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신교의 수석 소믈리에

28화: 술값은 피가 아니다
인부의 손바닥에 놓인 은전은 땀과 검댕으로 얼룩져 있었다.
방금 위철에게 받은 품삯이었다. 숙성고의 잔해를 치우며 흘린 피땀의 대가였다.
“아버님이 어디가 편찮으신지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준우의 나지막한 음성에 인부 태칠은 젖은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폐광 아래 토굴에 누워 계십니다. 평생 돌을 깨던 분인데 몇 해 전부터 찬 바람만 불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묽은 가래를 토하십니다.”
태칠의 턱 끝이 가늘게 떨렸다.
“우호법 어른께서 그 붉은 술을 드시고 맺힌 피를 푸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귀한 술인 줄은 알지만 이것이라도 보태어 한 모금만 얻을 수 있다면…….”
준우는 태칠의 거친 손을 감싸며 은전을 도로 쥐여 주었다.
“이 술은 춘부장의 몸에 들어가는 순간 독이 됩니다.”
태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독이라니요? 어른들을 살려낸 명주가 아닙니까?”
“회생주는 불길 속에서 극도로 졸아든 포도로 빚었습니다. 단맛이 무겁고 삼나무의 훈연과 떫은 탄닌이 가득합니다. 우호법 님처럼 화기를 억누르느라 흉격이 막힌 무인에게는 뭉친 열을 흩어주지만 찬 기운에 상한 늙은 폐에는 열기가 독초처럼 들러붙습니다.”
준우는 멍석 틈새로 불어오는 서늘한 밤바람을 가리켰다.
“단전이 식고 기침이 멎지 않는 분에게 고도주를 먹이면 숨이 먼저 막힙니다. 몸이 차가워진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가슴을 데우고 가래를 삭여줄 맑은 온기이지 무거운 불길이 아닙니다.”
태칠의 고개가 푹 꺾였다. 아버지를 해칠 뻔했다는 자책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럼…… 제 아버지는 그냥 찬 방에서 숨이 끊어지길 기다려야 합니까?”
“누가 포기한다 했습니까.”
준우가 태칠의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산 아래 개울가에 마른 산돌배와 야생 생강이 자라지요?”
“예 지천에 널린 게 떫은 돌배나무입니다만 그런 잡것은 써서 먹지도 못합니다.”
“떫은맛은 껍질의 기운일 뿐입니다. 살짝 쪄서 말리면 폐의 열을 식히고 진액을 붇게 하지요. 거기에 생강과 청련근 수액을 더해 달인 뒤 맑은 쌀술 윗물을 띄우면 됩니다. 그것이 춘부장께 맞는 약주입니다.”
태칠이 멍하니 준우를 올려다보았다.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약방에서는 삼 한 뿌리에 은전 몇 냥을 부르던데요.”
“곡식 한 됫박과 풀뿌리면 족합니다. 내일 아침 석실로 찾아오십시오. 제가 직접 달여 내겠습니다.”
준우는 구겨진 선주문서를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은 오십 냥이라는 숫자가 적힌 종이였다. 그 종이가 가슴팍을 돌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렀다.
이튿날 아침 술성 어귀는 새벽부터 몰려든 말과 수레로 북새통을 이뤘다.
소문은 빨랐다. 북문 객점의 귀빈이 회생주 한 병에 은 오십 냥을 불렀다는 말이 돌자마자 거간꾼과 토호들이 앞다투어 말을 달렸다.
“백화전주를 뵙게 해주시오!”
“은 일백 냥을 즉시 금괴로 치르겠소! 빙화주든 회생주든 세 병만 먼저 넘겨주시오!”
비단 장포를 걸친 행수들이 목책을 흔들었고 은궤를 실은 마차가 뒤를 이었다.
설아가 검집을 쥔 채 목책 앞을 막아섰으나 황금을 든 자들의 눈은 멀어 있었다.
준우가 석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당유리가 붉은 장갑을 매만지며 다가왔다.
“보셨지요 전주님? 북문 저잣거리가 뒤집혔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칠십 냥까지 뛰었어요. 지금 빙화주를 풀면 술성 재건비는 오늘 안으로 채우고 남습니다.”
그녀의 눈빛에는 상인 특유의 팽팽한 탐욕이 감돌았다.
“신교 무인이나 외지 귀족들은 죽지 않는 술이라면 값을 묻지 않아요. 백화전 이름을 걸고 잔 단위로 쪼개 팔면 피를 흘려서라도 사 마실 겁니다.”
준우는 턱밑까지 들이밀어진 호화로운 장부들을 내려다보았다.
장부에는 빙화주 백 병 선매 희망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당 상단주.”
준우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분했다.
“빙화주는 아직 검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목에 맺힌 무향 점의 원인도 밝히지 못했고 교주님조차 향만 살피신 채 봉인을 명하셨습니다.”
“그깟 위험이 무슨 대수입니까? 무림인들은 주화입마를 늦출 수만 있다면 쥐약이라도 삼키는 족속들입니다. 위험할수록 술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법이지요.”
“사람이 마시는 술입니다.”
준우가 장부를 덮어 당유리의 품으로 밀어 넣었다.
“술은 생명을 잇고 지친 맥을 달래는 물이어야 합니다. 탐욕의 노름판에 오르는 순간 약이 아니라 사람을 찌르는 비수가 됩니다. 안전을 알지 못하는 독을 불로초라 속여 팔 수는 없습니다.”
당유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 저 문밖의 돈더미를 그냥 돌려보내시겠다는 겁니까?”
“장사를 멈추자는 것이 아닙니다.”
준우가 고개를 돌려 목책 너머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마차 뒤편에서 검댕을 묻힌 인부들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웅크리고 있었다.
“값을 매길 곳과 거두지 말아야 할 곳을 가르자는 것입니다.”
비상 석실 긴 탁자 위에 백지가 펼쳐졌다.
위철과 장덕 노칠이 마주 앉았고 당유리도 자리를 잡았다.
준우가 붓을 들어 종이 중앙에 굵은 선을 그었다.
“어제 체결한 회생주 스물여덟 병의 계약은 변함없이 진행합니다. 마도와 청하가 약속한 백화전 최소 보장액 사백이십 냥은 정당한 수익입니다.”
당유리가 팔짱을 끼었다.
“그건 이미 정해진 일 아닙니까.”
“사백이십 냥 중 삼백이십 냥은 숙성고와 선별장을 다시 짓는 자재 대금으로 씁니다. 남은 일백 냥은 인부들의 품삯과 식량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준우가 종이의 왼쪽을 가리켰다.
“회생주는 일련번호를 매겨 봉인합니다. 스물여덟 병 외에 추가 유통은 없습니다. 마도상단과 청하상단은 귀빈들의 연회용으로 정당하게 비싼 값에 파십시오. 병 단위 재판매를 금지하고 희소성을 지켜 상단의 이윤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빙화주는요?”
“빙화주는 검증과 교주님의 윤허 전까지 단 한 잔도 나가지 못합니다. 선매 계약금은 돌려보내십시오. 이를 어기고 암거래하는 상단은 백화전 거래처에서 영구히 제명하겠습니다.”
준우의 단호한 선언에 당유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빈말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신 상단주께 다른 제안을 드리지요.”
준우가 종이의 오른쪽 칸에 붓을 대었다.
“앞으로 백화전이 출고하는 고급 명주의 판매대금 중 백화전 귀속분의 십분의 일을 따로 적립하겠습니다. 구휼약주 기금입니다.”
위철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구휼 기금이라니요 전주님? 아직 우리 곡식도 빠듯합니다.”
“먹고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잿더미 속에서 우리를 지킨 것은 저 인부들의 손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실 약주 한 잔조차 구하지 못한다면 이 술성이 다시 선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준우는 노칠을 바라보았다.
“노칠 어르신. 남부 분타에서 가져온 것 중 흠집이 나거나 덜 익어 술을 담그지 못하고 버려둔 잔과실들이 있지요?”
“예 전주님. 떫어서 내다 버리려던 들포도와 묵은 돌배가 광주리째 굴러다닙니다.”
“그것들을 모아 주십시오. 멥쌀 누룩과 청련근 물로 순하게 대량 발효시킬 겁니다. 귀한 약초는 없어도 거친 폐를 씻고 풍한을 다스리기에는 충분합니다.”
준우가 당유리를 응시했다.
“이 보급형 약선주는 의원실과 북문 구휼소에 상시 배치합니다. 인부와 곤궁한 백성에게는 오직 곡식값과 그릇 값인 삼 전만 받고 내어줄 것입니다.”
“삼 전이요?”
당유리가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귀족들에게 수십 냥을 받으면서 서민에게는 동전 세 닢을 받겠다고요? 장사치가 들으면 기절할 소리입니다.”
“장사가 아니니까요.”
준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치를 원하는 자에게는 희소성의 대가를 받고 생명을 구하려는 가난한 자에게는 숨 쉴 틈을 주는 것입니다. 이 보급주가 받쳐주어야만 회생주의 가치도 피 냄새 없는 명예를 얻습니다. 환자의 목을 죄어 번 돈은 상단의 목을 찌르는 비수가 됩니다.”
석실에 깊은 정적이 흘렀다.
장덕이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뱉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제 식구 목구멍도 못 넘길 술을 만들어 어디다 쓰겠습니까!”
당유리는 한동안 준우를 쏘아보았다. 손익을 따지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기묘하게도 이치에 맞았다. 서민들의 원망과 약탈 위험을 차단하면서도 상단이 쥔 회생주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지독한 분이시군요.”
당유리가 붓을 집어 들었다.
“회생주의 재판매 금지와 투기 방지 조항에 서명하지요. 대신 보급 약주를 담을 질그릇 천 개는 저희 상단이 원가로 대겠습니다. 이러면 저도 거머리 소리는 면하겠지요?”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준우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잿더미 위에 비로소 사람을 향한 규칙이 세워진 순간이었다.
그날 해질녘 산비탈의 임시 의원실 안으로 은은하고 구수한 향이 번져나갔다.
무쇠솥 안에서 산돌배와 마른 생강이 노랗게 우러나고 있었다.
준우는 약즙 위에 멥쌀 발효액 윗술을 국자로 둘렀다.
주정이 부드럽게 날아가며 알싸한 향이 번졌다. 청련근의 단맛이 생강의 매운 기운을 감쌌다.
“드시지요 어르신.”
준우가 투박한 질그릇 사발을 강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바싹 마른 손으로 그릇을 받았다. 연신 캑캑거리며 가슴을 쥐어뜯던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축였다.
따스한 온기가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돌배의 산미가 뭉친 가래를 녹여내렸고 생강의 훈기가 식은 위장을 은근히 덥혔다. 독한 자극 없이 맑은 기운만이 굳어 있던 흉격을 시원하게 틔웠다.
“커어억…….”
노인의 목에서 걸쭉한 가래 한 덩이가 밭은기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숨통이 트인 노인의 얼굴에 핏기가 천천히 돌아왔다. 마른 가슴이 깊고 편안한 호흡을 되찾았다.
“숨이…… 숨이 쉬어지는구나.”
노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사발 안으로 번졌다.
곁에 서 있던 태칠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칠이 품에서 떨리는 손으로 동전 세 닢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준우는 이번에는 그 동전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는 세 닢의 놋전을 주워 손바닥에 쥐었다. 차갑지만 묵직한 무게감이 손끝에 닿았다.
“술을 거저 주면 동냥이 되고 감당 못 할 값을 매기면 피를 빠는 칼이 됩니다. 정당한 대가를 치렀으니 당당하게 마시고 기운을 차리십시오.”
의원실 밖에서 지켜보던 인부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서 더는 화재의 절망이나 그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설아가 준우의 곁으로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였다.
“좋은 술입니다.”
“약보다 좋은 것은 제때 닿는 온기지요.”
준우가 사발을 정리하려던 찰나 밖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흑마 한 필이 멈춰 섰다. 말안장에서 내린 사내는 가슴팍에 검붉은 매화가 수놓인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대장로전의 호위무사였다.
무사는 경계하는 백화전 무사들을 거칠게 밀쳐내며 준우의 앞까지 걸어왔다.
“백화전주 강준우가 뉘기냐.”
설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서슬 퍼런 냉기를 뿜어냈다.
“우호법의 면전이다. 무례를 거두어라.”
무사는 설아를 보고 흠칫 굳었으나 품 안에서 흑철로 봉인된 서찰을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대장로님의 친서다.”
준우가 손을 뻗어 서찰을 받았다. 차가운 쇠 봉인을 뜯어내자 먹향 사이에 은은한 탄내와 쇠 냄새가 섞여 풍겨왔다.
메마른 필체로 두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무공도 모르는 어린 시종 놈이 감히 신교의 술값을 정하는가.
자신이 있다면 내일 정오 대장로전으로 와서 내 잔을 채워 보아라.]
서찰을 쥔 준우의 손가락 끝에 서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폐광의 화재 배후로 지목되던 신교의 거두 대장로 혁련광.
그가 마침내 백화전을 향해 잔을 빼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