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마왕이 되었는데 용사가 내 제자4화

마왕이 되었는데 용사가 내 제자

마왕이 되었는데 용사가 내 제자

AD
스폰서 광고

4화: 지배 말고 숙제부터

어스름한 새벽안개가 오두막 판자 틈새로 스며들고 있었다.

도윤은 흙바닥에 깔아둔 낡은 짚자리 위에서 눈을 떴다. 밤새 숲 바깥에서 스쳐 지나가던 불길한 진동 탓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았군.'

도윤은 마른세수를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건너편 구석의 양모 담요는 이미 비어 있었다. 루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혼자 나갔나?'

그때 오두막 밖 흙마당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틈으로 내다보자 작은 그림자가 장작더미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루안이었다. 큰 흰 망토를 야무지게 걷어 올린 아이는 어제 뜯겨 나간 문짝의 빗장 받침으로 쓸 나무토막들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어제 가르쳐준 대로 어깨에 힘을 빼고 발을 딛는 모양새가 제법 진지했다. 나뭇가지를 주워 올릴 때마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도윤은 헛웃음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명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쇠말뚝이 박히는 듯한 격통이 터져 나왔다. 어제 봉인석을 깼을 때 심장에 박혀 들었던 마왕 아르그렌의 마력핵이 미친 듯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낮고 육중한 현악기 소리가 도윤의 등 뒤에서 허공을 찢었다. 짙고 차가운 어둠의 마력이 혈관을 타고 솟구쳤다.

"크윽……!"

도윤은 가슴을 움켜쥐며 엎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이마의 붕대 아래에서 짧은 흑색 뿔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서 오만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꽂혔다.

[제8대 계승자여, 첫 번째 칙령을 집행하라.]
[영역에 발을 들인 불경한 생명을 무릎 꿇려라.]
[주종의 낙인을 새겨 절대 복종에 묶어라. 첫 번째 종속 계약을 완성하라.]

'종속 계약이라고……?'

도윤의 턱이 덜덜 떨렸다. 마왕의 파괴적인 관성이 멋대로 깨어나 주인의 몸을 조종하려 들고 있었다.

도윤의 손끝을 중심으로 핏빛 마법진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붉은 빛줄기들이 바닥 판자를 태우듯 새겨졌다. 마왕의 본능이 오두막 밖의 유일한 생명체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루안이었다.


"으득…… 멈춰……!"

도윤은 이마의 뿔을 쥐어뜯듯 머리를 짓눌렀다.

마왕의 마력은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고 있었다. 계약을 억지로 취소하려 가슴을 누르자 역류한 마력이 폐를 찔러 피 맛이 치밀었다.

'억지로 끊으면 안 돼.'

마왕 권능은 일방통행이었다. 발동된 마법진을 강제로 터뜨리면 마력을 뿜은 도윤뿐만 아니라 목표물인 아이의 심장까지 파열될 터였다.

[제물을 복속하라. 영혼을 바치게 하라.]

마왕의 음성이 뇌리를 강타함과 동시에 핏빛 마법진이 문지방을 넘어 마당으로 뻗어나갔다.

쾅!

나무토막을 안고 있던 루안이 굉음에 놀라 문을 열어젖혔다.

"강도윤! 무슨 일…… 큭?!"

문이 열리자마자 뿜어져 나온 흑적색 마력 폭풍이 루안을 덮쳤다. 아이가 안고 있던 나무토막들이 허공으로 튀었다. 폭풍 같은 위압에 짓눌린 루안의 무릎이 흙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커헉……!"

붉은 덩굴들이 루안의 발목과 팔목을 뱀처럼 감아쥐었다.

"루안…… 엎드려……!"

도윤이 바닥을 기어가며 소리쳤다. 하지만 터져 나온 목소리는 수백 마리의 마수가 울부짖는 듯한 기괴한 공명음이었다.

루안은 숨이 막혀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푸른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었다. 하지만 루안은 어제 배운 대로 어깨를 웅크리고 발바닥으로 땅을 딛으려 안간힘을 썼다. 뼈마디가 삐걱거렸다.

"스…… 스승…… 아니, 마왕……!"

[거역하는 자의 사지를 부러뜨리고 영혼의 핵을 뽑아내라.]

마왕의 잔혹한 명령이 도윤을 집어삼키려 했다. 도윤의 오른손이 제멋대로 치솟아 루안의 이마를 겨누었다.

'빌어먹을 마왕 놈의 유산 같으니!'

도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던전에서 무너지는 기둥을 피할 수 없다면 지지대를 덧대어 궤도를 비틀어야 했다.

그 순간 봉인석이 깨질 때 스쳤던 기억 단편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계약 변형.'

마왕의 권능은 절대적인 칙령이지만 조항을 다시 쓸 수 있는 지배자의 재량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기할 수 없다면 내용을 뜯어고치면 된다.

'노예 계약? 개소리하지 마라.'

도윤은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튀어나오려는 고대 마왕의 주종 맹세를 입안에서 거칠게 비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도윤의 목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오른손에서 뿜어진 푸른 마력이 붉은 마법진의 핵을 꿰뚫었다. 오두막 안팎의 공기가 찢어질 듯 울부짖었다.

[선언하라! 주종의 조항을!]

마왕의 규약이 도윤의 혀를 강제로 움직였다. 도윤은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잡역부 생활 십 년 동안 뼈에 사무친 잔소리를 토해냈다.

"너는…… 내게……!"

원래 문장은 '내 발아래 무릎을 꿇고 영혼을 바쳐 복종하라'였다.

도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전혀 달랐다.

"너는 내게 배움을 청하며! 매일 아침 바른 자세로 서고 제때 세 끼 밥을 챙겨 먹을지어다!"

파지직!

고대 규약과 맞지 않는 생활 밀착형 단어가 끼어들자 허공의 룬 문자가 비틀거리며 터졌다.

[……규약 오류. 강제 집행 불일치. 수정을 거부……]

"시끄러워! 내가 마왕이잖아! 내 조항대로 적어!"

도윤은 뿔에 핏줄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다음 조항을 쥐어짜 냈다.

원문은 '주인의 명령에 목숨을 바치며 죽음으로 충성을 증명하라'였다. 도윤은 그 문장을 짓밟았다.

"수업 시간에 멍청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며! 몸이 아프거나 다치면 숨기지 말고 즉시 보고할지어다!"

"커헉……?!"

바닥에 눌려 있던 루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온 세상을 멸망시킬 듯한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마왕의 목소리가 하나같이 기가 막힌 내용뿐이었기 때문이다.

도윤의 마력핵이 터질 듯 뜨거웠다. 도윤은 멈추지 않고 마지막 벌칙 조항을 내질렀다.

원문은 '계약을 거역하거나 주인에게 칼을 겨눌 시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불지옥으로 떨어지리라'였다. 도윤은 그 저주를 박살 냈다.

"이를 어기거나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죽이려 할 시! 직접적인 살해는 절대 금지되며…… 숙제를 빼먹거나 땡땡이칠 시 벌 청소와 가벼운 마력 역류로 대가를 치를지어다!"

콰아아아앙!

오두막 지붕이 들썩거릴 만큼 거대한 파동이 폭발했다.

도윤의 임기응변이 마왕 권능의 시스템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붉은 마법진이 뒤틀리더니 맑은 청록색과 따뜻한 금빛으로 색을 바꾸었다. 주종 계약이 상호 보호의 사제 계약으로 강제 개조된 순간이었다.

[지배 계약이 '상호 구속 사제 계약'으로 재작성되었습니다.]
[피계약자의 최종 동의를 요구합니다.]

마왕의 목소리가 꺾이며 허공에 금빛 고리 두 개가 나타났다. 각각 도윤과 루안의 머리 위에 멈췄다.

도윤은 피를 뱉어내며 루안을 노려보았다.

"루안 베르! 내 가르침을 받고 함부로 개죽음당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느냐!"


루안은 멍하니 도윤을 올려다보았다.

마왕의 마력은 소년의 숨을 막히게 했다. 하지만 아이의 귀에 꽂힌 말들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다치지 마라. 밥을 먹어라. 죽지 마라.'

신전의 누구도 루안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어른들은 항상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 했고 피를 흘리라 했다. 그런데 눈앞의 마왕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계약을 뜯어고치고 있었다.

루안의 눈동자에서 두려움이 가셨다.

'이 자는 나를 죽이지 않는다.'

루안은 흙바닥을 딛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제 배운 대로 발을 벌리고 무게중심을 낮추어 섰다.

"저는 신전의 용사입니다!"

앳된 목소리가 마력의 폭풍을 뚫었다.

"마왕을 베라는 계시를 받았고 세상을 구해야 합니다!"

도윤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스승님께 배우겠습니다!"

루안은 가슴을 펴고 붉은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아 다치지 않고 살아남아서…… 반드시 스승님을 뛰어넘어 베어 넘기겠습니다! 맹세합니다!"

도윤은 기가 막혀 헛바람을 삼켰다. 제자로 들어오겠다면서 스승을 베겠다는 맹세를 얹다니. 하지만 계약 시스템은 그 순수한 진심을 완벽한 합의로 인식했다.

화아아아악!

금빛 고리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수축했다. 청록색 빛줄기가 오두막을 가득 채우더니 짓누르던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치이익.

도윤과 루안의 오른쪽 손목 안쪽에 따끔한 열기가 번졌다. 빛이 사그라들자 손목에 검은 선과 푸른 잎사귀가 얽힌 나침반 문양이 새겨졌다.

공명음이 마침내 끊겼다. 고요가 찾아왔다.

"허억…… 헉……."

도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루안도 털썩 주저앉아 헐떡이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문양은 아프지 않았고 미약한 온기가 감돌았다.

"……스승님?"

"스승님이라 부르지 마. 소름 돋으니까."

도윤이 벽에 기대며 손을 내저었다.

"방금 그건…… 마왕의 저주가 아닙니까?"

"저주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살려고 발버둥 친 거지."

도윤은 손목의 문양을 만졌다. 계약의 규칙들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첫째,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직접 살해할 수 없다. 살의를 품고 공격하면 문양이 마력을 역류시켜 공격자를 무력화한다.

둘째, 스승은 제자를 성실히 지도하고 위험에서 보호하며 제자는 스승의 수업과 과제를 이행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가벼운 마력 역류가 발생한다.

도윤은 혹시나 싶어 루안의 이마에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해보았다.

찌릿.

손목 안쪽에서 정전기 같은 통증이 스쳤다.

'진짜네. 상해도 못 입히게 막아놨어.'

도윤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배 계약을 피하려다 떼어낼 수 없는 찰거머리를 들인 꼴이었다.

루안은 손목을 비벼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럼 이제 진짜 사제 관계가 된 겁니까?"

"도장까지 찍혔는데 아니라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냐."

루안이 목검을 고쳐 매며 씩씩하게 물었다.

"그럼 오늘의 첫 수업은 뭡니까? 검술입니까? 마왕의 약점 파악입니까?"

도윤은 바닥에 흩어진 나무토막과 덜렁거리는 문짝을 가리켰다.

"일단 저 빗장 받침부터 깎아."

"……예?"

"그리고 마당 쓸고 밥 지을 물 길어 와. 수업은 밥 먹고 나서다."

도윤이 문을 열어젖히자 맑은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루안은 어리둥절해하다가도 씩씩하게 대답하며 뛰어나갔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도윤은 햇살 아래에서 허둥지둥 나무토막을 줍는 아이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이 되더니 이제는 신전의 용사를 제자로 키우게 생겼다.

숲 너머의 바람이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바깥세상이 이 기괴한 사제 관계를 언제까지 모른 척해줄지는 알 수 없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