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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11화

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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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꽃가루는 타지 않는다

열기가 뺨을 스치는 순간 로제트는 숨을 들이켰다.

가시 사이에 맺힌 첫 번째 불꽃이 붉은 장미 꽃잎으로 접히며 바스락거렸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던 소리가 멎고 차가운 이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살을 벨 것 같던 복사열 속에서 그 작은 한 조각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늘했다.

하지만 뒤이어 밀려오는 화염은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갈래로 쪼개진 붉은 불길이 수로 벽을 긁으며 쏟아져 내렸다. 녹아내리는 돌 틈으로 붉은 용암 같은 줄기가 번뜩였다. 가시 격자가 고열에 비틀거리며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좁은 틈새마다 지옥의 아가리 같은 불빛이 아른거렸다.

카이엔이 로제트의 오른손을 바짝 당겨 쥐었다.

“벽이 밀린다.”

“버텨야 해요!”

로제트는 왼손에 쥔 빗자루 가시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손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열기가 장갑을 뚫고 뼈마디까지 올라왔다. 조금 전 작은 불씨 하나를 바꿨던 바로 그 감각을 악착같이 붙들었다.

열을 걷어 내고 형상을 비틀어 접는 작업.

치이익!

격자 중앙으로 쏟아지던 굵직한 화염 한 줄기가 분홍빛 마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불꽃의 허리가 꺾이며 수백 장의 붉은 꽃잎으로 사방에 터져 나갔다. 꽃잎이 닿는 곳마다 타오르던 돌벽의 불길이 잦아들었다.

“전하, 바닥!”

카이엔이 오른손에 쥔 검을 돌 틈 깊숙이 찔러 넣었다. 검붉은 마력이 검신을 타고 바닥으로 번져 나가며 무너지려던 수로 바닥을 억세게 틀어쥐었다.

그의 단단한 어깨가 로제트의 등을 흔들림 없이 받쳤다.

“흔들리지 않는다. 네 일만 해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 묵직한 한마디가 뒤를 받치자 덜덜 떨리던 로제트의 왼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불길은 폭포처럼 쏟아졌고 로제트는 격자 한 칸마다 마력을 던졌다.

타오르는 불꽃이 가시를 지날 때마다 제 빛깔과 열기를 잃었다. 붉은 화염이 장미 꽃잎으로 변하고 그 꽃잎들이 좁은 틈새를 비집고 나오며 잘게 부서졌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갗을 태우는 열풍이 아니라 서늘한 장미 향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었다.

꽃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미세한 분홍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좁은 수로 안쪽이 순식간에 달콤하고 짙은 꽃향기로 뒤덮였다.

격자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불길의 기세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카이엔의 붉은 눈동자가 허공을 소용돌이치는 꽃가루를 응시했다.

“불길이 식고 있다.”

“불이 아니라 꽃가루니까요. 전하, 이제 밀어낼게요!”

로제트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빗자루를 앞으로 밀었다. 가시 격자 전체가 눈부신 분홍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흑룡이 목을 크게 꺾으며 불길을 멈췄다.

놈의 거대한 눈동자에 혼란이 스쳤다. 아무리 쏟아부어도 앞을 태우지 못하고 도리어 서늘한 향기만 뿜어내는 통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원을 집어삼키던 거대한 화염이 한낱 작은 수로 끝에서 번번이 맥없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흑룡의 목덜미 비늘이 곤두섰다.

크아아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포효와 함께 마수가 다시 거대한 턱을 벌렸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암적색 마력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 소용돌이쳤다.

정원의 남은 흙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카이엔이 검을 쥐지 않은 왼손으로 로제트의 손을 더 세게 옭아맸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강한 힘이었다.

“한 번 더 온다. 피해야 하나.”

“아뇨. 피하면 안 돼요.”

로제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놈은 지금 자기가 땔감을 던져 주는 줄도 몰라요. 불이 세질수록 이쪽 재료가 늘어나는 법이거든요.”

빗자루 끝에 맺힌 분홍빛이 가시 격자의 테두리를 따라 폭발하듯 번졌다. 억눌려 있던 마력이 격자 틈새마다 빽빽하게 차올라 눈부신 그물망을 짰다.

화염이 좁은 수로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직전 로제트가 가시 격자를 바깥쪽으로 힘껏 밀어 올렸다.

“분리수거 끝났으면 배출하셔야죠!”

콰아아앙!

흑룡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집채만 한 불기둥이 가시 격자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러나 불길은 단 한 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격자를 통과하는 순간 모든 화염이 압축된 장미 꽃가루로 순식간에 치환되었다. 흑룡이 토해낸 맹렬한 추진력이 고스란히 꽃가루를 밀어 올리는 거대한 바람이 되었다.

화염이 거셀수록 폭풍도 거대해졌다.

쉬이이익!

수로 입구에서 분홍빛 거센 폭풍이 터져 나왔다. 수천만 수억 개의 장미 꽃가루가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흑룡의 안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역류했다.

카이엔이 검끝을 비틀며 바람의 길을 열었다.

“가라!”

그의 의지가 더해지자 꽃가루 폭풍은 마치 살아 있는 용의 형상처럼 솟구쳐 흑룡의 아가리로 쏟아져 들어갔다.

불길을 내뿜던 흑룡의 목구멍으로 차가운 꽃가루 덩어리가 사정없이 들이찼다.

산소를 빼앗긴 불길이 흑룡의 식도 안쪽에서 퍽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화염 대신 분홍빛 꽃가루가 마수의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쿠구구궁!

흑룡이 비틀거리며 거대한 앞발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크허억! 컥!

마수가 질식할 듯 헐떡이며 몸부림쳤다. 시야를 가로막은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자 흑룡은 고통스럽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눈가에서도 붉은 피 대신 짙은 장미 꽃가루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거대한 꼬리가 허공을 가르며 바닥을 내리쳤다.

쿵!

수로 양옆의 돌벽이 무너지며 커다란 돌무더기가 쏟아졌다. 카이엔이 로제트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칼등으로 떨어지는 바위를 쳐냈다.

챙!

금속 마찰음과 함께 바위가 산산조각 났다.

“몸을 쳐서는 안 된다고 했지.”

카이엔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물었다. 그의 가슴팍에 떠오른 검은 실금이 희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늘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마수가 날뛰자 주변 마력이 거세게 공명하고 있었다.

“네, 절대 안 돼요! 저놈을 때리면 전하 심장이 아작나요!”

로제트는 카이엔의 품 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흑룡은 화염을 잃고 맹목적인 분노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거센 돌풍이 일며 정원에 남아 있던 재와 그을음이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저 거대한 덩치가 맹목적으로 돌진해 온다면 좁은 수로 따위는 그대로 짓밟힐 터였다.

상처를 주지 않고 쫓아내야 했다.

로제트는 발밑의 흙을 보았다.

정원의 꽃밭은 불탔지만 땅속 깊은 곳에는 아직 그녀가 심어 두었던 장미 덤불의 뿌리가 남아 있었다.

“전하, 발밑에 바람을 일으켜 주세요. 위쪽으로요!”

카이엔이 망설임 없이 검을 허공으로 쳐올렸다.

서늘한 검풍이 수로 바깥으로 솟구치며 날리던 꽃가루를 흑룡의 날개 쪽으로 몰아붙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로제트가 빗자루 끝을 흙바닥에 박아 넣었다.

“잡초는 제자리에 계세요!”

우드득!

흑룡의 디딤발 주변에서 굵은 장미 덩굴 수십 줄기가 용솟음쳤다. 날카로운 가시가 돋은 덩굴이 마수의 거대한 발목과 날개깃을 단단히 휘감았다.

크르르르!

흑룡이 발을 빼려 버둥거렸지만 덩굴은 몸을 파고드는 대신 족쇄처럼 단단히 땅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을 뒤덮은 꽃가루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마수는 균형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쿵!

정원의 지반이 크게 울렸다.

흑룡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앞을 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는 상태에서 제 발마저 묶이자 본능적인 공포가 마수를 집어삼켰다.

마수가 거대한 날개를 억지로 털어내며 하늘로 솟구치려 했다. 가시 덩굴이 우두둑 끊어지며 흑룡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하지만 다시 덤벼들지 못했다.

흑룡은 피눈물 대신 꽃가루를 흩뿌리며 정원 너머의 끝없는 어둠, 심연의 밑바닥을 향해 날개를 접고 곤두박질쳤다.

검은 안개가 걷히고 거대한 그림자가 심연 너머로 자취를 감추었다.

쿠구구궁…… 쿵.

먼 곳에서 울리는 희미한 진동을 끝으로 정원에는 완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쏴아아아.

바람이 멎자 공중에 떠돌던 꽃가루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분홍빛 눈송이 같은 가루가 검게 그을린 수로와 무너진 돌담 위를 소복이 덮었다. 불타서 뼈대만 남았던 화단 위에도 부드러운 꽃가루 융단이 깔려 흉측한 재를 감추었다.

“하아…… 하.”

로제트의 다리가 풀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왼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려 했다.

텁.

빗자루가 땅에 닿기 전 강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와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카이엔이 검을 바닥에 내리고 무릎을 꿇으며 그녀를 받아 낸 것이었다.

“로제트.”

낮고 떨리는 음성이 귓가를 울렸다. 그의 품은 차가운 꿈속에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했다.

로제트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보관함…… 두 번째 문은요……”

“멀쩡하다.”

카이엔의 시선이 회랑 끝을 스쳤다.

검은 회랑 앞 분홍 자물쇠가 걸린 보관함은 불길 한 점 닿지 않은 채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이엔의 가슴에서도 옥죄던 검은 실금이 희미하게 잦아들어 있었다.

그제야 로제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벤치는 타 버렸지만 청소비는 제대로 청구해야겠어요.”

“너는 이 상황에서도 돈 이야기인가.”

카이엔의 목소리에 짙은 허탈함과 안도가 섞여 들었다.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로제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장미빛 금발을 넘겨주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로제트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앞에 붉은 눈동자가 가득 차 있었다. 늘 서늘하고 예민한 광증으로 굳어 있던 황태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숨길 수 없는 충격과 경외 그리고 지독하게 얽힌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용의 브레스를 장미 꽃가루로 바꾸고 무너져 가던 자신의 세계를 온몸으로 지탱해 낸 여인.

카이엔은 꿈속 여인의 입술 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낮에 보았던 시녀의 낯익은 얼굴과 밤마다 자신을 구원하는 이 신비로운 존재가 겹쳐져 심장을 거세게 난타했다.

맞잡았던 손을 얽어 쥔 그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대체 누구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꽃가루 흩날리는 정원의 침묵을 갈랐다.

“정녕 내 머릿속이 만들어 낸 환영에 불과한 것인가.”

물음에 답해야 할 로제트의 입술 끝이 가늘게 호선을 그렸다. 쏟아지는 피로 속에서도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에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환영이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겠어요,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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