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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8화

섭종 직전, 망겜의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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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마왕의 위엄

말발굽 소리가 좁은 골짜기를 집어삼킬 듯 울려 퍼졌다.

두두두두!

양옆으로 깎아지른 검은 암벽 사이로 제국의 중장기병 이십여 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쇄도했다. 말과 기수의 몸을 감싼 두꺼운 강철 갑옷이 부딪치며 섬뜩한 마찰음을 뿜어냈다.

그 뒤를 이어 경기병 사십여 기와 거대한 충각을 실은 공성 수레 세 대가 협곡 안으로 밀려들었다.

“돌격하라!”

선두에 선 선발대장 카이른이 장검을 치켜들며 고함을 질렀다.

“성벽의 마왕은 껍데기뿐이다! 성문을 부수고 괴물의 뿔을 꺾어라!”

동문 앞 협곡 ‘송곳니 통로’는 마왕성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폭이 좁고 바위가 험준하여 본래라면 대규모 기병대가 함부로 들어설 수 없는 험지였다.

하지만 성문 쇠살창이 반쯤 내려앉고 결계가 흐려진 것을 본 카이른의 눈에는 탐욕만이 가득했다. 단숨에 성문을 짓밟으면 백작위가 제 손에 들어온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우는 성벽 난간을 짚은 채 그 광경을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선두 중장기병 이십 기. 후속 경기병 사십 기. 공성 수레 세 대.’

눈대중으로 세던 숫자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적의 대열은 좁은 통로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앞선 기병들이 속도를 낼수록 뒤따르는 수레와 보병들은 간격을 좁히며 병목 안으로 갇혀 들었다.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현우는 옆에 엎드려 신호를 기다리는 부관을 돌아보았다.

“준비해라.”

“예 폐하!”

부관이 떨리는 손으로 붉은 신호 깃발을 쥐었다.

현우의 시선이 적의 마지막 공성 수레를 향했다. 수레의 무거운 쇠바퀴가 협곡 입구 모퉁이를 막 통과했다.

적의 전 병력이 송곳니 통로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현우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지금이다.”

부관이 붉은 깃발을 성벽 바깥 허공으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동시에 성벽 좌측 절벽 틈새에 숨어 있던 제르엘이 묵직한 강철 레버를 내리쳤다.

바위틈에 단단히 박혀 있던 쐐기 빗장이 굉음과 함께 튕겨 나갔다.

쿠구구구궁!

대지를 쪼개는 듯한 파열음이 협곡 뒤편에서 터져 나왔다.

“무슨 소리냐!”

뒤따르던 경기병들이 질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협곡 입구 양쪽 절벽 상단에 얹혀 있던 거대한 암석 수십 덩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아아앙! 쿵! 콰르르릉!

집채만 한 바위들이 협곡 입구 바닥을 사정없이 짓이기며 무너져 내렸다. 자욱한 흙먼지가 치솟으며 하늘을 가렸다.

퇴로가 완전히 지워졌다.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거대한 벽을 이루었고 뒤편의 자갈길은 흔적도 없이 파묻혔다.

“뒤쪽이 막혔습니다!”

“입구가 무너졌다!”

후위에 서 있던 경기병들의 말들이 흙먼지와 진동에 놀라 거칠게 울부짖었다. 좁은 공간에서 말머리를 돌리려던 병사들이 서로 부딪치며 대열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동요하지 마라!”

선두의 카이른이 뒤를 흘겨보며 악을 썼다.

퇴로가 막혔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뒤로 물러설 수 없다면 남은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라! 성문을 뚫고 들어가면 저 바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중장기병대 전방 돌격!”

카이른의 채찍질에 거대한 군마들이 다시 속도를 높였다.

전방 오십 보 앞.

마왕성 동문 외곽 쇠살창이 굳게 내려져 있었다. 그 뒤편의 성문 빗장에는 굵은 밧줄과 쇠고리가 이중으로 감겨 있었다.

중장기병 이십여 기가 일제히 마창을 앞으로 겨누었다. 쇠살창을 부수고 단숨에 문을 짓밟을 기세였다.

성벽 위에서 부관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폐하 쇠뇌를 발사할까요!”

“아직이다.”

현우는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거리 사십 보. 삼십 보.

통로의 폭이 급격하게 좁아지며 말 두 필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병목 구간에 선두 기병들이 들이닥쳤다.

현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사람이나 말을 직접 맞히지 마라.”

“예?”

부관이 얼빠진 표정으로 마왕을 쳐다보았다.

“화살을 바닥으로 쏴라. 말발굽 앞 세 걸음 지점의 자갈바닥만 노려라.”

현우는 단호하게 명령했다.

“쏴라!”

“발사!”

부관의 호령과 함께 성벽 흉벽 뒤에 도열해 있던 서른 명의 정예병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텅! 텅! 쐐애애액!

강철 쇠뇌살 수십 발과 묵직한 투창들이 허공을 가르고 곤두박질쳤다.

목표는 기병들의 갑옷이 아니었다.

말발굽 바로 앞 바닥에 깔린 굵은 자갈과 암반이었다.

콰직! 쨍그랑! 콰아앙!

돌바닥에 처박힌 강철 화살촉들이 불꽃을 튀기며 자갈을 사방으로 깨뜨렸다.

돌 파편들이 빗발치듯 튀어 오르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좁은 절벽 통로 안에서 울려 퍼진 굉음은 일반 평원의 열 배가 넘는 메아리로 증폭되었다.

히히히힝!

선두 군마들의 눈이 뒤집혔다.

귓전을 찢는 쇳소리와 발밑에서 튀어 오르는 자갈 파편에 놀란 말들이 거품을 물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진정해라!”

기수들이 고삐를 필사적으로 당겼지만 좁은 협곡에서 극도의 공포에 질린 짐승은 통제할 수 없었다.

선두의 말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고꾸라졌다.

쿵!

철갑을 두른 거마가 쓰러지자 뒤를 따르던 두 번째 기병이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 넘어졌다.

콰당탕!

“크악!”

“피해라! 멈춰라!”

비명과 말 울음소리가 뒤엉켰다.

시속 수십 킬로미터로 질주하던 중장기병들의 쐐기 진형은 순식간에 자체 붕괴로 이어졌다.

앞선 기병들이 바닥에 뒹굴며 방벽처럼 통로를 가로막았고 뒤따르던 기병들은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연쇄적으로 곤두박질쳤다.

말들은 서로의 다리를 짓밟으며 비명을 질렀고 기수들은 무거운 판금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흙먼지 속에 처박혔다.

단 한 발의 살상용 화살도 쓰지 않았다. 지형의 반향과 군마의 본능을 이용해 육십여 기의 기마대를 무력화한 것이다.

성벽 위의 수비병들은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말도 안 돼… 화살 몇 발로 기병대가…”

부관의 목소리가 경외감으로 떨렸다.

피를 흘리며 적과 칼을 맞댈 필요조차 없었다. 마왕이 지시한 세 걸음 앞의 자갈밭은 적들에게 그 어떤 칼날보다 잔혹한 덫이 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놈들!”

카이른은 쓰러진 군마 밑에서 가까스로 몸을 빼냈다.

투구가 벗겨진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입안 가득 흙먼지와 피비린내가 씹혔다.

사방을 둘러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랑하던 중장기병대는 말과 갑옷이 뒤엉켜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후방의 경기병들은 낙석에 막혀 벌벌 떨고 있었다.

공성 수레는 쓰러진 병사들과 말들 때문에 한 뼘도 나아가지 못했다.

완벽한 패배였다. 애초에 전투조차 성립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가 고작 저런 성벽에 농락당했단 말인가!’

치욕과 분노가 카이른의 이성을 집어삼켰다.

그는 허리춤에서 푸른 보석이 박힌 마검을 뽑아 들었다. 제국 황실에서 하사받은 가보이자 변경 기사단장의 상징이었다.

“아스타로트!”

카이른이 핏발 선 눈으로 성벽 위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비겁하게 쥐새끼처럼 숨어서 장난질을 치느냐! 제국의 기사를 모욕한 죄를 네놈의 피로 씻어내겠다! 내려와라! 나와 정면으로 승부해라!”

카이른이 검신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서릿발 같은 푸른 냉기가 칼날을 타고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성벽 흉벽 난간 위에 서 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바람이 멎었다.

협곡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말들의 비명과 병사들의 신음이 뚝 그쳤다.

돌계단을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마왕 아스타로트가 성벽 난간을 딛고 허공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칠흑의 마력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스으으으.

성벽의 검은 벽돌을 타고 내려온 짙은 어둠이 협곡 바닥으로 번져 나갔다.

대낮의 햇빛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푸른 하늘이 먹구름에 짓눌린 듯 어두워졌고 협곡 안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카이른의 숨이 턱 막혔다. 검을 쥔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현우의 붉은 안광이 카이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감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수많은 레이드 파티를 전멸시켰던 최종 보스 멸망의 마왕 아스타로트. 그 육체에 깃든 절대적인 마력과 위압감이 마왕의 의지를 타고 해방된 것이었다.

카이른이 쥐고 있던 마검의 푸른 서릿발이 칠흑의 어둠에 닿는 순간 치이익 소리를 내며 흔적도 없이 꺼져 버렸다.

“큭…”

카이른은 무릎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버텨야 했다. 무릎을 꿇는 순간 제국 기사로서의 모든 것이 끝장난다.

하지만 대기를 짓누르는 중압감은 뼈마디를 부러뜨릴 듯 무겁게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성벽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릎 꿇어라.”

쿠웅!

단 세 글자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왕의 권능인 언령이 실린 진동이었다. 공기를 찢고 내려온 절대자의 명령이 협곡 안에 갇힌 모든 이들의 고막과 뇌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콰아아앙!

바닥에 쓰러져 있던 군마들이 일제히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경기병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들은 마왕을 올려다보지도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떨었다.

카이른의 다리가 꺾였다.

쿵!

두 무릎이 차가운 자갈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아아…”

카이른의 입에서 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일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어깨 위에 산이라도 얹힌 듯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그의 목덜미에 서늘하고 날카로운 감촉이 닿았다.

차디찬 은빛 장검.

암벽 통로를 타고 내려온 제르엘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카이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라.”

제르엘의 목소리는 얼음 송곳 같았다.

“감히 마왕 폐하의 존안을 더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지 마라.”

카이른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침묵이 협곡을 지배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채 자욱한 흙먼지만이 바닥을 굴렀다.

성벽 위에서 현우는 난간을 짚고 아래를 굽어보았다.

속으로는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먹혔다.’

언령 스킬이 현실에서 어떻게 발동할지 내심 반신반의했다. 만약 통하지 않았다면 난전을 벌여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마왕의 육체에 각인된 위압감과 언령은 상상 이상이었다. 칠흑 마력이 협곡의 갇힌 지형과 맞물려 적들의 전의를 완벽하게 분쇄했다.

단 한 명의 마왕군 병사도 다치지 않았다.

성벽 위의 서른 명은 쇠뇌를 쥐고 숨을 삼키며 마왕의 뒷모습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마왕에 대한 무한한 숭배와 경외가 가득 차 있었다.

현우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소리에 다시 한번 낮고 묵직한 무게를 실었다.

“제국의 기사여.”

현우의 말이 협곡에 울려 퍼졌다.

카이른은 땅바닥에 이마를 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너희는 굶주림과 쇠락을 틈타 이 성을 유린하려 했다.”

카이른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이제 목이 잘려 성문에 걸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제르엘 역시 검에 힘을 주며 마왕의 처형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현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카이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무기를 버려라.”

현우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칼을 내려놓고 투항하는 자에게는 무의미한 피를 묻히지 않는다.”

카이른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마왕의 붉은 눈동자에는 잔혹한 살육의 갈증 따위는 없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군주의 냉철함과 흔들리지 않는 질서만이 깃들어 있었다.

죽이지 않는다. 항복하면 살려준다.

그 단순한 자비가 카이른의 남아 있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카이른의 떨리는 손가락에서 마검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챙그랑!

마검이 자갈바닥을 구르는 맑은 쇳소리가 협곡의 침묵을 깼다.

그 소리를 신호로 협곡에 엎드려 있던 제국 기병들이 앞다투어 무기를 던지기 시작했다.

챙그랑! 철컥! 콰당탕!

장창과 활 그리고 단검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쌓여 갔다.

육십여 기의 정예 선발대가 단 한 사람의 마왕 앞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된 것이다.

제르엘이 칼을 거두며 감격에 찬 눈으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의 대군을 굴복시킨 마왕의 위엄. 그것은 과거 무자비하게 적을 찢어 죽이던 파괴의 군주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숭고한 지배자의 모습이었다.

“폐하의 자비에 경배를!”

제르엘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성벽 위에서도 부관과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부딪치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마왕 폐하 만세!”

“위대하신 폐하 만세!”

현우는 난간에서 손을 뗐다. 겉으로는 위엄 넘치는 표정을 유지했지만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일단 첫 고비는 넘겼다.’

아군 피해 0명. 적 선발대 전원 생포.

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성안의 식량은 사흘치에 원정으로 구한 이틀분을 합쳐 겨우 닷새분.

그런 상황에서 육십 명이 넘는 제국군 포로가 한꺼번에 굴러떨어졌다.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현우의 머릿속에서 게이머의 차가운 계산이 다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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