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6화: 고인물의 비밀 창고
갈고리가 바위틈을 물었다.
앞서 오른 척후가 밧줄을 두 번 당겼다. 현우는 발끝만 걸리는 좁은 턱에 몸을 붙였다. 갑옷이 암벽을 긁을 때마다 등 뒤로 돌가루가 떨어졌다.
아래에서는 아무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구름처럼 보이는 흰 공백이 집수정으로 이어지는 낮은 길을 삼키고 있었다. 현우는 아래를 보려던 다른 척후의 턱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앞사람 발만 봐.”
바크의 지도에 그어진 선은 손가락 하나 길이였다. 실제로는 네 사람이 갈고리를 옮겨 박으며 한참을 기어야 하는 절벽이었다.
현우의 흉갑이 바위 돌기에 걸렸다. 몸을 비틀자 발끝이 미끄러졌다. 팽팽해진 밧줄이 옆구리를 눌렀다.
“폐하!”
제르엘이 아래에서 허리를 받쳤다. 앞의 척후가 줄을 당기는 동안 현우는 다시 발판을 찾았다.
‘게임에서는 옆으로 한 번만 누르면 됐는데.’
그 한 걸음을 옮기고 나니 장갑 안쪽이 축축했다.
가장 좁은 턱을 건넌 뒤 척후들이 양쪽 바위에 갈고리 두 개를 남겼다. 귀환할 때도 잡을 수 있도록 밧줄을 팽팽히 걸었다. 남은 두 개는 제르엘의 허리에 매달렸다.
능선 끝에는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암벽이 있었다. 두 줄 사이에 원이 찍힌 보급 문양이 벽에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도착했다.”
현우는 가장 오른쪽 문양 앞에 쪼그려 앉았다.
튜토리얼 던전의 비상 보급소. 새 캐릭터를 만들 때마다 들렀던 곳이었다. 정면 입구의 늑대를 피하려면 암벽의 작은 원부터 눌러야 했다.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우는 문양에 붙은 마른 흙을 긁었다. 원 아래에 손톱 너비의 구멍이 드러났다. 다른 문양에는 없는 배수 구멍이었다.
“가는 가지 하나.”
척후가 건넨 가지를 밀어 넣자 굳은 흙덩이 뒤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한참 뒤 문양이 손바닥 아래에서 들어갔다.
철컥.
발치의 돌이 옆으로 밀려났다. 사람 하나가 숙여 들어갈 계단이 나타났다.
제르엘이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태고의 봉인이 폐하를 알아보는군요.”
현우는 진흙 묻은 가지를 내려다봤다.
“입구에 한 명 남아. 흰 경계가 어디까지 오는지 봐라.”
척후 하나가 암벽 바깥으로 몸을 돌렸다.
계단 끝에서 곰팡이 냄새가 끼쳤다.
통로 바닥에는 이삭을 새긴 돌판이 세 줄로 놓여 있었다. 맞은편 철문의 살창 너머에 보급함이 보였다. 벽에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이 촘촘했다.
‘왼쪽 두 칸. 오른쪽 한 칸.’
수없이 지나친 순서가 떠올랐다. 틀려도 체력이 조금 깎이는 초보자용 함정이었다.
현우는 발을 올리려다가 멈췄다. 벽의 구멍 아래에 녹물이 길게 말라붙어 있었다.
체력창은 없었다.
“물러서.”
그는 회수용 줄을 묶은 갈고리를 첫 번째 돌판에 던졌다. 돌판이 조금 내려앉았다가 돌아왔다. 두 번째도 같았다.
세 번째에 갈고리가 닿자 벽에서 쇳소리가 터졌다.
쐐액!
녹슨 쇠살이 통로를 가로질러 반대편 벽에 박혔다. 현우의 손등 위로 돌 부스러기가 튀었다.
제르엘이 그를 등 뒤로 밀었다.
“제가 뚫겠습니다.”
“벽을 부수면 저 상자도 묻힌다.”
현우는 갈고리를 당겼다. 돌판이 복귀하는 순간 옆 판까지 덜컥 움직였다. 제르엘의 시선도 같은 곳에 멎었다.
“균열이 있습니다. 오른쪽 판이 옆의 것에 걸려 있습니다.”
틀린 것은 순서가 아니었다. 안전한 발판 하나가 기울어 다른 장치를 누르고 있었다.
현우는 벽 아래의 좁은 턱을 봤다. 정비용 통로였다. 갑옷을 입은 몸으로는 걸을 수 없었지만 손과 무릎을 붙일 너비는 됐다.
“갈고리를 그 틈에 넣어. 줄은 당긴 채로.”
척후가 줄을 잡았다. 현우는 벽에 붙어 턱을 기어갔다. 아래로 늘어진 망토가 돌판에 닿을 때마다 팔꿈치에 힘을 더 주었다.
맞은편 벽에 손이 닿았다. 현우는 낮게 튀어나온 손잡이를 끝까지 당겼다. 벽 속에서 쇠살을 밀던 빗장이 드러났다.
“제르엘. 여기 고정해.”
군단장이 정비 턱을 넘어와 빗장 틈에 갈고리를 박았다. 현우가 손잡이를 놓자 철문이 천천히 올라갔다.
문 옆의 손바닥만 한 받침에는 뿌연 돌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아래에 이삭을 든 손이 새겨져 있었다.
보급이 끝날 때까지 문을 붙드는 장치였다.
“지나가.”
척후가 줄을 당겨 돌판 틈에 넣었던 갈고리를 회수했다. 빗장이 고정된 덕에 판은 움직여도 쇠살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제르엘에게 갈고리를 건네고 계단을 향해 외쳤다.
“창고 열렸다!”
입구의 척후가 대답했다.
“집수정 테두리가 안 보입니다! 흰 것이 이쪽으로 올라옵니다!”
보급함 안에는 금화도 마검도 없었다.
납작하게 눌러 포장한 볶은 곡물 스물네 묶음. 천 주머니 두 개. 구리 상자에 나란히 들어 있는 하급 마력석 여섯 개.
현우는 포장의 접힌 모서리부터 살폈다. 기름 먹인 종이에 벌레 구멍은 없었다. 봉랍도 갈라지지 않았다. 하나를 열자 마른 곡물이 부서지며 고소한 냄새를 냈다.
손가락 사이에서 가루를 비볐다. 눅눅하게 뭉치는 부분이 없었다. 나머지 묶음도 봉한 자리를 하나씩 확인했다.
초보자 지급품이었다. 사냥 보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가방부터 차지한다고 버리던 것들.
현우는 곡물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손바닥으로 받았다.
“배낭 열어.”
척후가 천 주머니를 풀었다. 작은 보리알들이 손바닥에 쏟아졌다.
“이것도 빻으면 죽을 끓일 수 있겠습니다.”
현우가 주머니 끈에 달린 나무패를 뒤집었다. 흙 위로 싹이 올라오는 그림 아래에 글씨가 남아 있었다.
파종용 보리.
“그건 따로 넣어. 씨앗이다.”
“곡식이 더 있는데 남겨 두시겠습니까?”
척후는 입을 다물었다. 잘못 말한 줄 알고 고개를 숙였다. 열린 곡물 포장 쪽으로 코끝이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현우는 그 손에 놓인 보리알을 집었다. 겉껍질 아래에는 익히지 않은 낱알이 단단하게 들어 있었다.
오늘 냄비에 넣으면 내일도 먹을 것을 찾아 절벽을 기어야 했다. 그렇다고 씨앗을 심는 즉시 빵이 열리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그동안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하는가.
그에게도 완성된 답은 없었다.
“먹을 것은 이쪽에서 챙긴다. 씨앗은 전부 가져가되 끓이지 않는다.”
현우가 포장된 곡물을 배낭 바닥에 놓았다. 그 위에 씨앗 주머니를 넣었다.
현우는 남은 곡물과 씨앗을 다른 배낭에도 나누었다. 한쪽 끈이 끊어져도 전부 잃지 않도록 마력석도 셋씩 갈랐다.
제르엘이 다른 배낭을 당겼다.
“폐하께서는 다음 군량까지 준비하시는군요.”
“싹이 나는지부터 봐야 해.”
그 말에도 제르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는 더 설명하는 대신 마력석을 천으로 감쌌다.
그때 바닥이 손바닥 한 뼘만큼 기울었다.
보급함이 벽으로 미끄러졌다. 현우가 막 배낭을 당겨 올린 자리에 흰 선이 번졌다. 바닥을 받치던 돌의 모서리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쿵!
열려 있던 철문이 어깨 높이까지 떨어졌다. 제르엘이 재빨리 문 밑으로 갈고리를 비스듬히 세웠다. 쇠가 휘는 소리가 났다.
“먼저 나가십시오!”
현우는 문 옆 받침을 봤다. 뿌연 돌이 쪼개져 가루를 흘리고 있었다. 기울어진 철문 옆에서 걸쇠가 잠금 홈을 긁다가 밀려났다.
‘잠금을 다시 걸면 돼.’
회수한 여섯 개 중 하나를 꺼냈다. 부서진 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꽂자 받침 위에 희미한 불이 들어왔다.
걸쇠가 다시 튀어나왔다. 잠금 홈에 반쯤 걸린 채 문이 멎었다.
제르엘이 받친 팔을 조금 내리자 걸쇠가 옆으로 밀렸다. 군단장이 이를 악물고 다시 들어 올렸다. 바닥이 기운 탓에 잠금이 온전히 맞물리지 않았다.
그러나 바닥의 흰 선은 계속 다가왔다. 이것은 문을 움직이는 연료일 뿐이었다.
“배낭부터 밀어!”
척후가 문 아래로 짐을 밀어냈다. 현우도 낮게 몸을 숙였다. 제르엘의 팔꿈치가 떨리고 있었다.
밑으로 기어 나온 현우는 문을 두 손으로 받쳤다.
“이제 너.”
“폐하께서 완전히 벗어나신 뒤에….”
“내가 잡고 있잖아.”
제르엘은 입을 다물고 빠져나왔다. 군단장이 갈고리를 잡아 뽑는 순간 문 옆의 마력석이 검게 갈라졌다.
현우가 손을 뗐다.
등 뒤에서 철문이 내려앉았다. 흰 선이 문턱의 먼지를 지워 버렸다. 함정 빗장에 박아 둔 갈고리는 두고 가야 했다.
계단에서 내려온 입구의 척후가 배낭 하나에 손을 뻗었다. 현우가 먼저 등에 멨다.
“너희 둘은 길을 봐. 짐은 우리가 든다.”
다른 배낭은 제르엘이 짊어졌다.
척후들은 남겨 둔 밧줄을 당겨 암벽에 붙었다. 네 사람이 절벽 턱으로 올라온 뒤 숨은 입구의 돌계단이 아래부터 사라졌다.
현우는 밧줄을 놓지 않았다.
등 뒤의 식량이 발을 옮길 때마다 묵직하게 흔들렸다. 척후들이 앞에서 매듭과 바위를 다시 확인했다. 좁은 턱을 다 건넌 다음에야 남겨 두었던 갈고리와 밧줄을 거뒀다.
성 쪽 배수로에 닿았을 때는 해가 머리 위에 있었다.
척후가 먼저 내려가 바위와 철창이 남아 있는지 확인했다. 올라오던 흰 경계는 아직 암벽 너머였다. 네 사람은 한 명씩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마지막으로 배수로 철창이 닫혔다.
현우는 안쪽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어깨가 쑤셨다. 그롬이 달려와 휘어진 갈고리를 받았다.
“힘을 많이 받았군요.”
“네 명을 데려왔다.”
그롬은 갈고리를 두 손으로 쥐었다. 다음에는 목을 더 두껍게 만들겠다며 휘어진 부위를 문질렀다.
하인 둘이 배낭을 하나씩 부축해 지하 창고로 옮겼다. 모르칸은 저울을 가져와 곡물 묶음의 무게를 달았다. 같은 정량을 여러 번 덜어 보더니 장부에 숫자를 적었다.
“지금 배급량이면 이틀을 더 버팁니다.”
“줄여 먹는 기준으로?”
“예. 백스물아홉 명 전원에게 같은 몫을 드리고도 그렇습니다.”
현우는 저울 옆에 놓인 씨앗을 모르칸 쪽으로 밀었다.
“이건 식량 장부와 나눠 적어. 심을 곳과 싹부터 확인한다.”
마력석 다섯 개는 그롬에게 건넸다.
“옛 창고의 문 하나는 움직였다. 성의 장치에도 맞는지 살펴봐.”
바크는 지도를 폈다. 척후가 손으로 짚어 주는 자리를 따라 집수정과 돌계단 위에 선을 그었다. 물자가 있던 방으로 돌아갈 길은 없어졌다.
모르칸이 뜯어진 첫 묶음의 부스러기를 그릇에 쓸어 담았다. 비어 있던 창고 선반에 다른 묶음이 하나씩 올라갔다.
현우는 그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복도 바깥에서 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폐하! 동문 감시대의 보고입니다!”
먼지를 뒤집어쓴 전령이 문틀을 짚었다.
“국경 고개에 기마대가 나타났습니다. 이쪽을 향해 창을 세우고 대열을 갖추고 있습니다!”
제르엘이 검집 위로 손을 옮겼다.
“표식은?”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현우는 벽에 기대 놓은 지도를 다시 폈다. 손가락이 서쪽의 지워진 길을 떠나 동쪽 고개에 멎었다.
“배급은 계속해.”
그는 제르엘과 함께 문을 나섰다.
동문으로 오르는 계단에서야 현우는 손바닥에 보리 가루가 묻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난간을 짚자 위쪽에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