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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신교의 수석 소믈리에26화

천마신교의 수석 소믈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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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잿더미의 빈티지

시커먼 연기가 걷힌 북부 폐광의 앞마당은 참혹했다.

제1 숙성고와 선별장이 있던 자리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향긋한 포도 냄새와 깎아낸 목재 향이 감돌던 곳이었다. 지금은 유황 탄내와 축축한 잿가루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전부 끝장났습니다……."

노칠이 그을음투성이가 된 손으로 땅바닥을 내리쳤다.

"남부에서 어렵게 골라 온 적양포 단지들이 모조리 터졌습니다. 바닥에 고인 시커먼 흙탕물을 보십시오. 저게 다 우리가 빚으려던 피 같은 원주입니다!"

인부들 몇몇이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흐느꼈다.

목수 장덕 역시 무너진 숙성고 벽체에 기댄 채 넋을 놓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반쯤 불타 숯이 된 대나무 테 조각 하나만이 쥐여 있었다.

"내가 통을 잘못 짰어. 불길이 닥쳤을 때 최소한 단단하게 버텨줬어야 했는데……."

"장덕 씨 탓이 아닙니다."

준우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그는 옷자락에 묻은 재를 털어내며 잿더미 한가운데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직 식지 않은 흙바닥에서 미지근한 열기가 피어올라 가죽신 바닥을 데웠다.

"자객들이 환기구를 막고 군용 발화유를 쏟아부었습니다. 어떤 통이라도 버텨낼 수 없는 화마였습니다. 자책할 시간에 발밑을 보십시오."

"발밑을요?"

장덕이 멍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이미 타버린 잿더미가 아니라 그 아래 살아남은 것들입니다."

끼익! 끽!

준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붉은 그림자 하나가 잿더미 사이를 잽싸게 가로질렀다.

적화였다.

털끝이 군데군데 그을렸지만 녀석은 생기가 넘쳤다. 녀석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타다 남은 바위틈과 무너진 석벽 그늘 아래를 날카로운 앞발로 파헤쳤다.

"적화야 뭘 찾았느냐?"

준우가 다가가 무너진 판재 더미를 들어 올렸다.

그 아래는 커다란 화강암 암반이 처마처럼 비스듬히 튀어나와 불길의 직격을 막아준 천연의 그늘막이었다.

그 서늘한 바위 그늘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대나무 광주리 몇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건……!"

노칠이 눈을 부릅뜨고 달려왔다.

광주리 바깥쪽은 연기에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안쪽의 적양포 송이들은 기적처럼 짓무르지 않고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칠의 안색은 이내 어둡게 가라앉았다.

"포도가 완전히 훈증되어 버렸습니다. 껍질이 오그라붙고 겉면이 까맣게 숯검정이 되었어요. 매캐한 연기 냄새가 껍질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이런 열매로는 술을 빚을 수 없습니다."

"잠깐만요."

준우가 노칠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준우는 광주리에서 그을린 적양포 한 알을 조심스럽게 따냈다. 손가락 끝으로 껍질을 살짝 누르자 팽팽하던 껍질이 쫀득하게 밀려났다. 수분이 날아가 껍질 안쪽의 과육이 젤리처럼 농축되어 있었다.

준우는 코끝을 포도에 바짝 가져다댔다.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겉면에는 짙은 연기 냄새가 자욱했다. 하지만 그것은 쓰레기가 타서 풍기는 불쾌한 냄새가 아니었다.

'삼나무 송진과 벼락 대나무가 타면서 뿜어낸 순수한 목재의 훈연향이다.'

산소가 부족한 갱도 안에서 삼나무 판재들이 숯가마처럼 연기를 뿜어냈고 그 짙은 연기가 바위틈으로 밀려들어 적양포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게다가 암반이 품고 있던 엄청난 고열이 수시간 동안 포도의 수분을 증발시켰다.

준우는 껍질을 벗겨내고 속에 든 검붉은 과육을 입안에 넣었다.

혀끝에 닿는 순간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관통했다.

달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하고 묵직한 단맛이었다. 보통의 완숙 적양포보다 당도가 두 배 이상 치솟아 있었다.

고열에 수분이 빠져나가 당분이 극한으로 농축된 탓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산미와 향이었다. 덜 익은 포도가 지니고 있던 거친 풋내와 날카로운 산미는 화마의 열기 속에서 완전히 분해되어 사라졌다. 대신 응축된 자두와 블랙베리의 농밀한 산미만이 남았다.

거기에 과육 가장자리에 은은하게 스며든 그윽한 훈연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스카치 위스키의 그윽한 피트 훈연향이나 강하게 구워낸 오크통에서 수년간 숙성된 귀부 와인을 동시에 맛보는 듯한 충격이었다.

"노칠 씨. 이건 쓰레기가 아닙니다."

준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기적의 원료입니다."

"예? 연기에 탄 포도가 어찌 기적이 됩니까?"

"포도의 풋내는 사라졌고 당도는 극도로 농축되었습니다. 껍질의 잡맛 대신 고귀한 훈연의 정수가 과육 안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세상 어떤 양조가도 인위적으로는 이런 상태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준우는 이어서 무너진 숙성실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불에 타다 만 삼나무 통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바깥 테를 감았던 대나무는 타서 끊어졌고 판재들은 시커먼 숯덩이처럼 변해 있었다.

장덕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통은 살릴 길이 없습니다 전주님. 겉이 숯이 된 나무로 술을 받으면 재 맛밖에 더 나겠습니까?"

준우는 바닥에 떨어진 목수용 대패를 집어 들었다. 그는 반쯤 탄 삼나무 판재 하나를 골라 바위 위에 얹어놓고 날을 밀었다.

사각! 사각!

시커먼 숯가루가 벗겨져 나가자 그 아래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황금빛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주변 공기가 일순간 달라졌다.

달콤하고 고소한 바닐라 향과 캐러멜의 진한 풍미가 훈연의 매캐함과 어우러져 번져나갔다.

"어……?"

장덕의 눈이 커졌다.

"나무에서 어찌 이런 달콤한 냄새가 납니까?"

"나무 안쪽에 잠들어 있던 섬유질과 당분이 화마의 고열에 그을리며 캐러멜처럼 변한 겁니다."

준우가 판재의 단면을 쓸어내렸다.

"불길이 나무 바깥쪽을 태웠지만 속살에는 가장 완벽한 굽기를 남겼습니다. 겉면의 탄 숯을 대패로 반 푼만 긁어내면 이 속살은 술의 거친 맛을 다듬고 깊은 향을 더해줄 최상의 숙성재가 됩니다."

장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버려질 숯덩이가 보물 같은 목재로 되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한 덕분이었다.

"장덕 씨. 남아 있는 판재들을 긁어내십시오. 겉의 재만 벗겨내고 속살의 훈연층을 살려 작은 임시 숙성통 다섯 개를 다시 짜맞추는 겁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장덕이 땀과 눈물을 훔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위철 님은 인부들과 함께 바위 그늘에 보존된 그을린 적양포를 전부 수습해 주십시오. 껍질이 터지지 않은 것들만 가려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전주님!"

위철과 인부들의 목소리에 다시 활기가 넘쳤다. 절망에 짓눌려 있던 폐허의 공기가 새로운 희망의 열기로 달아올랐다.

뒤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설아가 다가왔다.

"불길 속에서 사람을 살려내시더니 이번에는 잿더미 속에서 술을 살려내시는군요."

"아직 술이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고비입니다."

준우의 표정은 마냥 낙관적이지 않았다.

"포도의 당도가 너무 높습니다. 이 정도로 응축된 당분은 평범한 효모로는 소화해내지 못합니다. 발효가 도중에 멈춰버려 썩거나 끈적한 조청이 되어버릴 위험이 큽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다행히 지난번 시험에서 살아남았던 씨앗이 있습니다."

준우의 시선이 암반 깊숙한 곳을 향했다.


북쪽 암반의 비상 석실.

이곳은 화재 당시 인부들이 탈출로로 삼았던 지하 냉기 수맥의 시작점이었다. 천장에서 차가운 지하수가 떨어져 내렸고 바닥을 타고 흐르는 수맥 덕분에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화마가 닿지 않은 석실 구석에 세 겹의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작은 도자기 단지 하나가 온전히 놓여 있었다.

지난번 시험에서 산공독의 기운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강인한 효모 균주.

준우가 독향 효모라 이름 붙여 보관해 두었던 씨배양 단지였다.

"이 녀석은 열기와 냉기 그리고 독한 기운의 충격을 견뎌낸 효모입니다. 이 녀석이라면 고열에 그을린 당분 속에서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발효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준우는 선별해 온 그을린 적양포를 깨끗하게 씻은 돌절구에 쏟아부었다.

쿵! 쿵!

돌공이가 움직일 때마다 짙은 검붉은 즙액이 터져 나왔다.

달콤한 과즙의 향기 위로 스모키한 참나무 연기 냄새가 묵직하게 피어올랐다.

준우는 으깬 포도즙을 거친 삼베로 걸러낸 뒤 깊은 옹기 안에 부었다. 즙액의 점도가 워낙 높아 마치 붉은 꿀물처럼 걸쭉했다.

"그대로 두면 효모가 당분의 압력에 질식합니다."

준우는 지하 수맥에서 길어 올린 청정한 냉수를 부어 당도를 조율했다. 그리고 얇게 저며둔 청련근 수액 세 방울을 떨어뜨렸다. 청련근의 서늘한 기운이 훈연의 날카로운 탄내를 둥글게 감싸 안았다.

마침내 준우가 도자기 단지의 봉인을 뜯고 독향 효모 씨배양 한 종지를 옹기 안으로 부어 넣었다.

스으으……!

효모가 닿자마자 붉은 즙액 표면에서 미세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기포가 점차 굵어지더니 옹기 바닥 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보글! 부글부글!

엄청난 속도의 발효였다. 응축된 당분을 양분 삼아 독향 효모가 깨어나고 있었다. 옹기 벽면이 발효열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도가 너무 올라가면 효모가 제 열기에 타 죽습니다!"

위철이 당황해 소리쳤다.

"설아 낭자."

준우의 부름에 설아가 검을 짚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양손을 뻗어 옹기 바닥을 받치고 있는 차가운 수맥 바닥에 진기를 흘려보냈다.

사라락.

옹기 바닥에 얇은 서릿발이 맺히며 치솟던 발효열을 부드럽게 억눌렀다. 극도의 고열로 빚어진 당분과 지하 수맥의 얼음 같은 냉기가 옹기 안에서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다.

거칠게 요동치던 기포가 차츰 잦아들었다.

치익…… 사르르.

고요해진 술 표면 위로 지금껏 맡아본 적 없는 기이하고 맑은 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캐하던 연기 냄새는 사라졌다.

잘 마른 참나무 장작이 타는 듯한 그윽하고 따스한 훈연향.

그 뒤를 받치는 건포도와 블랙체리의 원숙한 과실향.

옹기 안쪽에 띄워둔 삼나무 판재에서 우러나온 은은한 바닐라 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석실 안에 모여 숨을 죽이고 있던 인부들의 코가 일제히 벌어졌다.

"이게…… 정녕 잿더미에서 나온 향이란 말입니까?"

노칠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장덕은 대패를 쥔 손을 떨며 눈시울을 붉혔다.

준우는 국자로 맑게 뜬 붉은 윗술을 떠내어 옥잔에 따랐다. 잔 안에서 찰랑이는 액체는 맑고 짙은 석류석 빛깔을 띠고 있었다.

준우는 잔을 들어 설아에게 먼저 건넸다.

"맛을 보아 주십시오."

설아는 잔을 받아 천천히 입술을 적셨다.

한 모금의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설아의 눈망울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첫맛은 혀를 감싸 쥐는 묵직한 건과일의 단맛이었다. 곧이어 피어오르는 그윽한 훈연의 풍미가 단맛의 무게를 깔끔하게 받쳐주었다. 그리고 입안에 남는 비단결 같은 탄닌이 혀뿌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더욱 놀라운 것은 뱃속의 변화였다.

화재 당시 무리하게 진기를 쓰느라 뒤틀려 있던 위장의 명치가 거짓말처럼 편안해지며 아랫배에서 따스한 온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단전이…… 따스해집니다."

설아가 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감탄했다.

"불길의 열기가 독이 되지 않고 사람의 몸을 녹이는 온기로 바뀌어 있습니다. 거칠던 기맥이 부드럽게 풀려나갑니다."

준우 역시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화마라는 재난과 극한의 고열 그리고 북부 암반의 혹한이 빚어낸 단 하나의 기적이었다.

"이 술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준우의 목소리가 조용한 석실 안을 울렸다.

"회생주(回生酒).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선 술입니다."

인부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서로를 얼싸안았다.

하지만 위철은 기쁨 속에서도 현실적인 근심을 털어놓았다.

"전주님 술이 훌륭한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술은 양이 너무 적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건져낸 포도로 빚은 것이니 서른 병 남짓에 불과합니다. 이 적은 술로 어떻게 타버린 양조장을 다시 세운단 말입니까?"

무너진 갱도를 복구하고 대규모 숙성고를 다시 짓기 위해서는 막대한 은화와 자재가 필요했다.

준우는 잔에 남은 붉은 술을 응시했다.

"양이 적다는 것은 단점이 아닙니다 위철 님. 오히려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무기라니요?"

"이 술은 두 번 다시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화마가 남긴 잿더미와 극한의 온도 속에서 단 한 번 태어난 기적의 빈티지입니다. 희소성이야말로 부자들이 가장 비싼 값을 치르는 이유입니다."

준우의 시선이 석실 밖 폐광 어귀로 향했다.

"신교와 중원의 돈줄을 쥐고 흔드는 상단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탐욕스러운 마도상단을 이곳으로 불러들일 겁니다."

"마도상단이요?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치들입니다."

설아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경고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순순히 넘길 생각은 없습니다."

준우의 입가에 예리한 호선이 그려졌다.

"천하에서 단 서른 병뿐인 술입니다. 그들에게 독점권을 미끼로 던져 서로 값을 올리게 만드는 공개 경매를 열 겁니다. 그들이 쏟아붓는 금화로 우리는 이전보다 열 배는 더 거대하고 완벽한 술성을 지을 겁니다."

그때 설아가 품 안에서 검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작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지난밤 복면 자객의 품에서 회수했던 물건이었다.

"경매를 준비하는 동안 저도 이 자들의 뿌리를 파헤치겠습니다. 이 약병에서 풍기는 피 비린내……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닙니다. 사람의 피를 발효시켜 술을 빚는다는 혈주회의 그림자가 확실합니다."

"예. 저들이 우리의 양조장을 불태우려 했다면 우리는 그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철옹성 같은 술성을 세워 맞서야 합니다."

잿더미가 된 폐광의 산마루 위로 붉은 저녁노을이 타올랐다.

그 불타는 하늘 아래 폐허가 된 양조장 정문 쪽으로 거대한 붉은 깃발을 앞세운 상단의 마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도상단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수레였다.

새로운 폭풍이 잿더미 위로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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