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성 앞 5성급 호텔의 총지배인

4화: 검게 물드는 샘
아델리아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곧장 복도로 뛰었다.
온천동 문을 열자 서늘한 냉기가 밀려들었다. 매캐한 쇠 냄새와 진흙 냄새 속에서 타일 바닥 위로 물방울이 튀었다.
“루루!”
“여기야! 빨리 와!”
공동 욕탕 안쪽은 온천 증기 대신 차가운 냉기로 차 있었다. 잿빛 햇살 아래 수조 수면이 거칠게 일렁였다.
난간에 묶어 둔 붉은 천이 세찬 바람을 맞은 듯 펄럭였다. 천 안쪽 바닥 배수구에서 꿀렁거리는 파열음과 함께 먹물 같은 물줄기가 솟구쳤다.
루루는 난간에 매달려 온몸으로 물줄기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파란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솟구치는 검은 기운을 당해내지 못했다.
“물길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와! 엄청 무겁고 차가워!”
“루루! 힘으로 억누르지 마세요! 수압이 더 찹니다!”
아델리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갔다.
역류하는 물에서는 살을 에는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손끝을 스치는 냉기 속에 이질적인 마력의 잔재가 섞여 있었다. 어제 타일 틈에 맺혀 있던 검은 얼룩이 물을 머금고 살아난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대로 두면 정상 수조는 물론 2층 객실 온수 배관까지 오염수가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아델리아는 벽면 하단에 박힌 황동 밸브들을 살폈다.
“루루 저 밸브들이 보이나요? 비상 우회 밸브입니다.”
“저거 옛날부터 뻑뻑해서 안 돌아갔는데!”
“역류하는 물을 건물 밖 배수로로 빼내야 합니다. 루루는 물길을 오른쪽 배수 홈으로 유도해 주세요. 제가 레버를 돌리겠습니다.”
아델리아는 벽에 걸려 있던 무쇠 렌치를 집어 들었다. 녹슨 레버에 렌치를 물리고 체중을 실어 아래로 당겼다.
끼익 삐걱!
거친 쇳가루가 떨어지며 굳어 있던 밸브 축이 덜컥 돌아갔다.
배관 내부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치솟던 검은 물줄기가 방향을 바꾸어 벽 쪽 비상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수면을 덮쳤던 거품이 빠져나갔다.
루루가 젖은 팔로 이마를 훔쳤다.
“막았어…… 일단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어.”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아델리아는 수조 밑바닥을 가리켰다.
수위는 내려갔지만 타일 바닥에는 끈적한 유막이 눌어붙어 있었다. 차가운 마력이 여전히 돌 틈에서 스멀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눈앞의 허공에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환대의 장부>
[경보: 수맥 마력 잔재 침식 발생]
[공동 욕탕 상태: 심각한 오염 (청정도 22%)]
[영향 범위: 온천 본수맥 및 객실 난방 공급 배관]
[권장 조치: 유입로 정화 및 물리적 차단막 구축]
[주의: 물리적 자원과 정령의 노동 없이 오염은 정화되지 않습니다.]
장부의 숫자는 냉정했다. 청정도 22퍼센트로는 발을 담그기는커녕 가까이 가기만 해도 살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이 오염이 본수맥까지 파고들면 온천 자체가 죽어 버려.”
루루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물길을 다시 씻어내 볼게! 하지만 찌꺼기가 너무 질겨!”
루루가 두 손을 모으자 수조 안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맑은 물방울이 검은 막을 밀어내려 했지만 끈적한 마력은 타일 틈새를 움켜쥔 채 떨어지지 않았다.
아델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이에게 받은 은화 네 닢은 손댈 수 없는 선결제금이었다. 서비스를 온전히 제공하지 못하면 환불해야 할 돈이었다.
돈을 쓰지 않고 당장 이 마력을 걷어낼 방법이 필요했다.
‘마력 잔재는 기름처럼 엉겨 붙는다. 차가운 성질을 띠고 있다면 흡착시켜서 걷어내야 해.’
아델리아는 온천동 구석 비품 창고로 달려갔다. 선반 아래 포대를 뜯자 굵은 천일염과 난로용 참숯이 들어 있었다. 옆 상자에는 보수용 자갈도 남아 있었다.
“루루! 맑은 지하수를 위쪽 유입구로 모아 주세요!”
아델리아는 삼베 자루에 참숯을 깨어 넣고 소금과 자갈을 채웠다. 간이 여과 자루 세 개를 엮어 온천수가 흘러드는 돌 홈통 입구에 단단히 틀어막았다.
“소금과 숯으로 뭘 하려고?”
“숯은 불순물을 빨아들이고 거친 소금은 차가운 냉기를 분해합니다. 루루는 그 사이로 순수한 온천수를 계속 밀어내세요!”
루루가 눈을 질끈 감고 물빛 마력을 뿜었다.
지하 깊은 곳에서 솟구친 미온수가 삼베 여과층을 통과했다. 소금이 녹아내리며 뿜어낸 열기와 숯의 흡착력이 결합되자 돌 틈에 들러붙어 있던 검은 유막이 힘을 잃고 떠올랐다.
아델리아는 뜰채와 마포를 들고 수조 가장자리를 돌며 떠오른 찌꺼기들을 걷어냈다. 팔이 저려오고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손을 멈추지 않았다.
수조 바닥의 타일이 제 빛깔을 드러냈다. 여과층을 거친 온천수가 차오르며 은은한 청록빛 온기가 피어올랐다. 맑은 수증기가 차가웠던 욕탕을 채워 나갔다.
장부의 숫자가 바뀌었다.
[공동 욕탕 상태: 정화 완료 (청정도 68%)]
[안전 구역: 전면 메인 수조 정상화]
[위험 잔존: 심층 바위 틈새 검은 마력 핵 격리 중]
수조 앞부분은 맑은 물이 찰랑거렸다. 하지만 붉은 천 안쪽 깊은 바위틈에는 여전히 손톱만 한 검은 핵이 웅크린 채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여과벽에 막혀 바깥으로 번지지는 못했다.
루루가 맑아진 물 위로 털썩 쓰러졌다.
“살았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수고했어요 루루. 정말 잘해 주었습니다.”
아델리아가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그때 바닥 아래 묻힌 구리 배관에서 둔탁한 진동이 울렸다.
두웅!
차가운 냉기와 뜨거운 온천수가 급격히 부딪치며 발생한 수격 현상이었다. 진동은 온수관을 타고 벽을 울리며 2층 복도 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아델리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2층으로 이어진 주 온수 배관은 복도 끝 객실 바로 카이가 머물고 있는 203호실 바닥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협곡의 바위산 너머로 붉은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카이에게 약속했던 일몰 시각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깨우지 마라.’
손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하지만 지금의 충격은 객실 바닥까지 흔들었을 가능성이 컸다.
아델리아는 손에 묻은 검댕을 닦아내고 계단을 올라갔다.
203호실 문 앞에 다가서자 발끝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틈 아래로 희미한 냉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닥재 속에서 가느다란 쇳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비상시가 아니면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는다.’
손님과 맺은 약속이었다. 지금 문 안에서 불길이 솟구치거나 비명이 들리는 것은 아니었다. 관리인의 조급함으로 손님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는 없었다.
아델리아는 옷깃을 바로잡고 문을 단정하게 세 번 두드렸다.
똑 똑 똑.
“카이 님. 총지배인 아델리아입니다.”
안에서는 즉각적인 대답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안쪽 빗장이 풀리는 쇳소리가 났다.
끼이익.
문이 한 뼘가량 열렸다.
문틈 너머로 드러난 남자의 얼굴은 몇 시간 전보다 눈에 띄게 창백했다. 깊게 눌러쓴 후드 아래로 차갑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아델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아델리아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배관 정비 중 급격한 수압 변화로 바닥에 진동이 발생했습니다. 손님의 소중한 휴식을 방해해 드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카이는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시선이 아델리아의 걷어붙인 소매와 앞치마에 튄 물자국 그리고 손끝에 묻은 숯가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밑에서 물이 터졌나.”
낮게 잠긴 음성이었다.
“온천 유입구 쪽에 이물질이 차올라 긴급 정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약속드린 일몰 시각이 되어 현재 상황을 말씀드리고자 찾아뵈었습니다.”
아델리아는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공동 욕탕의 전면 메인 수조는 정화를 마쳐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심층 구역의 위험 잔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붉은 천으로 차단해 둔 상태입니다. 손님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하기 전까지는 절반만 개방합니다.”
변명도 과장도 없는 설명이었다.
카이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가슴께를 누르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사실 온천동에서 검은 마력이 역류하던 순간 그의 심장 깊은 곳에 박힌 전쟁 저주가 강하게 공명하며 날뛰었다. 카이는 그 통증을 억누르느라 침대 곁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런데 온천수가 맑아진 순간 저주의 날카로운 통증도 잦아들었다.
남자는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초라한 여관의 관리인이 마력의 역류를 제 힘으로 수습했다는 사실이 기이했다. 심지어 시설의 결함을 숨기지 않고 위험 구역의 존재를 그대로 밝히고 있었다.
“위험한 곳은 막아 뒀다는 건가.”
“네. 안전이 확인되지 않은 구역에는 손님을 들이지 않는 것이 저희 호텔의 원칙입니다. 오늘 저녁 입욕을 원하신다면 전면 욕조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소음이나 냉기가 거슬리신다면 온수 밸브를 즉시 외부 라인으로 돌려 방의 소음을 차단하겠습니다.”
카이는 잠시 문지방을 바라보다가 낮게 읊조렸다.
“목욕은 내일 아침에 하지. 방의 소음은 견딜 만하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언제든 로비로 알려 주십시오.”
“됐다. 가 봐.”
카이는 짧게 말을 마치고 문을 닫았다.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문이 닫힌 뒤에도 아델리아는 잠시 자리에 머물렀다. 차가운 문 너머로 느껴지던 남자의 비정상적인 한기와 창백한 낯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로비로 내려오자 카운터 위 사기그릇에 몸을 담근 루루가 기운 없이 늘어져 있었다.
“손님이 화냈어?”
“아닙니다. 내일 아침에 온천을 이용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아델리아는 난로에 장작을 두 토막 더 집어넣었다. 불꽃이 타닥 소리를 내며 붉은 훈기를 토해냈다.
그녀는 카운터에 앉아 건물의 배관 도면과 숙박 장부를 나란히 펼쳤다.
‘203호는 온천 주 배관이 바닥을 관통하는 방이다.’
이번 정비로 확실해진 사실이었다. 지하 수맥의 마력이 요동치면 그 진동과 한기가 가장 먼저 도달하는 곳이 바로 203호였다. 아무리 소음을 잡고 천을 덧대어도 배관을 타고 올라오는 마력의 파동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카이가 숨기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손님은 극심한 피로와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손님에게 진동과 한기가 들이치는 방은 결코 좋은 잠자리가 될 수 없었다.
반면 비어 있는 201호는 달랐다.
아델리아는 도면 위의 201호를 짚었다. 201호는 건물 외벽 쪽에 붙어 있어 온천 배관 라인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햇빛이 잘 들고 배관 소음이나 수맥의 이상 진동이 전혀 닿지 않는 구조였다.
‘내일 아침 손님이 온천으로 내려오실 때 자연스럽게 방을 옮겨 드려야 해.’
손님의 정체나 아픔을 캐묻는 것은 서비스가 아니다. 손님이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가 가장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찾아내 제공하는 것. 그것이 전생부터 지켜온 호텔리어의 본분이었다.
아델리아는 수첩에 단정한 글씨로 다음 과제를 적었다.
‘내일 오전 과제: 201호 최종 세팅 완료 및 정중한 객실 이전 제안.’
그리고 시선은 카운터 구석에 놓인 상환 독촉장으로 향했다.
사흘의 기한 중 오늘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일이 지나면 상환일은 모레로 닥쳐온다.
온천 수조는 절반을 살려냈고 첫 손님과의 약속도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심층 수맥의 검은 핵은 여전히 차갑게 도사리고 있었고 빚의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협곡 너머로 완전한 어둠이 깔렸다. 벨루아 리조트의 불빛만이 차가운 돌산 한가운데에서 홀로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