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8화: 라온 길드의 위기
강도현은 푹신한 베개에 등을 기대고 앉아 휴대전화 화면을 두드렸다.
화면 속에서는 인터넷 방송인이 신작 RPG 게임의 보스 몬스터를 잡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패턴이 세 번이나 반복됐는데 왜 정면으로 들어가지? 멍청하군."
도현은 협탁에 놓인 감자칩을 집어 입에 넣었다.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짭짤한 기름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문받침으로 쓰던 헬하임의 잡석 하나를 처분했을 뿐인데 통장에는 여전히 11,980,400원이라는 든든한 숫자가 찍혀 있었다. 이 정도면 한동안 귀찮게 밖으로 나돌아 다닐 필요도 없었다. 초고속 와이파이는 끊김 없이 빵빵했고 전기장판은 등허리를 알맞게 덥혀 주었다.
그야말로 마왕이 꿈꾸던 완벽한 안식이었다.
하지만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이 오후 6시를 넘어가면서 도현의 눈썹이 잘게 꿈틀거렸다.
"늦는군."
어제 낮 치킨을 게걸스럽게 뜯어먹던 옆집 여자 윤서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제가 돌아와서 살게요. 이번에는 수당도 나오니까.'
'약속했다.'
'네. 약속.'
닭다리까지 마주 부딪치며 확인한 엄연한 계약이었다. 마계에서 군주 간의 맹약은 어길 시 영혼을 담보로 삼는 법이었다. 닭다리를 걸고 한 약속 역시 그에 못지않은 무게를 지녀야 마땅했다.
도현은 슬리퍼를 끌고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2층 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옆집 문 앞바닥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아침 일찍 들리던 분주한 발소리와 덜그럭거리던 장비 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도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통화 목록에서 윤서연의 번호를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안내 음성이 나오기도 전에 통화를 끊었다.
게이트 내부에 들어가면 현대 통신망의 전파가 차단된다는 사실쯤은 도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C급 게이트의 일반적인 공략 시간은 길어야 서너 시간 안팎이라고 서연 본인이 설명했었다. 아침 9시에 출발했으니 아무리 늦어도 오후 3시에는 바깥으로 나왔어야 정상이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요란한 경보음을 토해냈다.
[긴급 재난 문자]
[대한헌터협회 안내] 금일 15시 40분경 한강북구 솔내 채석장 소재 C급 게이트 내부 마력 파동 이상 급증. 반경 1km 구간 통행을 제한하오니 인근 주민께서는 즉시 우회하시기 바랍니다.
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솔내 채석장?"
어제 서연이 닳아빠진 장갑으로 펼쳐 보여주었던 정찰 보고서가 떠올랐다. 분명 첫 장에 파란 잉크로 '이상 없음'이라는 도장이 쾅 찍혀 있었다.
"이상 없다더니 마력이 치솟아?"
약속된 공짜 저녁을 떼먹히는 것은 결코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어제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찌그러진 삼각김밥을 만지작거리던 서연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길드원들 수당을 챙겨주겠다며 눈을 반짝이던 꼴이 퍽이나 필사적이었던 탓이다.
"기껏 밥을 먹여 놨더니 엄한 곳에서 마수 밥이 되겠다고?"
도현은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검은 후드티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 속에는 먹다 남은 감자칩 봉지가 바스락거리며 들어찼다.
솔내 채석장은 도심 외곽의 버려진 화강암 채굴장이었다.
거친 비포장도로를 지나 채석장 입구에 다다르자 노란색 바리케이드와 협회 순찰차 세 대가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붉은 경광등이 흙먼지 낀 바위벽을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다.
"차량 통제선 더 뒤로 물려! 마력 파동이 간헐적으로 C급 상한선을 치고 있어!"
협회 요원 하나가 무전기를 귀에 댄 채 악을 썼다.
도현은 후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무너진 바위 그늘 뒤에 멈춰 섰다.
채석장 바닥 한가운데 깎아지른 절벽 틈새에 게이트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보통 C급 게이트는 맑고 푸른빛을 띠며 고요히 회전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게이트는 달랐다.
가장자리가 피처럼 검붉은 암적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소용돌이 표면에서는 불길한 마력 파편들이 타닥거리며 튀어 올랐다.
골목길 변전소를 마비시켰던 그 불쾌하고 조잡한 주술의 잔향이 바람을 타고 미세하게 풍겨왔다.
도현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이 냄새는……."
협회 차량 쪽에서 신경질적인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선발로 들어간 라온 길드는 아직 소식 없어?!"
"내부 통신 중계기 신호가 두 시간 전에 완전히 끊겼습니다! 내부 차원 왜곡이 심해서 탐지기도 먹통입니다!"
"젠장 기동조사팀은 어디까지 왔어?!"
"퇴근 시간 정체에 걸려서 북문 환승역을 이제 막 지났답니다. 현장 도착까지 아무리 빨라도 40분은 더 걸립니다!"
"40분?! C급 상한을 넘긴 이상 변이 상태인데 A급 길드장에 B급 둘이서 어떻게 40분을 버텨?! 들어가면 뼈도 못 추려!"
요원들이 발을 구르며 욕설을 짓씹었다.
도현은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인간들의 행정 처리와 출동 속도는 마계의 굼벵이보다도 답답했다. 저들이 지원군을 끌고 도착할 때쯤이면 옆집 여자는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을 터였다. 시체는 도현에게 치킨을 사줄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직접 가야 한다는 소리로군."
도현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발끝에서 가느다란 마력의 장막이 퍼져 나가며 그의 존재감을 주변 풍경 속으로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마왕의 기척 은폐술이었다.
협회 요원들이 무전기를 붙잡고 언성을 높이는 바로 옆을 지나쳤지만 누구도 허공을 가르는 미세한 바람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도현은 붉은빛을 뿜어내는 게이트의 소용돌이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갔다.
채석장 게이트 내부는 거대한 지하 동굴이었다.
붉은 석탄재와 유황 냄새가 섞인 매캐한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콰아앙!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묵직한 바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큭……!"
한도윤이 온몸의 체중을 실어 강철 대형 방패를 지탱했다. 거대한 괴수가 휘두른 꼬리가 방패 표면을 강타하며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도윤의 두 발이 진흙 바닥을 길게 긁으며 뒤로 밀려났다.
"도윤 씨!"
배지훈이 바위 뒤에서 튀어나오며 활시위를 당겼다. 시위에 메겨진 마력 화살 두 발이 날카로운 풍절음을 내며 괴수의 무릎 관절을 꿰뚫었다.
하지만 괴수는 주춤거리지조차 않았다.
크르르르!
검붉은 흑요석 갑각으로 온몸을 뒤덮은 변종 마수들이었다. 늑대와 하이에나를 흉측하게 섞어 놓은 듯한 놈들의 눈은 핏빛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관절에 화살이 박혔음에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놈들은 턱을 쩍 벌리며 침을 흘렸다.
"안 먹혀요! 일반 C급 카르카스가 아니에요! 상처를 입어도 멈추질 않아요!"
배지훈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윤서연은 닳아빠진 장갑을 낀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맹렬한 불꽃이 솟구치더니 이내 굵직한 화염 창 세 자루로 응축되었다.
슈우웅! 쾅!
화염 창이 쇄도하던 변종 마수 세 마리의 가슴팍을 정확히 꿰뚫고 폭발했다. 마수들이 불길에 휩싸이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쓰러진 마수들 뒤로 대여섯 마리가 바위벽을 타고 미친 듯이 쏟아져 내렸다.
"퇴로 쪽은 어때요?! 잔해를 치울 수 있겠어요?!"
서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도윤이 부서진 방패를 고쳐 쥐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협곡 입구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어요! 최소 서너 시간은 곡괭이질을 해야 틈이 날 수준입니다!"
"젠장…… 정찰 보고서에는 분명 안전 통로라고 적혀 있었는데……!"
서연의 시선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부러진 깃발에 닿았다.
협회 공인 정찰대가 안전 경로임을 확인하고 꽂아 두었던 표식 깃발이었다. 하지만 그 깃발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강제로 뽑혀 흙바닥에 짓밟혀 있었다.
그리고 깃발이 뽑힌 바위 틈새에는 낯익은 물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원 안에 세 개의 뿔이 음각된 기괴한 검은 돌.
돌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파동이 동굴 벽면을 타고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며 마수들의 뇌수를 조종하고 있었다.
서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저건…… 한강북로 변전소에 박혀 있던 그 마왕교의 돌……?!"
자연 발생한 게이트 변이가 아니었다.
마왕교의 광신도들이 정찰 표식을 조작하고 이 깊은 동굴 안에 인공 주술석을 박아 라온 길드를 통째로 몰살시키기 위해 파놓은 악랄한 함정이었다.
"크아아악!"
도윤의 방패가 한계에 다다랐다.
우두머리급으로 보이는 거대한 변종 마수가 앞발로 방패를 후려치자 강철 방패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며 우그러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도윤이 피를 토하며 바위벽으로 나가떨어졌다.
"도윤 씨!"
배지훈이 단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지만 다른 마수가 휘두른 꼬리에 맞아 어깨를 뜯기며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전위와 후위가 모두 무너졌다.
"저리 가! 저리 꺼져!"
윤서연이 눈을 부릅뜨고 양손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거대한 불의 장벽을 이루며 부상당한 길드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화르르륵!
맹렬한 불길이 치솟자 쇄도하던 마수들이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서연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이미 연속된 전투로 마나 회로부터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검은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한 마력이 동굴 내부의 정상적인 마나 순환을 방해하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안 돼…… 여기서 내가 쓰러지면 둘 다 죽어…….'
서연은 떨리는 손가락을 꽉 쥐었다.
닳아빠진 가죽 장갑 틈새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길드원들의 수당을 챙겨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아침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확인했더라면 이런 끔찍한 함정에 팀원들을 끌고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스스스스……
화염벽의 높이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다.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염 너머에서 변종 마수들의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서연을 응시했다. 놈들은 불길이 사그라드는 찰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불꽃이 바닥으로 잦아든 순간.
크아아아앙!
우두머리 마수가 거대한 몸집으로 허공을 갈랐다.
시커먼 발톱이 서연의 가슴팍을 향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피할 힘도 막아낼 마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연은 질끈 눈을 감았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문득 어제 오후의 따스했던 햇살이 스쳐 지나갔다.
바삭한 치킨을 건네주며 무심하게 툭 던지던 옆집 남자의 얼굴.
'내일 저녁에는 와라. 오늘 산 것과 다른 맛도 있다.'
'제가 돌아와서 살게요.'
'약속했다.'
'죄송해요 도현 씨…….'
서연의 눈꼬리에서 가느다란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치킨값을 갚기는커녕 낯선 던전 밑바닥에서 마수의 먹이가 되어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서연의 살을 찢어야 할 날카로운 발톱은 끝내 닿지 않았다.
정적.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포효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던 불씨 소리조차 얼어붙은 듯 멎어버렸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감았던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의 숨이 멎었다.
허공에서 자신을 덮쳐 누르려던 거대한 우두머리 마수가 공중에서 그대로 굳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있었다.
놈은 일어서지 못했다. 아니 일어서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우두머리 마수는 시커먼 주둥이를 흙바닥에 바짝 처박은 채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거대한 등가죽이 경련하며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딱딱거리고 울렸다.
우두머리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수십 마리의 변종 마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네 다리를 꺾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인간의 살점을 뜯어먹으려 번들거리던 붉은 눈동자들에는 형언할 수 없는 극심한 공포만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먹이사슬의 아득한 정점에 선 절대적인 포식자가 눈앞에 강림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대체 무슨……?"
쓰러져 있던 도윤과 지훈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닥을 기는 마수들을 바라보았다.
공기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지하 공동 전체의 기압이 수백 배로 치솟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동굴의 모든 숨결을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은 서늘한 위압감이 영혼을 조여왔다.
그리고 저 높은 곳.
동굴 천장 부근 채석장의 거대한 바위 암벽 위에 누군가 걸터앉아 있었다.
검은 후드 모자를 푹 눌러쓴 실루엣.
그는 다리를 허공에 늘어뜨린 채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바스락거리며 꺼내 입에 넣고 있었다.
바삭.
정적을 깨뜨리는 경쾌한 소리가 기괴하리만치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도현은 먹다 남은 감자칩 봉지를 접어 후드티 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었다.
그의 시선이 암벽 아래 깊숙이 박힌 채 붉은빛을 뿜어내던 검은 돌에 닿았다.
"남의 저녁 약속을 방해한 놈이 네놈들이냐?"
인간들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는 서늘한 음성이 마력의 파동을 타고 마수들의 뇌수 속으로 직접 내리꽂혔다.
후드 그늘 속에서 번뜩인 도현의 눈동자가 핏빛보다 짙은 암흑의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