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이 되었는데 용사가 내 제자

3화: 휘두르기 전에 서는 법부터
"손 펴. 얼른!"
도윤은 루안의 팔꿈치를 단단히 쥐었다.
아이의 작은 오른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천을 덧댄 손잡이를 쥔 손가락들은 쇠줄로 묶인 듯 굳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허공으로 뻗은 새끼손가락 끝마저 파랗게 얼어붙고 있었다.
목검 끝에서 솟구친 가느다란 흰빛이 파직 소리를 내며 요동쳤다. 사방으로 뻗은 빛줄기가 어스름한 마당을 시퍼렇게 밝혔다.
"안…… 펴집니다……!"
루안의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아이는 어떻게든 손을 떼어내려 왼손으로 제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러자마자 목검 끝의 흰빛이 맥박처럼 번쩍였다. 아이의 무릎이 꺾이며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도윤의 등 뒤에서 저음의 현악기 소리가 낮게 울렸다. 성검의 빛에 반응한 마왕의 마력이 웅웅거렸다.
'내 마력으로 누르면 안 돼.'
성질이 다른 두 힘이 부딪치면 가장 약한 통로인 아이의 팔부터 터져 나간다.
"힘주지 말라니까 왜 버텨!"
"놓아야 하는데…… 손이 말을 안 듣습니다!"
루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떨어졌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 끝마디에 피가 멎어가고 있었다.
도윤은 팔꿈치를 받치던 손을 올려 손목 안쪽을 찾았다. 던전에서 무거운 바위를 나르다 보면 손아귀가 굳어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 인부들이 종종 있었다. 억지로 꺾으면 힘줄이 끊어진다. 그럴 때 푸는 자리는 따로 있었다.
도윤은 엄지손가락으로 루안의 손목 안쪽 두 힘줄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으윽!"
"숨 쉬어. 들이쉬지 말고 길게 내뱉어."
도윤이 다른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누르며 숨을 유도했다.
"하아…… 후우……."
"계속 뱉어. 검 같은 거 잊어버리고 숨부터 다 비워내."
아이의 호흡이 쏟아져 나오며 굳어 있던 어깨가 내려앉았다. 손목 힘줄을 누르던 압박에 손아귀를 쥐어짜던 경련이 툭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윤이 루안의 손등을 가볍게 털었다.
툭.
손잡이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헝겊을 감은 목검이 마당 흙바닥 위로 굴렀다.
검이 손에서 떨어지자마자 날카롭게 뻗던 흰빛이 거짓말처럼 스러졌다. 어두워진 마당에 차가운 바람만 휑하니 들이쳤다.
"허억…… 컥……."
루안의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도윤은 고꾸라지려는 아이의 겨드랑이를 재빨리 낚아챘다. 작은 몸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도윤은 루안을 장작더미 옆 넓적한 나무 밑동에 앉혔다.
"앉아 있어. 움직이지 말고."
루안은 밑동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의 오른손은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 안쪽은 하얗게 질렸고 손가락 끝은 감각이 없는지 연신 손톱을 맞부딪치며 내려다보았다.
도윤은 흙바닥에 떨어진 목검을 주워 들었다.
겉보기에는 천을 두른 평범한 목검이었다. 서슬 퍼런 빛이나 파직거리던 소리는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손잡이를 쥔 도윤의 손바닥 끝으로 아주 미약하고 서늘한 이물감이 찌릿하게 스쳤다.
'나무 검이 아니야. 속에 뭔가가 박혀 있어.'
도윤은 목검을 장작더미 위에 올려두고 루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 줘 봐."
루안이 흠칫하며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추려 했다.
"괜찮…… 습니다. 결투를 계속……."
"말도 제대로 안 나오면서 무슨 결투야."
도윤은 아이의 오른손을 잡아채 제 손바닥 위에 올렸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도윤은 아이의 굳은 손가락 마디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잡역부들이 얼어붙은 연장을 만지다 손이 굳었을 때 하던 처치였다. 엄지로 손바닥 중심을 문지르자 멎어 있던 피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아파?"
"……조금 저립니다."
루안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도윤은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한참 뒤에야 모기만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전에서 성검 의식을 받고 나서부터입니다."
"의식?"
"네. 성검에 손을 얹고 기도를 올렸는데…… 그 뒤로 가끔 목검을 세게 쥐면 손이 굳고 칼끝에서 빛이 났습니다."
"의사한테 안 보여줬어?"
"신관님들이…… 그건 선택받은 용사의 징표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손이 떨리는 것이니 검을 더 꽉 쥐어야 한다고……."
루안의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했다. 의심 한 점 없는 순수한 믿음이었다.
도윤은 명치가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도구를 쥘 때 피가 통하지 않고 힘줄이 굳는 것은 몸이 한계를 넘었다고 비명을 지르는 신호다. 그걸 정신력으로 억누르고 더 세게 쥐라는 것은 팔을 망가뜨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도윤은 치미는 화를 누르며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들 말 다 틀렸어."
루안이 놀란 눈으로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틀리다니요? 신관님들은 신의 뜻을 전하는 분들입니다."
"손가락이 마비되면 칼을 못 쥐잖아. 칼을 못 쥐는 검사가 전장에 나가면 어떻게 돼? 그냥 개죽음이지."
도윤은 루안의 손바닥을 툭 쳤다.
"피가 안 통해서 손이 하얗게 질리는 건 네 몸이 죽겠다고 소리치는 거야. 거기다 대고 힘을 더 주는 건 용감한 게 아니라 멍청한 짓이고."
루안은 반박하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제 손가락을 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너 말이야."
도윤이 일어서며 바지춤의 흙을 털었다.
"검이고 빛이고 따지기 전에 서 있는 꼴부터 엉망진창이야."
루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엉망이라니요! 저는 매일 아침 성기사단 연무장에서 기사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흉내도 냈습니다!"
"눈으로만 봤잖아."
"목검으로 하루에 천 번씩 내리치기 연습도 했습니다!"
아이는 자존심이 상한 듯 밑동을 박차고 일어섰다.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방금처럼 한번 서 봐. 검 없이 맨몸으로."
루안은 억울함을 증명하겠다는 듯 마당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는 양발을 바짝 붙이고 서더니 가슴을 내밀고 턱을 잔뜩 치켜들었다. 양손은 허리춤에서 칼자루를 쥔 시늉을 하며 부들부들 힘을 주고 있었다. 어깨는 귀에 닿을 만큼 솟아올랐고 숨소리는 얕아져 있었다.
성당 유리창에 그려진 영웅 기사의 그림을 그대로 베껴온 꼴이었다.
도윤은 다가가서 발을 뻗어 루안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툭 찼다.
"어, 어?"
루안의 몸이 맥없이 휘청거리며 옆으로 고꾸라졌다. 도윤이 재빨리 아이의 옷깃을 낚아채지 않았다면 또 흙바닥에 코를 박을 뻔했다.
"바람만 불어도 넘어갈 자세를 취해놓고 뭘 잘했다고 그래."
도윤은 루안을 똑바로 세워놓고 정강이를 가볍게 찼다.
"발 벌려. 어깨너비만큼. 네 골반 넓이보다 한 주먹 더. 앞발은 앞을 보고 뒷발은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둬."
도윤이 손으로 아이의 양발 위치를 잡아주었다.
"그리고 턱 집어넣어. 목을 그렇게 빼고 있으면 돌멩이 하나만 튀어도 목뼈 부러져."
"하지만 기사님들은 항상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그 사람들은 강철 갑옷을 입었으니까 그렇지. 넌 갑옷도 없고 말랐잖아. 그럼 네 뼈랑 근육이 버틸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지."
도윤은 루안의 어깨를 꾹 눌렀다.
"어깨 힘 빼. 숨을 배 아래로 내려. 땅바닥에 닻을 내린다고 생각해."
도윤이 가르치는 것은 거창한 유파의 비급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갱도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남기 위해 온몸으로 익힌 생존의 중심 잡기였다.
"체중을 발바닥 전체에 둬. 뒤꿈치에 칠십, 앞꿈치에 삼십. 땅을 딛는 거야."
루안은 시키는 대로 자세를 바꿨다. 무게중심을 낮추고 숨을 고르자 기묘한 감각이 찾아왔다.
망토가 저녁 바람에 펄럭였지만 아까처럼 몸이 흔들리지 않았다. 발바닥이 흙에 묵직하게 뿌리를 내린 것 같았다.
도윤이 다가와 루안의 어깨를 묵직하게 밀었다.
루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몸은 뒤로 넘어가지 않았다. 굽힌 무릎과 사선으로 뻗은 뒷다리가 충격을 땅으로 흘려보내며 제자리에서 버텨냈다.
루안이 번쩍 눈을 떴다.
"……안 넘어집니다."
"당연하지. 네 뼈가 버티게 서 있으니까."
도윤은 장작더미로 걸어가 목검을 집어 들었다.
"일단 서는 것부터 합격이야. 이제 검 잡아 봐."
루안은 도윤이 내미는 목검을 보며 머뭇거렸다. 푸른 눈동자에 두려움이 스쳤다.
"또…… 빛이 나면 어쩝니까?"
"빛 안 나게 잡으면 되지."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검만 쥐면 멋대로……."
"네가 검을 원수 대하듯이 쥐어짜니까 그렇지."
도윤은 목검 손잡이를 루안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얹어주었다.
"쥐지 마. 그냥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만 해."
루안이 침을 삼키며 손가락을 폈다.
"검은 주먹으로 으깨는 게 아니야. 새를 쥐듯이 쥐는 거야. 너무 세면 새가 죽고 너무 헐렁하면 날아가잖아."
"새…… 말입니까?"
"그래. 엄지랑 검지는 힘 빼. 넷째랑 새끼손가락으로만 손잡이 끝을 가볍게 감싸. 손바닥 안에 달걀 하나 들어갈 공간을 남겨두고."
도윤이 아이의 손가락을 짚어가며 쥐는 법을 잡아주었다. 루안은 숨을 죽인 채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구부렸다.
목검의 나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거스러미를 깎고 천을 감아준 덕에 거친 찔림은 없었다.
루안은 눈을 감고 기다렸다.
손가락이 굳어오는 저림도 파직거림도 없었다. 목검 끝은 그저 낡은 나무토막 그대로 어스름 속에 잠겨 있었다. 대신 손잡이를 감싼 헝겊 너머로 희미하고 따뜻한 미열만이 맥박처럼 조용히 전해졌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루안이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놀라움이 묻어났다.
"손도 안 굳고 빛도 안 납니다."
"힘을 안 줬으니까."
도윤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몸의 힘을 네가 다스리지 못하니까 검의 기운에 끌려다닌 거야. 연장을 다루지 못하면 제 연장에 찍혀 다치는 법이지."
루안은 제 손에 들린 목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신전의 대주교도 성기사단장도 루안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기도를 올리라 했고 성검에 순종하라고만 했다. 아무도 힘 빼는 법도, 서는 법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사악하다는 마왕이 다치지 않게 서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저…… 강도윤."
"왜."
"마왕은…… 원래 다 이렇게 가르칩니까?"
도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뭘 가르쳤다고 그래. 넘어지지 말라고 잔소리한 거지. 그리고 너 아직 밥값 다 안 했다."
"밥값은 아까 문짝을……."
"문짝 빗장 받침 찢어진 거 내일 아침에 새로 깎아야 해. 그거 네가 잡고 있어야 하니까 오늘은 얌전히 자."
도윤은 루안의 손에서 목검을 빼앗아 옆구리에 찼다.
숲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쌀쌀한 밤바람이 불었다.
"들어가. 밖에서 얼어 죽으면 내 마당만 지저분해져."
루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문턱을 넘었다.
도윤은 문을 닫기 전 숲의 어둠을 응시했다.
스스스…….
밤바람 소리 사이로 미세한 진동이 도윤의 귓가를 스쳤다. 마왕으로 각성한 뒤 예민해진 감각이 숲 바깥 먼 곳의 불길한 기척을 읽어내고 있었다. 낮에 던전 입구에서 기절시켰던 자들의 일일 수도 있고 수도에서 솟구쳤던 황금빛과 관련된 움직임일 수도 있었다.
'내일 당장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도윤은 한숨을 내쉬며 오두막 문을 닫았다. 무거운 의자를 문 앞에 바짝 끌어다 놓았다.
방 한구석 마른 짚 위에 두툼한 양모 담요를 던져주자 루안이 기어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날 겁니다."
담요 밖으로 고개를 내민 루안이 말했다.
"왜. 또 결투하자고?"
"아닙니다. 문짝 받침 깎는 거…… 도와드려야 하니까요."
도윤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등잔불을 껐다.
스승과 제자라는 이름은 아직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쓰러져가는 숲속 오두막의 밤은 조금 전보다 훨씬 포근하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