. 내 밑에 있는 놈들 중 쥐새끼가 숨어들어 인장을 빼돌리고 흔적을 위조한 것이다.”
혁련광의 주먹이 쥐어졌다.
“내 이름을 팔아 술성을 불태우고 나와 백화전을 이간질하려 한 것이다.”
준우와 설아의 눈빛이 교차했다.
설아가 품 안에서 검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작은 약병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화재 당시 쓰러진 복면 자객의 품에서 회수했던 약병이었다. 은은한 피 비린내와 체온에서 삭여낸 기괴한 단내가 흘러나왔다.
약병을 본 혁련광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 이것은……!”
노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생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천하를 호령했던 대장로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장로님?”
혁련광이 낮게 짓씹어 뱉었다.
“이것을 어디서 얻었느냐.”
“술성을 불태우려던 복면 자객의 몸에서 나왔습니다.”
“그놈들이…… 기어이 신교의 심장까지 기어들어왔단 말인가.”
혁련광이 이를 갈았다.
“혈주회(血酒會)다.”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접견실 안의 온도가 얼어붙었다.
“술을 빚는 자들이 아니다. 사람의 피와 내공을 쥐어짜 술을 빚고 그 독으로 무인들의 영혼과 혈맥을 잠식하는 괴물들이다. 천마 교주님의 주화입마 역시…….”
혁련광이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놈이 만든 술이 사람을 살리고 교주님의 광증을 억누르자 그놈들이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네놈 숨통을 끊고 신교를 피의 술통에 빠뜨리려 한 자들은 바로 그놈들이다.”
대장로 혁련광의 메마른 경고가 어두운 전각 안을 서늘하게 울렸다.
진짜 적의 실체가 마침내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