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7화: 제국의 선발대
동문 성루로 이어지는 나선 계단은 가팔랐다.
현우는 숨을 고르며 돌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올랐다. 서쪽 암벽을 오르고 무거운 곡물 배낭을 날랐던 다리가 뻐근했다. 장갑 틈새와 손바닥에는 창고에서 묻혀 온 마른 보리 가루가 까끌까끌하게 남아 있었다.
뒤따라 계단을 박차고 오르는 제르엘의 검집이 벽에 부딪쳐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폐하 몸을 아끼셔야 합니다. 원정길의 여독도 풀지 못하셨습니다.”
“적은 우리가 밥 먹고 쉴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아.”
현우는 단호하게 대답하며 성루 문턱을 넘었다.
칼바람이 얼굴을 거칠게 때렸다.
성벽 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제르엘의 부관을 포함해 동문 수비를 맡은 서른 명의 정예병들이 흉벽에 바짝 엎드린 채 활시위를 당겨 쥐고 있었다.
“폐하 납시오!”
부관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현황은?”
부관이 손을 뻗어 동쪽 지평선을 가리켰다.
“국경 고개 너머에서 흙먼지가 치솟고 있습니다. 벌써 외곽 협곡 입구까지 도달했습니다.”
현우는 성벽 난간을 짚고 섰다. 차가운 화강암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동문 바깥은 험준한 암벽이 양옆으로 솟은 협착지였다. 국경 고개에서 마왕성으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두 개의 거대한 바위산 사이로 난 좁은 골짜기를 통과해야 했다.
지금 그 협곡 너머 평원에서 자욱한 먼지가 회오리치고 있었다.
두두두두!
대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성벽을 타고 전해져 왔다.
먼지구름을 가르고 선두 기마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군마들이 콧김을 뿜으며 거친 자갈밭을 짓밟았다. 기수들은 번쩍이는 강철 흉갑을 두르고 가슴팍에 커다란 은빛 방패를 메고 있었다.
장창 끝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현우의 눈에 들어왔다.
푸른 바탕 위에 붉은 날이 엇갈린 황금빛 태양 문양.
제르엘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루미나리스 제국의 성휘… 제국군입니다!”
군단장의 목소리에 살기가 서렸다.
“약탈자가 아닙니다. 제국 동부 변경 기사단의 정규 선발대입니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적의 대열을 훑었다.
전위에는 경기병 사십여 기가 활을 쥐고 넓게 퍼져 있었다. 그 뒤편에는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중장기병 이십여 기가 묵직한 마창을 세운 채 쐐기 진형을 유지했다.
총 육십여 기의 정예 기마대.
후방에는 장창 보병들과 함께 묵직한 바퀴가 달린 수레 서너 대가 따라붙고 있었다.
마왕성의 방어선을 단숨에 짓밟고 문을 부수기 위한 기습 공성 부대였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제국 선발대장 카이른은 고삐를 쥐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변경 초소에서 감지된 마왕성의 마력 격변과 서쪽 하늘의 기이한 백색 이변. 제국 상층부에서는 마왕 아스타로트가 내부 붕괴를 겪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눈앞에 펼쳐진 마왕성의 몰골은 그 첩보가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외벽 곳곳은 허물어져 잡초가 무성했고 성벽 위에서 파수를 보는 병력은 서른 명 남짓에 불과했다. 과거 대륙을 떨게 했던 마왕군의 위세는 온데간데없었다.
“괴물 놈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더니 정말이었군.”
카이른의 뒤에 선 부관이 창을 비껴들며 거들었다.
“외벽의 수호 결계도 빛을 거의 잃었습니다. 마왕의 마력이 고갈된 것이 분명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본대를 출진시키기 전에 우리 선발대가 먼저 둥지를 털어버린다. 마왕의 뿔을 잘라 바치는 자에게 백작위가 내려질 것이다.”
카이른은 장검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전위 경기병대! 성벽의 결계를 시험해라! 화망을 쏟아부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주어라!”
경기병 스무 기가 함성을 지르며 박차를 가했다. 말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성벽 전방 백보 지점까지 쇄도했다.
기수들이 능숙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기름 먹인 화살촉에 불꽃이 일제히 당겨졌다.
쐐애애액!
불화살 수십 발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을 뒤덮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방패를 치켜들며 웅크렸다.
화살 비가 성벽에 닿기 직전 허공에서 희미한 자줏빛 막이 일렁였다.
지지직! 콰아앙!
화살촉이 결계에 부딪치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화살들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지만 결계막 전체가 수면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성벽 외곽의 마력석 받침대에서 치이익 연기가 피어올랐다.
“결계가 버티지 못합니다!”
결계석을 지키던 병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축적된 마력이 바닥났습니다. 세 번 이상 화망이 겹치면 장벽이 깨집니다!”
부관의 낯빛이 잿빛으로 변했다.
서쪽 창고에서 하급 마력석 다섯 개를 막 들여왔지만 그롬이 성내 시설과의 호환성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당장 동문 결계에 끼워 넣을 마력원은 없었다.
경기병들은 결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칼을 두드리며 조롱했다.
제르엘의 손가락이 칼자루를 부러뜨릴 듯 쥐어졌다.
“폐하 제가 나가겠습니다. 성문을 열어 주십시오. 저 건방진 놈들의 목을 베어 피로 성벽을 적시겠습니다.”
제르엘의 붉은 눈에 짙은 살의가 번졌다.
군단장이 출진한다면 전위 경기병 몇은 단숨에 베어 넘길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현우는 손을 들어 제르엘의 어깨를 묵직하게 눌렀다.
“멈춰라 제르엘.”
“폐하! 놈들이 성벽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성문을 여는 순간 저놈들의 중장기병이 쐐기처럼 들이닥친다. 평원에서 기병과 맞붙으면 우리 병사 서른 명은 뼈도 못 추린다.”
현우의 목소리는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그의 시선은 적의 화려한 깃발이 아니라 그들이 딛고 선 지형을 훑고 있었다.
‘루미나리스 제국 변경군.’
현우는 머릿속의 기억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10년 동안 아카샤를 플레이하며 루미나리스 제국의 침공 퀘스트를 수백 번도 넘게 겪었다. 제국 기사단의 전술 패턴은 늘 한결같았다.
경기병으로 방어 결계의 내구도를 깎고 상대가 성문을 열고 튀어나오면 중장기병의 돌파력으로 압살한다. 만약 끝까지 농성하면 후방의 공성 수레로 성문을 박살 낸다.
전형적인 공략 루트였다.
지금 성안의 수비군은 고작 서른 명.
그롬과 모르칸 그리고 하인들까지 합쳐도 백스물아홉 명이 전부였다. 한 명이라도 무의미하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첫 번째 명령으로 선포했던 전원 생존 원칙은 빈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은 육십 기가 넘는 기병과 공성 수레를 거느리고 있었다. 정면 백병전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현우의 눈이 동문 앞의 좁은 협곡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마왕성 동문으로 들어서려면 양옆으로 깎아지른 검은 절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야 했다. 이른바 ‘송곳니 통로’. 말 두 필이 나란히 지나가기에도 벅찬 병목 지형이었다.
벽면에는 과거 길드 공성전 시절 설치해 두었던 방어 기믹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시스템의 자동 방어 장치는 꺼져 있었지만 바위틈에 박힌 쇠고리와 절벽 위 낙석 받침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부관.”
현우가 나직하게 불렀다.
부관이 떨리는 몸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외성의 쇠살창을 2선까지만 내려라. 성문은 닫아걸되 빗장에 그롬이 만든 밧줄과 쇠고리를 이중으로 걸어라.”
“성문을 닫고 버티시는 겁니까?”
“아니다. 적을 끌어들인다.”
현우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성벽 위의 투창과 쇠뇌는 허공에 낭비하지 마라. 협로 입구의 폭이 가장 좁아지는 세 걸음 구간에만 조준을 고정해라. 내가 신호를 내리기 전까지는 단 한 발도 쏘지 마라.”
부관의 눈이 커졌다.
“적을 협곡 안으로 들인단 말씀입니까? 만약 놈들의 중장기병이 문 앞까지 밀고 들어오면…”
“밀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제 발로 덫에 갇히는 거다.”
현우는 제르엘을 돌아보았다.
“제르엘 너는 성벽 좌측 암벽 통로로 내려가 대기해라. 내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 절벽의 빗장을 쳐서 낙석 통로를 열어라.”
제르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왕은 수세에 몰려 성문을 걸어 잠그려는 것이 아니었다. 적의 오만함을 꿰뚫어 보고 그들이 자신 있어 하는 돌격 진형을 가장 취약한 병목 지형으로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폐하께서는 이미 저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읽고 계신다!’
제르엘의 가슴속에 차오르던 불안감이 일순간에 벅찬 경외감으로 바뀌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제르엘이 군례를 올린 뒤 암벽 통로를 향해 그림자처럼 몸을 날렸다.
현우는 장갑을 벗어 흉벽에 올려놓았다. 손바닥에 묻어 있던 보리 가루를 털어내자 하얀 가루가 바람을 타고 성벽 아래로 흩날렸다.
식량을 지키기 위해 절벽을 기었다. 겨우 성안에 들여놓은 그 곡식을 약탈자들의 발굽에 짓밟히게 둘 수는 없었다.
“성문을 닫아걸고 숨었군!”
카이른은 마왕성의 외곽 쇠살창이 내려앉는 것을 보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결계가 약해지자 성벽 위의 병사들이 안쪽으로 물러서는 모습이 빤히 보였다. 저항 의지를 잃은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문을 닫는다고 살 수 있을 줄 아느냐!”
카이른은 마도 확성기를 꺼내 입에 가져다 댔다. 마력이 실린 거친 목소리가 동문 앞 협곡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성벽 위의 버러지들은 들어라! 나는 루미나리스 제국 동부 변경 기사단 선발대장 카이른이다!”
제국 기병들이 창을 부딪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너희의 가짜 왕 아스타로트는 이미 힘을 잃고 골방에 처박혀 떨고 있다! 마왕의 목을 베어 성문 앞에 내걸고 무릎을 꿇어라! 그리하면 너희 목숨만은 노예로 거두어 살려줄 것이다!”
적들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성벽을 때렸다.
성벽을 지키던 마왕군 병사들의 턱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때였다.
성벽의 흉벽 사이로 검은 망토를 두른 거대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망토가 바람에 거세게 나부끼며 바닥을 쓸었다. 흉갑 중앙의 칠흑빛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이 성벽 난간을 타고 뱀처럼 번져 나갔다.
투구 아래로 드러난 현우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순간 카이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조롱이 목구멍 안쪽으로 틀어박혔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왕의 눈빛. 그것은 궁지에 몰린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발밑을 기어 다니는 벌레를 내려다보는 절대자의 서늘한 시선이었다.
히히힝!
카이른이 타고 있던 군마가 거품을 물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뒤편 기병들의 말들도 불안하게 발을 구르며 뒷걸음질 쳤다. 마왕의 육체에 내재된 본능적인 위엄이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지 마라!”
카이른이 다급하게 고삐를 당기며 소리쳤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자가 아스타로트…! 마력이 고갈되었다는 보고는 거짓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황제에게 바칠 공훈이 눈앞에 있었다. 저 높은 곳에서 뿜어내는 마력이 아무리 위압적이라 한들 성벽 위의 군세는 고작 수십 명에 불과했다.
카이른은 공포를 억누르며 장검을 치켜들었다.
“허세다! 껍데기만 남은 괴물의 허장성세에 속지 마라! 전위 중장기병대 쐐기 진형을 갖춰라!”
철컥!
중장기병 이십여 기가 일제히 거대한 마창을 수평으로 눕히며 좁은 협곡 입구로 말을 몰았다. 그 뒤를 이어 경기병과 공성 수레가 뒤를 바짝 메웠다.
육십여 기의 기마대가 뿜어내는 돌격의 기세는 대지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발을 디딘 그 좁은 협곡이 두 번 다시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아가리라는 사실을.
현우는 흉벽 난간을 한 손으로 짚은 채 협곡 안쪽으로 빽빽하게 밀려드는 제국의 기마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하고 서늘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제 발로 들어왔군.”
성벽 아래에서 둔탁한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마왕의 결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