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싶은 마교 교주

4화: 붉은 먹줄을 긋다
동이 트기도 전부터 흑요대전 앞 회랑은 아수라장이었다.
"비키시오! 정오까지 보낼 외곽 초소 땔감 전표요! 도장이 없으면 수레를 못 띄운단 말이오!"
"마구간 사료 전표가 사흘째 묶여 있소! 말들이 굶어 죽으면 총관부가 책임질 거요?"
회랑 바닥을 가득 메운 백여 명의 하급 교도와 마부들이 종이 뭉치를 치켜들며 고성을 질렀다.
접수대 안쪽에서는 서기 스무 명이 핏발 선 눈으로 붓을 휘둘렀다. 어제 발생한 자객 소동으로 경비가 삼엄해진 데다 백삼십 명의 감사 장부 대조까지 겹친 탓이었다.
야간 근무가 금지되자 새벽부터 나와 매달렸으나 쏟아지는 서류를 감당하지 못했다. 구석에서는 스무 살 남짓한 서기가 코피를 쏟으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
"김 서기! 정신 차리게!"
"눈앞의 숫자가…… 네 개로 겹쳐 보입니다……."
동료들이 부축했지만 서기는 손에 쥔 붓조차 가누지 못했다.
달칵.
총관부 안쪽 문이 열리며 총관 서진의가 걸어 나왔다. 그의 품에는 두꺼운 서류철과 부서별 업무표 묶음이 한가득 안겨 있었다. 안경 너머의 눈매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소란을 멈추시오! 순서대로 확인하지 않은 문서는 단 한 장도 날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진의는 고함치는 자들을 차갑게 쏘아본 뒤 곧장 교주 집무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집무실 창가에서 찻잔을 들고 있던 진무연은 문밖의 소란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왜 저리 시끄러운 거야. 또 무슨 일인데.'
쾅.
문이 열리며 들어선 서진의가 품에 안고 있던 서류 더미를 무연의 책상 위에 묵직하게 내려놓았다.
쿵!
찻잔에서 맑은 찻물이 찰랑거렸다.
"교주님, 결례를 무릅쓰고 직언을 올리고자 합니다."
문가에 시립해 있던 설백하가 쌍도의 손잡이를 살짝 쥐었다. 무연은 손짓으로 설백하를 제지한 뒤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무슨 일입니까 서 총관. 아침부터 기세가 흉흉하군요."
"총관부의 행정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서진의는 서류 더미 맨 위의 붉은 전표들을 짚었다.
"교주님의 야간 무력 금지와 살생 금지령은 훌륭했습니다. 덕분에 어제 자객을 생포했고 혼란도 피했습니다. 하지만 밤샘 근무가 막힌 상태에서 감사 장부까지 쏟아지니 일상 결재가 멈췄습니다."
"일상 결재가 멈췄다?"
"예. 오늘 점심 양곡 방출 승인도 외곽 순찰대의 방한복과 땔감 전표도 전부 묶였습니다. 이대로 정오를 넘기면 수만 명의 교도가 밥을 굶고 말들은 짚단을 씹지 못합니다."
서진의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단호하게 건의했다.
"한시적으로 야근 금지령을 풀어 주십시오. 아니면 각 당의 무인들을 서기로 차출해 밤새 서류를 정리하게 해 주십시오. 밤을 새우지 않고는 수습할 길이 없습니다."
야근을 풀거나 무인들을 서기로 징발해 밤을 새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연의 등골에 서늘한 한기가 스쳤다.
'야근을 다시 허락하라고? 제정신인가?'
밤샘을 허락하는 순간 끝이었다. 오늘 밤을 새우면 내일도 새워야 하고 서기들이 밤새 쓴 엉터리 서류에 도장을 찍느라 교주인 자신도 새벽까지 감금된다. 평화로운 퇴근과 찻집의 꿈이 영원히 날아가는 길이었다.
무연은 잔을 내려놓으며 턱을 괴었다.
"서 총관."
"예 교주님."
"칼만 쥐던 무인에게 붓을 쥐여주면 종이가 찢어집니다. 잠을 못 잔 서기에게 장부를 맡기면 십(十)을 천(千)으로 잘못 적어 금고가 거덜 나지요."
"하지만 일손이 부족합니다!"
"일손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무연의 건조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가라앉혔다.
"쓸데없는 짓을 너무 많이 하고 있는 겁니다."
"……예?"
무연은 책상 위 부서별 업무표 묶음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가져온 업무표부터 이리 내시오. 이 조직이 대체 왜 이 모양으로 굴러가는지 내가 직접 봐야겠습니다."
무연은 펼쳐진 양곡방과 군수방의 업무 분장표를 한 장씩 넘겼다.
장부를 넘길수록 눈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온갖 결재 지옥을 겪어 온 직장인의 눈으로 보자 교단의 행정은 기적에 가까운 비효율의 결정체였다.
"서 총관. 이것을 보시오."
무연이 양곡방 전표를 짚었다. '소금 열 가마니 구입 청구서'였다. 금액은 고작 은 여덟 냥이었다.
"소금 열 가마니를 사는데 왜 도장이 다섯 개나 찍혀 있습니까?"
"하급 서기가 기안하고 물류 조장이 확인한 뒤 군수방 계장이 검토합니다. 이후 총관부 당서기가 예산을 대조하고 제가 최종 서명해야 금고에서 은자가 나갑니다."
"은 여덟 냥짜리 소금을 사는 데 다섯 사람이 계단을 오르내린단 말입니까?"
"횡령을 막기 위한 다중 확인 절차입니다."
"이러니 줄이 회랑 끝까지 늘어서는 겁니다."
도장 다섯 개를 받느라 사흘을 기다리고 그동안 소금 마차는 성문 밖에서 썩어 가고 있었다. 결재 권한을 위임할 줄 모르는 관료주의의 극치였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양곡방 원장, 군수방 대조장, 총관부 보관장. 이 세 권의 장부에 적힌 내용이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더군요. 왜 같은 내용을 서기 셋이서 각자 베껴 쓰고 있습니까?"
"부서 간 장부를 교차 검증하기 위함입니다."
"원장 하나에 전표 한 장만 철해서 보관하면 끝날 일입니다. 똑같은 종이를 세 번 필사하느라 서기들이 코피를 쏟고 먹물이 바닥나는데 그게 검증입니까?"
서진의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수백 년간 당연시되던 관행들이 교주의 지적 한마디에 모조리 낭비로 전락했다.
무연의 손가락이 무인 근무표로 향했다.
"총관부 외곽 경비대에 무인이 쉰 명이나 등록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내가 볼 때마다 저자들은 그늘에서 투전을 하거나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도천악 장로님 휘하의 무인들입니다. 총관부 기밀과 금고를 지킨다는 명목입니다."
"지키기는커녕 밥만 축내고 있더군요."
도천악을 비롯한 장로들이 자기 사람을 꽂아 넣고 결재를 방해하거나 뒷돈을 뜯어내던 기생충 같은 자리들이었다.
"게다가 아침마다 전 부서장이 모여 올리는 구두 문안 보고. 한 시간 동안 영생을 축원하느라 오전 업무를 다 날리는 것이 예법입니까?"
무연은 서류철을 탁 덮었다.
"불필요한 결재선, 중복 필사, 유령 보직, 쓸데없는 허례허식. 이 군더더기를 쳐내지 않고 야근을 하겠다고요?"
서진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연은 붓걸이에서 붉은 주사가 뚝뚝 떨어지는 주필(朱筆)을 집어 들었다.
스륵.
붉은 먹물을 머금은 주필 끝이 한지 위를 겨누었다.
"교, 교주님?"
붉은 먹줄은 무림에서 배신자나 사형수를 지정할 때 쓰던 죽음의 표식이었다.
하지만 무연의 표정은 건조했다. 오늘 안에 서류를 쳐내지 못하면 정시 퇴근은 불가능했다.
좍!
붉은 먹줄이 군수방의 '물류 조장 확인'과 '총관부 당서기 검토' 칸을 단숨에 지웠다.
"첫째, 은 십 냥 이하의 일상 경비는 현장 실무자의 기안과 부서장 전결로 즉시 집행하시오. 총관부까지 들고 오지 마시오."
"총관부 확인 없이 내주면 횡령이 일어납니다!"
"열흘마다 영수증을 묶어 감사하면 됩니다. 은 십 냥을 지키겠다고 열 사람이 사흘을 매달려 허비하는 인건비가 훨씬 큽니다. 현장에서 결재하고 즉시 집행하시오."
좍!
주필이 장부 목록 위를 갈랐다.
"둘째, 세 권의 중복 필사를 전면 폐지합니다. 원장 하나에 전표 한 장만 첨부하여 날인하시오. 같은 내용을 다른 장부에 베껴 적는 서기는 태형에 처할 것입니다."
서진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기들의 업무량이 단숨에 삼분의 일로 줄어드는 수치였다.
"셋째, 매일 아침 구두 문안 보고는 영구히 폐지합니다. 할 말이 있으면 반 장짜리 종이에 핵심만 세 줄로 요약해서 올리시오. 세 줄을 넘기거나 미사여구가 섞인 문서는 읽지 않고 태우겠습니다."
무연의 주필은 외곽 경비대 무인 명부로 향했다. 쉰 명의 이름 위에 굵은 먹줄이 그어졌다.
"넷째, 경비 명목으로 빈둥거리던 무인 쉰 명. 전원 보직을 해임합니다. 당장 창고로 보내 쌀가마니 하역과 서류 수레 운반에 투입하십시오. 땀 흘리지 않는 자에게는 저녁 밥도 은자도 주지 마시오."
탁!
무연이 주필을 내려놓았다.
"이 개정 업무표를 총관부 문앞에 게시하시오. 오늘 안에 끝냅시다. 해가 지기 전에 밀린 결재를 전부 털어내시오."
서진의는 붉은 줄이 그어진 종이를 내려다보며 떨었다.
'이것은…… 단순한 업무 단축이 아니다.'
조장과 당서기를 배제한 자리. 그곳은 바로 도천악 계열의 중간 간부들이 틀어쥐고 뇌물을 요구하던 부패의 통로였다. 교주는 붉은 먹줄 몇 번으로 장로파의 착복선을 물리적으로 도려냈다.
게다가 유령 무인들을 하역 작업에 투입해 사병을 무력화하고 세 줄 요약 보고로 간자들의 혓바닥을 차단했다. 공포가 아니라 제도로 적들의 목줄을 죄는 무서운 통치술이었다.
설백하 역시 깊은 경외에 차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지휘 체계로 교단을 완벽한 유기체로 벼려내는 군략이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서진의는 개정 업무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정오가 지나자 총관부 앞마당의 공기가 바뀌었다.
대문 앞에 붉은 먹으로 쓴 '개정 업무 규정'이 붙자 서진의의 목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은 십 냥 이하의 일상 경비는 각 부서장 전결로 즉각 지급한다! 마부들은 총관부에 설 필요 없이 즉시 창고로 가서 은자를 수령하라!"
마부들이 환성을 질렀다. 반나절 동안 회랑을 메우던 인파가 한 각도 지나지 않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총관부 내부도 변했다. 장부를 베껴 쓰느라 탈진했던 서기들의 책상에서 서류가 순식간에 줄었다. 원장에 전표 한 장만 붙여 날인하니 결재 속도가 세 배 이상 빨라졌다.
게다가 쉰 명의 무인이 창고로 끌려가 쌀가마니를 나르고 서류 상자를 짊어지자 서기들의 부담이 말끔히 사라졌다.
"살았다……."
코피를 쏟았던 어린 서기가 눈물을 글썽였다.
"교주님 덕분에 살았어."
서기들의 찬양이 터져 나왔다. 마교의 절대자가 내린 첫 기적은 목을 베는 칼날이 아니라 서기들을 살리는 붉은 먹줄이었다.
한편 서진의는 간소화된 결재선을 따라 군수방 서류를 정리하다 기괴한 흔적을 포착했다.
"이게 뭐지?"
군수방의 정기 지출 명세서였다. 매달 '서북 정찰대 방한복 및 잡비' 명목으로 은 팔백 냥씩 결재된 기록이었다.
복잡한 5단계 결재선 속에서는 가려져 있던 문서였으나, 단순화된 수령처를 대조하자 진실이 드러났다.
은 팔백 냥의 실제 운송 경로가 서북 초소가 아니었다. 적염산 외곽 절벽 아래 형성된 난민 거주지인 '적염산 빈민촌' 일대로 배송되고 있었다.
"군수방의 돈이 왜 서북이 아니라 빈민촌으로 흘러 들어간 거지?"
서진의의 눈빛이 번뜩였다. 서북 운송 제칠책의 미도착과 군수방 서기의 도주. 그 실마리가 본산 발밑의 빈민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시각 교주 집무실.
진무연은 깨끗하게 비워진 책상을 보며 감격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류 수백 장이 사라지고 책상 위에는 따뜻한 차 한 잔만 놓여 있었다. 해는 아직 서쪽 하늘에 넉넉하게 걸려 있었다.
"완벽하다."
무연은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결재선을 쳐내니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잖아. 쓸데없는 회의도 없고 야근도 없고."
품에서 찻집 도면을 꺼내 감상하던 무연이 외투를 챙겨 들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문이 열리며 서진의가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방금 찾아낸 군수방의 빈민촌 송금 전표가 들려 있었다.
"교주님."
무연의 손이 외투 깃을 쥔 채 굳었다.
"서 총관? 왜 그러시오. 오늘 일은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서진의가 전표를 내려놓으며 깊게 포권을 취했다.
"교주님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결재선을 쳐내시자마자 군수방이 숨겨둔 검은 돈의 흐름이 고스란히 꼬리를 잡혔습니다."
"……예?"
"서북으로 간다던 군수방 자금 은 팔백 냥이 매달 적염산 빈민촌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도주한 서기와 제칠책의 행방 역시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서진의가 비장하게 무연을 응시했다.
"빈민촌에 숨겨진 반역의 자금줄을 칠 준비를 마치셨군요. 언제 출진하시겠습니까?"
무연의 턱이 뚝 떨어졌다.
외투를 쥔 손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출진이라니? 난 그냥 퇴근하고 싶었을 뿐인데……?'
적염산 너머로 붉은 저녁노을이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마교 교주의 간절한 퇴근길 위로 또다시 불길하고 거대한 사건의 그림자가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