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 앞 5성급 호텔의 총지배인

3화: 은화 네 닢의 약속
“가장 좋은 방으로 내줘.”
남자는 펼쳐진 숙박 장부를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아델리아는 카운터에 열쇠 두 개를 나란히 놓았다. 201호와 203호. 그 사이에 들어갈 열쇠는 정비 중이라는 종이 아래 걸려 있었다.
“햇빛이 잘 드는 방과 복도 끝 방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좋은 방이 무엇인지도 손님이 정해야 하나.”
“깊이 주무실 방을 찾으신다면 복도 끝을 권하겠습니다.”
남자의 손이 장갑 끝에서 멈췄다. 문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입구를 향하던 시선도 잠깐 멎었다.
“그 방에는 누가 드나들지?”
“203호는 복도 끝이라 다른 손님이 지나갈 일이 적습니다. 청소도 원하시는 시간에 하겠습니다.”
“당장 잘 거다.”
아델리아는 203호 열쇠를 앞으로 옮겼다.
“지금부터 내일 정오까지 한 박에 은화 네 닢입니다. 난방과 차가 포함되며 숙박료는 먼저 받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깃 위로 드러난 회색 눈이 낡은 천장을 훑었다.
“이 건물에 선불을 요구할 배짱은 있군.”
“방을 먼저 확인하셔도 됩니다.”
“식사와 온천은?”
“식사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마을 식당 배달은 아직 협의 전이고요. 욕탕은 정령의 최종 수질 확인이 끝나면 안내하겠습니다. 지금 받는 돈은 객실료입니다.”
아까 따뜻한 온천욕을 누릴 수 있다고 맞이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델리아는 열쇠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욕탕을 바로 쓰실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면 제 안내가 부족했습니다. 개방 시각은 아직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보았다. 아델리아는 가격을 낮추거나 더 좋은 약속을 보태지 않았다. 카운터 아래 독촉장 모서리가 무릎에 닿았다.
“방부터 보지.”
그가 먼저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델리아는 열쇠를 챙겨 앞장섰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남자의 장화가 낮게 울렸다. 아델리아는 걸음을 늦췄다. 그도 재촉하지 않았다.
202호 앞에는 접은 걸레가 놓여 있었다. 아델리아가 옆으로 비켜서자 남자는 닫힌 문 아래를 보았다.
“저 방은 왜 잠갔지?”
“누수는 멈췄지만 바닥이 젖었습니다. 마르기 전에는 팔 수 없습니다.”
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
203호에는 햇볕에 말린 침구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델리아는 문을 열고 한 걸음 물러섰다. 남자는 창문부터 살핀 뒤 침대 옆에 서서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딸각.
창을 붙잡은 고정쇠가 떨렸다. 협곡의 바람이 세질 때마다 얇은 금속음이 이어졌다.
“조용하다더니.”
아델리아의 귀가 뜨거워졌다. 청소할 때는 창을 열어 두었고 난방을 확인할 때는 난로 소리만 들었다. 잠자리에 누울 손님처럼 가만히 서 있지는 않았다.
“확인하겠습니다.”
손끝으로 고정쇠를 누르자 소리가 멈췄다. 나사를 만져 보니 목재에 박힌 자리가 헐거웠다. 힘으로 더 조이면 창틀이 갈라질 수 있었다.
아델리아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여분의 천 조각을 꺼냈다. 좁게 접어 고정쇠 밑에 밀어 넣자 얇은 쇳소리가 사라졌다.
그녀는 창을 한 번 열었다가 닫았다. 천은 빠지지 않았다. 손을 뗀 뒤 바람이 다시 창을 밀 때까지 기다렸다.
“정식 수리는 별도로 하겠습니다. 우선 이 상태로 쉬실 수는 있습니다.”
남자가 창틀에 손을 대 보았다. 이어 문 안쪽 빗장을 밀었다가 풀었다.
“열쇠는 하나뿐인가?”
“관리용 예비 열쇠가 있습니다. 하지만 허락 없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화재처럼 손님의 안전을 확인해야 하는 경우는 예외입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위급한 징후가 없다면 돌아갑니다.”
그는 빗장을 한 번 더 움직였다. 무언가를 시험하는 손길은 느렸지만 어설프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고정쇠 수리를 수첩에 적었다. 다음 방을 점검할 때는 침대 곁에서 바람 한 차례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이 방으로 하지.”
아델리아가 수첩을 덮었다.
“등록을 마치면 열쇠를 드리겠습니다.”
남자의 시선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름을 남겨야 하나.”
로비로 내려온 남자는 카운터에 은화를 놓았다.
네 닢을 헤아린 뒤 다시 네 닢을 더했다. 동전 여덟 개가 손바닥 하나 들어갈 만큼의 자리를 차지했다.
“장부를 덮어. 나를 본 적도 없는 걸로 하고.”
아델리아는 은화를 보았다. 여덟 닢이면 연료를 더 사고 수리할 사람도 부를 수 있었다. 카운터 아래 서류에는 모레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손님 하나로 빚을 갚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첫 돈을 가볍게 볼 처지도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동전을 절반으로 나눴다.
개장 준비 중 환대의 장부에서 읽어 옮긴 등록 요건을 다시 짚었다. 이용할 이름과 숙박 대가와 규칙 동의. 본명을 증명하라는 조건은 없었다.
“본명과 가문은 묻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불릴 이름을 적어 주세요.”
“기록을 남기지 말라고 했다.”
“숙박 사실과 대가는 기록해야 합니다. 그래야 방을 맡긴 사람과 맡은 사람이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남자의 앞으로 네 닢을 돌려놓았다.
“손님의 신분과 대화를 밖에 전하지 않는 건 기본 의무입니다. 추가 요금은 받지 않습니다.”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물어도?”
“직원이 손님 정보를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다는 환대의 서약에 저도 묶입니다.”
아델리아는 숙박 장부 옆에 작은 종이를 펼쳤다. 개장을 준비하며 적어 둔 주의 사항이었다. 욕탕의 붉은 천을 본떠 위험 구역 항목 옆에는 짧은 붉은 선도 그었다.
“그 대가로 받겠다는 규칙이 이건가.”
남자의 손가락이 종이를 두드렸다.
“객실과 온천을 포함한 영업 구역에서 다른 사람에게 직접 해를 가하지 않는 데 동의하셔야 합니다. 상대를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 마법도 안 됩니다.”
“저쪽에서 먼저 덤비면?”
“정당방위까지 금하는 서약은 아닙니다. 다만 밖의 다툼을 여기서 대신 치르실 수는 없습니다.”
남자는 종이를 놓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그가 읽는 동안 기다렸다.
“붉은 천 너머 출입 금지. 소란 금지.”
그가 낮게 읽었다.
“목욕을 하러 와서 문 앞에 서 있기만 할 수도 있겠군.”
“안전하다고 확인하지 못하면 그렇습니다.”
“돈을 더 내도?”
“열 수 없습니다.”
난로 속 장작이 내려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 귀퉁이를 천천히 접었다가 폈다.
“네가 약속을 못 지키면?”
“약속한 난방이나 잠자리를 제공하지 못할 경우 숙박료를 돌려드리겠습니다.”
아델리아는 그 문장을 숙박 장부에 덧붙였다. 돈을 받아야 수리를 한다는 사정은 손님이 떠안을 몫이 아니었다. 쓰고 난 뒤 자신의 이름도 서명했다.
남자는 은화를 거두지 않았다. 그녀의 서명과 돌려놓은 네 닢을 번갈아 보았다.
“그 약속을 지킬 사람 이름은?”
“아델리아 로엔입니다. 벨루아 온천 리조트의 총지배인입니다.”
그가 펜을 집었다.
한동안 빈칸 위에 머물던 펜촉이 짧게 움직였다.
카이.
“그렇게 부르면 된다.”
“카이 님. 규칙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 우선 하룻밤이다.”
아델리아는 객실 번호와 받은 돈을 기록했다. 마지막 획이 마르기도 전에 카운터 위 열쇠의 낡은 문양에 빛이 스쳤다. 손잡이에 닿은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카이가 빛이 사라진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그는 돌려받은 은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203호입니다. 내일 정오까지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델리아가 열쇠를 건넸다. 카이는 손잡이의 문양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그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아델리아는 동전 네 닢을 한 번 더 세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이곳에 돈을 내고 남았다.
아델리아는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잔의 손잡이가 손님 쪽으로 향하도록 쟁반을 돌리고 203호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린 뒤 기다렸다.
안에서는 옷감 스치는 소리만 났다. 그녀는 다시 두드리지 않았다. 잠깐 뒤 빗장이 움직였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문은 쟁반이 들어갈 만큼만 열렸다. 카이는 여전히 깃을 올린 채였다. 그가 장갑을 벗은 두 손으로 쟁반 양끝을 받아 들었다.
“해가 질 때까지 깨우지 마. 온천이 준비되면 그때 알리고.”
“준비되지 않더라도 해 질 무렵에는 상황을 안내하겠습니다.”
카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아델리아가 빈손을 거두려는데 문 안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창은 이제 조용하군.”
그녀는 문틈 너머를 보았다. 임시로 끼워 둔 천 끝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편히 쉬십시오.”
닫힌 문 앞에서 아델리아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올 때까지 창의 쇳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로비에 돌아오자 협상을 지켜보던 루루가 카운터 옆 물그릇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네 닢만 받았어?”
“객실 하나 가격이니까요.”
“돈을 더 준다는데 돌려보내는 가격표도 있어?”
“지킬 수 없는 조건이 붙으면요.”
루루는 젖은 턱을 괴었다. 아델리아가 펼친 수첩에는 창 고정쇠 수리와 연료 구입이 적혀 있었다. 동전은 당장 줄어들지 않았는데 쓸 곳은 벌써 늘고 있었다.
아델리아는 네 닢을 작은 주머니에 따로 담았다. 수첩에도 선결제금이라고 적었다. 약속대로 방을 내주고 퇴실을 확인할 때까지는 보관할 돈이었다. 환불하겠다는 말을 적는 것보다 손을 대지 않는 일이 더 어려웠다.
아델리아의 눈앞에만 푸른 글씨가 떠올랐다.
[투숙 중: 203호 1실]
[가용 객실: 201호 1실]
[202호: 건조 중]
그녀는 글씨 너머로 은화를 보았다. 아침에 청소한 방이 정말로 누군가의 잠자리가 되었다. 그 사실이 뒤늦게 손끝까지 따뜻해졌다.
“이제 욕탕을 봐야겠어요.”
“내가 먼저 볼게.”
아델리아가 수첩을 들다 멈췄다. 루루는 온천동 쪽을 보고 있었다.
“물은 내 일이잖아. 위험하면 네가 빨리 열자고 해도 안 열 거야.”
“좋아요. 판단이 끝나면 불러 주세요.”
루루가 물그릇 아래로 쏙 사라졌다. 아델리아는 수첩에 확인 대기라고 적고 카운터에 팔꿈치를 얹었다. 잠깐은 앉아 있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의자를 당기기도 전에 온천동 배관이 한 차례 울었다.
“아델리아.”
이번에는 루루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없었다.
“아직 물길을 안 열었는데.”
아델리아는 펜을 내려놓았다.
“붉은 천 안쪽에서 물이 거꾸로 올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