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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5화

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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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첫 번째 명령

새벽안개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번졌다.

마왕성 대강당의 거대한 돌기둥 사이로 웅성거리는 숨소리가 낮게 깔렸다. 부서진 샹들리에 잔해 아래 모여 선 백스물아홉 명의 생존자들은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한 채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붕대를 감은 부상병들의 거친 숨소리.

아이를 품에 안은 하녀의 떨리는 어깨.

먼지를 뒤집어쓴 대장장이와 오크 일꾼들의 메마른 입술.

모두의 시선이 검은 흉갑을 두른 채 서 있는 현우에게 꽂혀 있었다.

밤새 성벽 위에서 파수를 서던 병사들의 입을 통해 소문은 이미 퍼진 뒤였다. 성 밖 서쪽 숲이 흔적도 없이 하얗게 지워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성안에 남은 식량이 겨우 사흘치뿐이라는 잔혹한 사실까지.

“폐하.”

단상 바로 아래에서 제르엘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병사들의 동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성벽을 지키는 마흔두 명의 병력만으로는 동문의 결계와 서쪽 숲의 감시를 동시에 유지하기 벅찹니다.”

은발 사이로 드러난 제르엘의 붉은 눈동자에는 서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싸울 수 없는 자들에게 귀중한 식량을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부상자와 하인들의 배급을 완전히 끊고 무기를 쥘 수 있는 병사들에게만 물자를 몰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채를 요새화하고 다음 전투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강당에 울려 퍼지는 순간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모르칸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하인들 틈에서 어린아이의 희미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의 어머니는 비명을 삼키며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공포는 삽시간에 강당 전체로 번져 나갔다.

버림받는다.

쓸모없는 자는 가장 먼저 잘려 나간다.

그것이 이 가혹한 세계에서 마왕군이 살아온 불문율이었다.

현우는 단상 위에서 천천히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모르칸이 작성한 사람 장부가 현우의 손가락 끝에 닿아 있었다. 백스물아홉 명. 병사 마흔둘, 하인과 기술자 쉬흔여섯, 부상병 열일곱, 어젯밤 창고에서 구출해 낸 대장장이 그롬과 일꾼 여섯, 그리고 제르엘과 모르칸.

게임 화면 속의 단순한 수치가 아니었다. 피를 흘리고 배고픔에 눈물을 글썽이는 진짜 목숨들이었다.

현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망토가 펄럭이며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강당 안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제르엘.”

현우의 목소리가 낮고 무겁게 울렸다. 마왕의 육체에 내재된 위엄이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예, 폐하.”

“너는 병사만 남겨 성벽을 지키면 이 성이 살아남을 거라 생각하나?”

제르엘이 숨을 삼켰다.

“무기를 들지 못하는 자는 짐이 될 뿐입니다. 식량이 바닥나는 순간 모두가 공멸합니다.”

“틀렸다.”

현우의 단호한 한마디에 제르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칼을 든 자만 남은 성은 요새가 아니라 무덤이다. 피를 흘릴 때 치료해 줄 의원이 없고 갑옷이 깨졌을 때 때워 줄 대장장이가 없으며 먹을 밥을 지어 줄 사람이 없다면 그 병사들은 누구를 위해 칼을 휘두르고 며칠이나 버티겠느냐?”

현우는 단상 아래 모인 백스물아홉 명을 한 사람씩 훑었다.

“짐을 덜어내기 위해 제 손발을 자르는 군주는 결국 굶어 죽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강당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10년간 아카샤를 플레이하며 수많은 영지전을 겪었다. 승리하는 길드와 망하는 길드의 차이는 단순했다. 전투 인원만 챙기며 내정을 버린 진영은 보급선이 끊기는 순간 자멸했다. 수리공, 제작자, 채집꾼까지 유기적으로 돌아가야만 장기전에서 살아남았다.

하물며 지금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한 번 죽은 주민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내 첫 번째 명령을 선포한다.”

현우의 선언에 강당 안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이 성에 속한 자 중 단 한 명도 버리지 않는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모르칸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늙은 오크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스쳤다.

“식량은 장부에 적힌 전원에게 똑같이 배급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하루 한 끼의 정량을 철저히 지켜 나눈다. 누구도 남의 몫을 빼앗을 수 없고 누구도 굶주린 채 방치되지 않는다.”

현우는 제르엘을 응시했다.

“우리의 제1목표는 농성이 아니다. 식량을 확보하는 작전이다. 사흘이라는 시한에 갇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성 밖에서 먹을 것을 찾아내 성안으로 끌어들인다.”

현우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지금부터 성안의 전원을 세 개의 조로 재편한다.”

현우는 모르칸의 장부를 펼쳐 들었다.

“제1조는 수비대다. 제르엘의 부관과 정예 병사 서른 명은 성벽과 동문의 결계를 지킨다. 불필요한 훈련은 전면 중단하고 체력 소모를 최소화하며 교대 경계를 엄수하라.”

“존명!”

성벽 수비를 맡은 척후 조장이 가슴을 치며 경례했다.

“제2조는 보급수리대다. 모르칸이 총괄한다. 그롬은 하역장에서 건져 올린 쇠붙이로 부서진 무기를 녹여 삽과 곡괭이 그리고 수레를 만들어라. 바크는 수로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점검하고 다친 하인들을 모아 붕대와 식수를 정리하라.”

대장장이 그롬이 수염을 바르르 떨며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의 명대로 쇠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도구로 바꾸겠습니다!”

바크 역시 목발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제3조.”

현우의 시선이 제르엘에게 닿았다.

“식량 탐색 원정대다. 나와 제르엘 그리고 길눈이 밝은 척후 둘이 직접 나선다.”

제르엘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직접 출진하신단 말씀입니까? 성 밖은 백지화의 침식이 진행 중이고 제국의 척후가 도사릴지도 모릅니다!”

“길을 아는 자가 나뿐이기 때문이다.”

현우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어젯밤 서쪽 숲 순찰탑 잔해에서 확인했던 오래된 보급 표식.

그것은 단순한 마왕군의 옛 문양이 아니었다. 10년 전 아카샤 오픈 초기 튜토리얼에서 초보 유저들이 거쳐 가던 숨겨진 비상 보급소의 진입 기호였다.

게임이 수많은 업데이트를 거치며 잊힌 지역이었지만 지형의 뼈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만약 그곳이 백지화에 삼켜지기 전이라면 유저들의 발길이 끊긴 채 봉인된 곡물 상자와 마력석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 비밀 통로의 위치와 함정 해제법을 아는 사람은 이 대륙 전체를 통틀어 고인물인 강현우 단 한 사람뿐이었다.

“서쪽 암벽 아래에는 침략자 놈들의 손이 닿지 않은 태고의 보급 저장소가 숨겨져 있다. 백지화가 그곳을 집어삼키기 전에 털어 와야 한다.”

강당 안이 술렁였다.

제르엘은 전율에 휩싸인 눈으로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태고의 비밀 저장소…!’

제르엘의 머릿속에서 마왕의 모든 행동이 거대한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왕은 단순히 하인들의 목숨을 가엾게 여겨 살려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성 밖의 숨겨진 보급 기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사흘이라는 절망적인 시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투원만을 남기는 단기적 생존이 아니라 성안의 모든 기술자와 노동력을 온전히 보존하여 식량이 확보되는 즉시 마왕성을 완벽한 생산 요새로 탈바꿈시키려는 원대한 군주의 안목.

‘역시 마왕 폐하께서는 이미 이 모든 파멸을 내다보고 계셨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장기판 너머의 미래를 홀로 짊어지고 계신 거다.’

제르엘은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충성심에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제르엘 폐하의 뜻을 온전히 받들겠습니다. 제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폐하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베어 넘기겠습니다!”

현우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뭔가 엄청나게 비장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만 어쨌든 말은 통했으니 다행이다.’

단상 아래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절망과 공포로 짓눌려 있던 그들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버려지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마왕이 직접 식량을 구해 오겠다는 약속이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명령은 하달되었다. 각자 맡은 자리로 흩어져 출발 준비를 하라.”


한 시간 뒤 내성 지하의 무기 수리 공방.

화덕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열기 사이로 망치질 소리가 쉼 없이 울렸다.

깡! 깡!

그롬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달아오른 쇠막대를 내리쳤다. 그 옆에서는 오크 일꾼 둘이 풀무질을 거칠게 당기고 있었다.

“폐하!”

현우와 제르엘이 공방으로 들어서자 그롬이 황급히 집게를 내려놓았다.

“원정대용 장비를 완성했습니다.”

그롬이 가죽 작업대 위에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부서진 창자루와 갑옷 조각을 녹여 만든 세 갈래 등반 갈고리 네 개와 질긴 가죽 끈으로 엮은 대형 수송 배낭 두 개였다.

“성안에 남은 쇠붙이 중 가장 질긴 놈들을 골라 두드렸습니다. 깎아지른 절벽이라도 단단히 박힐 겁니다. 배낭은 곡물 자루를 가득 채워도 찢어지지 않도록 이중으로 꿰맸습니다.”

현우는 갈고리를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손잡이 부분에 미끄럼 방지 홈까지 촘촘히 파여 있었다.

“훌륭하다. 공방을 수습하자마자 이런 걸 만들어내다니.”

“폐하께서 목숨을 살려 주신 대장장이의 손입니다. 이 정도는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롬이 가슴을 펴며 씩 웃었다.

그때 공방 문이 열리며 바크가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양피지 지도가 들려 있었다.

“폐하! 숲의 관측 결과를 정리했습니다.”

바크는 조심스럽게 지도를 작업대 위에 펼쳤다.

어젯밤 정찰한 서쪽 협곡과 집수정 그리고 흰 공백의 침식선이 붉은 먹선으로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서쪽 숲의 백지화는 협곡 바닥의 낮은 물길을 따라 서서히 차오르고 있습니다. 현재 속도라면 집수정 외곽 100보 지점까지 닿는 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크가 지도 한구석의 높은 바위 능선을 짚었다.

“하지만 상층부의 검은 암벽 지대는 아직 공백의 손길이 닿지 않았습니다. 협곡 바닥으로 가지 않고 능선 바위틈을 타고 올라가면 침식 지대를 우회하여 서쪽 산자락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현우는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바크가 짚은 암벽 루트는 과거 게임에서 유저들이 낙사 위험 때문에 기피하던 샛길이었다. 좁고 가파르지만 높은 고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지표면을 따라 낮게 깔리는 백지화를 피하기에는 최적의 경로였다.

“좋은 정보다 바크. 네 기록 덕분에 길을 잃지 않겠군.”

“황공합니다!”

바크의 얼굴이 벅찬 감정으로 달아올랐다.

준비는 끝났다.

현우는 제르엘을 돌아보았다. 제르엘은 가벼운 가죽 흉갑에 장검을 차고 등반용 밧줄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 뒤에는 성벽 수비대 중 가장 발이 빠르고 눈이 밝은 척후병 둘이 긴 단검을 찬 채 대기하고 있었다.

“가자.”

현우가 앞장섰다.


서쪽 내성 아래의 비밀 배수로.

차갑고 축축한 지하 바람이 통로를 타고 불어왔다. 배수로 철창 앞에는 모르칸과 몇몇 하인들이 나와 있었다.

모르칸은 손에 작은 양피지 주머니를 쥐고 있었다.

“폐하… 정량 배급에서 떼어 낸 마른 귀리빵 두 조각입니다. 원정길에 요기라도 하셔야…”

“필요 없다.”

현우는 모르칸의 손을 밀어냈다.

“그건 성안의 부상자들에게 먹여라. 내 몫은 비밀 창고에서 통째로 가져올 테니.”

모르칸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폐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단 한 톨의 곡물도 헛되이 쓰지 않고 성을 지키겠습니다.”

“성벽의 수비대에게도 전해라. 동문에 제국의 적이 나타나면 무리해서 맞서지 말고 결계 안쪽으로 물러서서 버티라고.”

“명심하겠습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철창 문을 밀었다.

끼이익 하는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서쪽 숲으로 이어지는 협곡의 입구가 열렸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훅 끼쳐왔다.

하늘은 아직 잿빛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동쪽 산등성이 너머로 붉은 여명이 번지고 있었다.

숲의 저편.

어젯밤보다 확연히 넓어진 순백의 공백이 숲의 나무들을 소리 없이 집어삼키며 아침 안개 속에서 섬뜩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물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절대적인 무(無).

시간은 많지 않았다.

사흘의 식량 고갈 시한 그리고 시시각각 성을 향해 기어오는 멸망의 백지화.

현우는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칠흑의 마력을 느끼며 검은 숲의 암벽 능선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출발한다.”

고인물 마왕의 첫 번째 생존 원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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