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9화: 밥값은 하는 마왕
동굴 안은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조금 전까지 고막을 찢을 듯 울리던 괴성과 쇄도하던 마수들의 발소리가 한순간에 멎었다.
흙먼지가 이는 바닥에는 기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인간을 찢으려던 우두머리 카르카스는 시커먼 주둥이를 축축한 진흙에 처박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거대한 등가죽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며 앙상한 갈비뼈가 덜덜거리는 소리만 희미하게 메아리쳤다.
우두머리뿐만이 아니었다. 바위벽을 타고 내려오던 변종 마수 수십 마리가 일제히 네 다리를 꺾고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시퍼런 혓바닥에서는 침이 줄줄 흘렀고 핏빛 눈동자는 극심한 공포로 허얗게 뒤집혔다.
"이게…… 도대체……."
윤서연은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닳아빠진 가죽 장갑 틈새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던 거대한 앞발은 눈앞 한 됫박 거리에서 굳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살았다. 하지만 안도감보다 먼저 밀려온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위화감이었다.
"도윤 씨…… 지훈 씨…… 괜찮아요?"
서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위벽에 기댄 한도윤은 깨진 강철 방패 조각을 쥔 채 넋이 나간 얼굴로 마수들을 응시했다. 부러진 갈비뼈 탓에 밭은기침을 토할 때마다 피거품이 번졌다.
"저놈들이…… 왜 저러는 겁니까? 공격하지 않고 바닥에 머리를 박고……."
배지훈 역시 뜯겨 나간 어깨를 틀어쥔 채 헛숨을 들이켰다.
"마왕교의 주술석이 오작동한 건가요? 아니면…… 더 끔찍한 존재가 나타난 겁니까?"
동굴 내부의 공기는 얼어붙을 만큼 무거웠다. 억겁의 세월 동안 수억의 생명을 짓밟아온 절대적인 군주가 어둠 속에서 숨을 쉬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저 높은 천장 암벽 위.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강도현은 주머니 속 감자칩 봉지를 작게 바스락거렸다.
도현은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인간들의 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탱커는 피를 토하고 있었고 정찰수는 과다출혈로 안색이 잿빛이었다.
윤서연은 더 심각했다. 무리하게 화염벽을 펼친 탓에 마나 회로가 시커멓게 타들어가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저대로 십 분만 두면 목숨이 위험했다.
도현의 눈썹이 잘게 꿈틀거렸다.
"기껏 닭다리까지 맞대며 약속을 체결해 놨더니 여기서 시체가 되면 내 저녁은 어쩌라는 거지?"
인간들이 죽든 살든 마왕의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낮 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내걸었던 약속은 달랐다. 마왕의 이름을 걸고 수락한 신성한 계약이었다.
더구나 피를 흘리면서도 동료들 앞을 막아서던 서연의 모습이 자꾸만 신경을 긁었다.
"시체한테서는 닭 날개 하나도 뜯어낼 수 없다."
도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크르르르…… 끅!
바닥에 엎드린 우두머리 카르카스의 목구멍에서 쥐어짜는 비명이 터졌다.
벽면에 박힌 원 안의 세 뿔 검은 돌이 거세게 핏빛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수들의 뇌수를 강제로 쥐어짜며 인간을 찢으라는 광기 어린 명령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마수들은 일어설 수 없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조잡한 주술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영혼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본능적인 공포이자 거역하는 순간 숨결조차 지워질 듯한 마왕의 위압이 놈들의 척추를 짓누르고 있었다.
두 개의 상반된 압박 사이에서 뇌수가 터질 지경에 이른 마수들이 허연 거품을 물며 온몸을 뒤틀었다.
도현은 천장 암벽에서 벽면의 검은 돌을 노려보았다.
"건방진 돌멩이가 감히 내 명령을 방해해?"
골목길 변전소에 박혀 있던 것과 똑같은 조잡한 물건이었다. 그런 싸구려 돌멩이 하나 때문에 자신의 치킨 약속이 날아갈 판이었다.
도현은 오른손 검지를 내밀었다.
손끝에 아주 미세한 칠흑빛 마력 한 줄기가 벼려졌다. 주술의 핵만을 핀셋으로 집어내듯 끊어버리는 정밀한 마력 조작이었다.
핑.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실선이 허공을 갈랐다. 선은 동굴 벽면 깊숙이 박힌 검은 돌의 정중앙을 소리 없이 꿰뚫었다.
콰득!
돌 표면에 붉게 맥동하던 세 개의 뿔 문양이 일순간 멎었다.
치이이익―!
검은 돌에서 새까만 연기가 솟구쳤다. 붉은빛으로 번들거리던 표면이 잿빛으로 바래더니 쩍 하는 파열음과 함께 거미줄 같은 금이 사방으로 퍼졌다.
퍼석.
검은 돌의 중심 핵이 완전히 부스러지며 마력 파동이 산산조각 났다.
그와 동시에 마수들의 뇌수를 옭아매던 광기의 사슬이 완전히 끊겨 나갔다.
깨갱! 깽!
광기에서 풀려난 마수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짓누르는 포식자의 기운이 얼마나 끔찍한지 깨달았다.
우두머리 카르카스는 꼬리를 사타구니 사이에 말아 넣고 바닥을 기어갔다. 주둥이를 땅에 처박은 채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꼴은 매를 맞은 똥개나 다름없었다.
주변의 마수들도 도현이 있는 천장을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못한 채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떨었다.
동굴을 채우고 있던 탁하고 비릿한 마나의 왜곡이 말끔히 씻겨 나갔다.
"어……?"
윤서연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한 압박감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오염되었던 공기 중의 마나가 본래의 서늘한 흐름을 되찾았고 찢어질 것 같던 마나 회로의 통증도 가라앉았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벽면을 바라보았다. 검은 돌이 숯덩이처럼 금이 간 채 연기를 뿜고 있었다.
"돌이…… 깨졌어?"
서연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남은 마나로 작은 불씨 하나를 피워 올렸다. 탁구공만 한 주황색 불꽃이 어둠 속에서 파르르 흔들렸다.
그런데 그 순간.
히익! 깨개갱!
불꽃이 피어오르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우두머리 마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괴수는 불꽃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을 뒹굴며 물러났고 주변 마수들도 기겁하며 서연의 불꽃을 피해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렸다.
"어……?"
서연은 손바닥 위의 불씨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전투에서 그을음조차 내지 못했던 최하급 불씨였다.
그때 뒤편에서 감격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 길드장님……!"
한도윤이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외쳤다.
"해내셨군요……! 길드장님이 해내신 겁니다!"
"네? 제가요?"
배지훈도 떨리는 목소리로 거들었다.
"맞습니다! 마왕교의 저주를 태워버리고 마수들을 굴복시킨 거예요! 극한의 위기 속에서 길드장님의 마나가 각성한 겁니다!"
"각성이요? 이건 그냥 마나가 모자라서 나온 불씨인데요……."
"겸손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 사나운 놈들이 길드장님의 불꽃을 두려워해 감히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의 눈에는 맹목적인 존경과 감격이 가득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길드장의 각성에 대한 확신이 맞물려 있었다.
서연은 손바닥 위의 불씨를 다시 보았다. 상식 밖의 기적이 일어났다면 자신이 모르는 잠재력이 터졌다고 믿는 편이 차라리 그럴듯했다.
서연이 불꽃을 조금 키우자 마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위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진짜…… 내 마법 때문인가……?"
그리고 저 높은 천장 암벽 위. 바위틈에 앉아 그 꼴을 내려다보던 강도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각성은 무슨 얼어 죽을 각성."
내가 위압으로 놈들의 모가지를 짓누르고 손가락을 튕겨 돌멩이를 깨부숴 줬더니 손바닥에 성냥불 하나 켜놓고 자기가 각성했단다.
하지만 도현은 굳이 내려가서 사실을 바로잡을 생각이 없었다.
"착각을 하든 춤을 추든 상관없지. 정체를 숨기기에는 저런 헛소리가 백배는 낫다."
도현에게 중요한 것은 명예가 아니었다. 저 인간들이 무사히 살아 나가 약속된 저녁을 사는 것, 그거 하나면 족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쿨럭……!"
한도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서연이 다가가 그를 부축했지만 도윤의 안색은 창백했다. 배지훈 역시 어깨 출혈로 휘청거렸다.
"길드장님…… 마수들은 물러났지만 퇴로가……."
입구로 이어지는 협곡 통로가 거대한 낙석 더미로 완전히 메워져 있었다. 마왕교 놈들이 미리 무너뜨린 집채만 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빈틈없이 얽혀 있었다.
"도윤 씨 방패는 부서졌고 지훈 씨 부상도 심각해요. 두 사람 몸으로는 바위를 치울 수 없어요."
서연은 마나를 긁어모아 불꽃을 쐈지만 바위 표면을 검게 그을릴 뿐이었다.
퍼석.
손끝의 불꽃이 힘없이 꺼졌다. 서연은 피투성이가 된 가죽 장갑으로 거대한 바위를 밀어보려 했지만 수 톤의 암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절망이 서연의 목을 죄어왔다.
천장 암벽 위의 도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저러다가는 내일 아침이 와도 못 나가겠군."
더 지체하다가는 치킨집 문이 닫히는 것은 고사하고 다친 인간 둘이 차가운 송장이 되어버릴 터였다. 시체를 끌고 나온 서연이 제정신으로 치킨을 시켜줄 리 없었다.
"밥 한번 얻어먹기가 마계 통일보다 어렵군."
도현은 발끝에 걸린 작은 화강암 조각 하나에 미세한 진동의 파동을 불어넣었다. 가장 취약한 무게 중심을 타격해 연쇄 붕괴를 일으키는 마왕의 공명파였다.
툭.
도현이 발끝으로 돌멩이를 찼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작은 돌멩이가 암석 더미 틈새에 박히는 순간 응축되어 있던 진동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우두둑!
콰구구구구궁!
굉음과 함께 협곡을 가로막던 집채만 한 암석 더미들이 무너져 내렸다.
정밀하게 계산된 진동에 의해 바위들은 양옆 벽면으로 쓸려 나갔고 한가운데에 사람 서너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아치형 통로가 뚫렸다.
"통로가…… 뚫렸어요!"
배지훈이 소리쳤다. 한도윤 역시 환호했다.
"아까 마수들이 날뛸 때 지반에 균열이 갔던 모양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도왔어요!"
서연은 기이한 붕괴에 놀라면서도 서둘러 두 사람을 부축했다.
"어서요! 마수들이 제정신 차리기 전에 나가야 해요!"
세 사람은 피를 흘리며 뚫린 통로로 절뚝거리며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 엎드린 마수들은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인간들의 발소리가 협곡 너머로 완전히 멀어지자 천장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허공을 밟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강도현은 엎드려 있는 우두머리 카르카스를 지나쳐 검게 타버린 벽면 앞에 섰다. 바닥에 흩어진 검은 돌 파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역시 헬하임의 저급 세뇌술을 흉내 낸 물건이군."
C급 게이트에 이 정도 주술석을 심고 마수들을 통제할 정도라면 배후 세력의 조직망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었다.
그놈들이 서울 땅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든 도현이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전기가 끊기고 자신이 저녁을 얻어먹을 이웃이 살해당하는 사태는 마왕의 안락한 휴식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도현은 파편을 주머니에 넣고 바닥을 기는 마수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동굴 구석에 대가리 처박고 숨도 크게 쉬지 마라. 인간 사냥꾼들이 올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가죽은 벗기지 않겠다."
깨갱거리며 흩어진 마수들이 구석에 웅크리자 도현은 몸을 돌려 협곡 통로를 빠져나왔다.
솔내 채석장 밖은 요란한 경광등으로 어지러웠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서연 일행을 발견한 협회 요원들과 구급대가 경악하며 달려들고 있었다.
"라온 길드다! 살아 돌아왔어!"
"A급 헌터 하나가 변종 마수 무리를 뚫고 게이트를 클리어했다고?!"
소란스러운 통제선을 유유히 빠져나온 도현은 외곽 도로를 따라 한적하게 걸어갔다.
휴대전화를 켜자 배달 앱 알림이 반짝였다.
[딩동! 오늘 밤 한정! 숯불바베큐치킨 5,000원 깜짝 할인 쿠폰이 도착했습니다!]
도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병원에 실려 가더라도 침대 위에서 모바일 쿠폰 결제는 할 수 있겠지."
부서진 방패와 부상을 치료하느라 며칠은 앓아눕겠지만 공짜 치킨을 사주겠다는 약속의 당사자는 확실하게 살려냈다.
이 정도면 마왕으로서 밥값은 차고 넘치게 한 셈이었다.
도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울 도심의 불빛을 향해 밤길을 걸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