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싶은 마교 교주

3화: 그림자는 낮에 밟힌다
쿵!
육중한 침향목 덧문이 닫히며 집무실 안쪽으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책상머리에서 양곡방 서류를 넘기던 진무연은 찻잔을 든 채 굳어졌다. 문살 틈새로 비치던 오전 햇살이 단숨에 차단되었다.
"무슨 소란입니까."
무연이 찻잔을 내려놓고 문을 밀치자 회랑 바닥에 부서진 나무 상자가 나뒹굴고 있었다. 상자 위에는 '서북 운송 제칠책'이라는 붉은 패가 덜렁거렸다. 깨진 널빤지 틈새로 얇은 책 세 권과 시커먼 쇠틀이 드러나 있었다.
소형 쇠뇌였다.
강철 활대에는 굵은 시위가 당겨져 있었고 흑철 화살 한 발이 발사 홈에 물려 있었다. 상자 옆면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상자를 든 채 창문 쪽을 향해 방아쇠 끈만 당기면 덧문 너머로 화살이 쇄도하는 구조였다.
백야대원 하나가 칼집을 쇠뇌의 시위와 활대 사이에 깊숙이 찔러 넣어 격발을 막고 있었다.
무연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진짜 날 쏘려고 한 건가?'
불과 반 각 전까지 무연은 바로 저 창가에 서서 바깥의 장부 접수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찻잔을 들고 창틀에 기댔더라면 쇠화살이 목덜미를 꿰뚫었을 터였다.
대낮에 교주 집무실 앞까지 쇠뇌를 들고 들어오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것은 피로 때문이 아니라 순전한 공포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미동조차 않는 냉혹한 침착함으로 비쳤다.
설백하가 쌍도의 칼자루를 쥔 채 다가왔다. 왼쪽 뺨의 옅은 흉터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교주님, 암살 시도입니다. 즉시 내실로 몸을 피하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격분에 떨리고 있었다.
"장부 운반꾼으로 위장한 자객 두 놈이 상자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한 놈은 서고 뒤편 낭하로 다른 한 놈은 아래쪽 외곽 배수구 방향입니다. 즉시 본산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혈풍대와 백야대를 풀어 산 전체를 뒤집어엎겠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산 전체를 뒤집어엎는다?
그렇게 되면 적염산 전체가 비상 계엄에 돌입한다. 피비린내 나는 수색과 심문이 밤낮없이 이어질 것이고 장부 정리는커녕 온종일 칼부림 뒤치다꺼리나 해야 한다. 야근 금지령이고 퇴근이고 전부 날아가는 길이었다.
"성문은 닫지 마시오."
무연의 건조한 목소리가 회랑의 소란을 갈랐다. 설백하가 눈을 크게 떴다.
"예? 성문을 닫지 않으면 놈들이 본산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문을 걸어 잠그면 오늘 장부를 내러 온 수백 명의 교도들은 어찌 됩니까? 죄 없는 하급 서기들과 운반꾼들까지 용의자로 몰아 공포에 떨게 만들 생각입니까?"
"하지만……."
"통행 문 앞의 경비만 두 배로 늘리고 나가는 자들의 신원과 소지품을 대조하십시오. 일상적인 이동을 막아 교단 업무를 마비시키지 마시오."
무연은 부서진 상자 곁으로 다가가 흩어진 책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그리고 도주한 자들을 쫓되 절대 죽이지 마시오."
설백하의 숨이 멎었다.
"죽이지 말라 하십니까? 교주님의 목숨을 노린 대역죄인들입니다!"
"시체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죽여 버리면 배후가 누구인지 이 쇠뇌를 어디서 들여왔는지 어떻게 밝혀낼 생각입니까?"
무연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설백하를 응시했다.
"산 채로 잡으시오. 숨통은 붙여서 내 앞에 꿇려 놓으시오. 오늘 안에 끝냅시다. 불필요한 피는 흘리지 말고."
설백하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성문을 닫지 않고 퇴로를 열어두어 배후의 연락망까지 모조리 밖으로 끌어내려는 혜안. 거기에 더해 산 채로 잡아 교단 내부 깊숙이 뿌리내린 음모의 줄기를 통째로 뽑아 올리겠다는 뜻이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설백하가 포권을 취하고 몸을 돌렸다.
"백야대 일조는 집무실을 호위하라! 삼조와 사조는 나를 따른다!"
회랑 바닥의 흙먼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설백하는 백야대원 넷을 이끌고 동쪽 서고 낭하로 질주했다. 총관 서진의가 접수처를 서기들에게 맡긴 뒤 급히 뒤따라왔다.
"호법! 이것을 보십시오!"
서진의가 길바닥에서 주워 올린 황동 패를 내밀었다. '임시 노역 통행패'라는 글귀와 함께 붉은 인영이 찍혀 있었다.
"자객 놈들이 도주하며 떨어뜨린 것입니다. 군수방에서 발행하는 패입니다."
"군수방의 통행패라고? 도천악 장로의 수하들이란 말인가?"
"아직 단정할 수 없습니다. 모서리가 깎여 있고 일련번호가 빠져 있습니다. 군수방에 굴러다니던 폐기 패를 훔쳐 썼거나 인장만 도용해 위조한 것입니다."
설백하는 통행패를 돌려주며 바닥을 훑었다.
하늘 한가운데 뜬 햇살이 대리석 복도와 흙길 위를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평소 마교의 자객들이 활동하던 시간은 칠흑 같은 밤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은신술만으로 흔적을 감출 수 있었고 목을 베고 피를 뿌려도 시체는 다음 날 아침에나 발견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교주 진무연이 내린 '야간 무력 행사 전면 금지령' 때문에 적들은 밤의 암살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 선택한 것이 대낮의 장부 접수를 틈탄 위장 침입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자객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장부를 바치러 온 교도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그 틈새로 유독 깊게 패인 짚신 자국 두 줄기가 동쪽 약초 건조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급하게 경공을 펼치느라 앞꿈치에 무게가 실린 흔적이었다. 게다가 수레바퀴 기름이 묻어 있었는지 서고 모퉁이의 흰 벽마다 거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설백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밤의 칼을 거두게 하신 것은 자비 따위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활개 치던 독사들을 대낮의 햇빛 아래로 강제로 끌어내어 그들의 발자국과 기름 흔적을 온 천하에 드러나게 만든 거대한 함정이었다.
햇빛 아래서 그림자는 더욱 짙게 밟히는 법이었다.
"동쪽 건조장이다. 놈이 숨을 곳은 폐건물밖에 없다."
적염산 동쪽 외곽의 약초 건조장은 퀴퀴한 쑥 냄새와 장뇌유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대 교주 시절 지혈초를 말리던 목조 건물들이 방치된 곳이었다. 수백 개의 목재 건조대가 미로처럼 얽혀 있어 몸을 숨기기에는 알맞은 장소였다.
스륵.
건조대 깊은 곳에서 미세한 마찰음이 일었다.
"나오너라. 발자국이 네놈의 무덤 앞까지 이어져 있다."
설백하의 서늘한 목소리가 건조장에 울렸다. 대답 대신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푸른 독기가 묻은 흑철 비수가 날아들었다.
채앵!
설백하는 칼을 뽑지도 않고 오른쪽 칼집을 튕겨 비수를 쳐냈다. 비수를 던진 사내가 품에서 단도를 꺼내며 몸을 날렸다. 장부 운반꾼의 무명옷을 입었으나 몸놀림은 날랜 살수였다.
설백하는 반 발자국 물러서며 칼날을 흘려보냈다. 보통 때라면 즉시 목을 베었을 터였다. 하지만 귓가에 주군의 목소리가 쟁쟁했다.
'절대 죽이지 마시오.'
설백하는 칼자루의 둥근 병두로 사내의 오른손 손목뼈를 내리찍었다.
빠각!
"아악!"
단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턱을 젖혀 어금니 뒤의 독환을 깨물려 했다.
"어딜!"
설백하의 왼손이 번개처럼 뻗어나가 사내의 턱관절을 가격했다. 턱뼈가 어긋나며 새까만 독환이 밖으로 튕겨 나갔다. 독환이 흙바닥에 떨어져 으깨지며 지독한 유황내가 피어올랐다.
뒤따라온 백야대원들이 사내의 혈도에 흑철 침을 박아 넣고 결박했다.
"호법님! 배수구 쪽으로 달아난 다른 놈은 외곽 절벽 급류로 뛰어내렸습니다!"
수색을 다녀온 대원이 보고했다.
"무리해서 뒤쫓지 마라. 이쪽에 산 자가 있다."
설백하는 결박당한 사내의 턱을 맞추어 준 뒤 품을 뒤졌다. 소매 안쪽에서 서북 국경 초소 교대 시간표와 접선 암호가 적힌 삼베 조각이 나왔다. 사내의 왼쪽 손목 안쪽에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살점을 도려내고 태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사내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죽여라! 마교 놈들에게 불 말 따위는 없다!"
"교주님께서는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말라 하셨다. 네 목숨값은 고문실의 비명이 아니라 네가 뱉어낼 진실의 무게로 결정될 것이다. 끌고 가라."
사내의 눈동자에 짙은 혼란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암살자를 즉결 처형하지도 고문하지도 않는 상식 밖의 처사가 사내를 더 짓눌렀다.
정오가 가까워진 집무실.
결박당한 사내가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분해된 쇠뇌와 화살 위조된 통행패 그리고 피 묻은 삼베 조각이 놓였다.
진무연은 턱을 괸 채 쇠뇌의 살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촉 끝에 묻은 거무튀튀한 독물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피가 굳어 죽는 맹독이었다.
하지만 무연은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수고했소, 설 호법.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부상자는 없습니다. 교주님의 영단 덕분입니다."
무연은 서진의를 바라보았다.
"서 총관, 서북 운송 제칠책은 어찌 되었습니까?"
서진의가 주판알을 튕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칠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군수방에서 해당 장부를 관리하던 담당 서기가 오늘 아침 짐을 싸서 달아났습니다. 양곡방에서 넘어간 육백 냥의 최종 지출 내역이 적혀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자객 소동으로 총관부 서기들이 차출되어 일상 결재가 완전히 멈췄습니다."
그때 대전 밖 복도에서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렸다.
"교주 집무실에 쥐새끼가 들었다! 지금 당장 무기고를 열고 비상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
도천악 장로의 목소리였다. 자객 침입 소식을 듣자마자 무력 동원의 명분을 잡았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무연은 진저리를 치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여기서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무기를 나눠주면 교단은 그날로 전쟁터가 된다. 서기들은 밤새 무기와 군량을 날라야 할 것이고 무연 자신도 야간 회의에 묶여 잠을 잘 수 없다. 은퇴 자금이고 찻집이고 전부 날아가는 짓이었다.
"도 장로에게 전하시오. 비상 계엄도 무기고 개방도 불허합니다."
"교주님, 하지만 적들의 침투가 확인되었습니다."
"도망친 쥐새끼 때문에 교단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비된 행정을 정상화하는 것입니다. 쓰러져 가는 서기들을 밤새 굴려 봐야 나오는 것은 엉터리 장부뿐입니다."
무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자객은 지하 감옥에 가두되 식사와 물을 충분히 주시오. 고문이나 폭행은 일체 금합니다. 내일 아침 제정신으로 입을 열게 하시오."
"알겠습니다."
설백하가 결박된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무연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내려다보며 서진의에게 말했다.
"서 총관. 내일 아침 일찍 모든 부서의 업무표를 가져오십시오."
"업무표 말입니까?"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어디에 인력이 낭비되는지 전부 파악해야겠습니다. 쓸데없는 야근과 중복 업무부터 잘라낼 것입니다. 사람이 쉬어야 일도 돌아가는 법입니다."
서진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무림식 주먹구구 행정을 근본부터 해체하여 효율적인 체제로 재편하겠다는 교주의 대개혁 선언이었다.
설백하 역시 자객을 끌고 나가며 속으로 전율했다.
야간 무력 금지로 적들을 대낮의 햇빛 아래로 몰아내어 쇠뇌를 압수했다. 살생을 금하여 암호문과 산 증인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제는 업무표 개편이라는 행정의 칼날로 배신자들의 은신처를 파괴하려 하신다.
이것은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교단 전체의 첩자망을 일망타진하려는 대대적인 첩자 소탕 작전이었다.
무연은 식어버린 찻잔을 들며 한숨을 삼켰다.
'내일은 제발 정시에 퇴근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적염산 절벽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교 교주의 평온한 바람과 달리 교단을 뒤흔들 거대한 숙청의 폭풍이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