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10화: 불길에도 청소 순서가 있다
불길이 닿기도 전에 장미 잎이 오그라들었다.
카이엔이 오른손의 검을 세우자 로제트는 맞잡은 그의 왼손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걸 칼로 받으시면 손잡이만 남아요. 숙이세요!”
왼손에 든 빗자루가 수로 바닥을 내리쳤다. 발목 깊이였던 물길이 두 사람의 키보다 깊게 꺼졌다. 카이엔은 로제트의 오른손을 놓지 않은 채 벤치 옆 수로로 뛰어내렸다.
머리 위로 붉은 불길이 지나갔다.
수로 가장자리의 돌이 녹아 흘렀다. 로제트가 고개를 들려는 순간 카이엔의 어깨가 시야를 가렸다. 검이 허공을 긋고 떨어지던 돌덩이를 옆으로 튕겨 냈다.
치익.
얕게 남아 있던 물마저 발밑에서 증발했다. 로제트는 뜨거운 돌벽에서 등을 떼었다. 화려한 치맛자락 끝이 까맣게 말려 있었다.
“이런 손님은 예약부터 받았어야 했는데.”
빗자루를 쥔 손바닥이 벌써 저렸다. 두 사람이 설 자리만 파내는데도 바닥이 버티며 마력을 잡아먹었다. 머리 위를 덮은 흑룡의 그림자 아래에서는 정원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엔이 돌벽 너머를 살폈다.
불타는 벤치 다리가 둘 사이로 떨어졌다. 그가 발로 밀어 치웠다. 나무가 부러진 틈에서 한 움큼의 재가 날렸다.
로제트는 벤치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나란히 앉을 만큼 남겨 두었던 장미 덩굴까지 모두 타고 있었다.
“다시 만들면 돼요.”
카이엔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자신이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나가야겠군.”
“위로는 안 돼요.”
흑룡의 날개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정원 끝의 회랑까지 그림자가 덮였다. 붉은 입이 닫히자 이번에는 땅이 흔들렸다.
거대한 앞발이 수로 옆을 짓밟았다.
돌벽 틈으로 검붉은 비늘이 보였다. 비늘 한 장이 로제트가 앉았던 안락의자만 했다. 벽돌 사이를 긁는 발톱에서 귀가 아픈 소리가 났다.
카이엔이 검을 고쳐 쥐었다.
“발부터 묶겠나.”
로제트는 비늘의 가장자리를 겨눴다. 저 커다란 몸을 전부 바꿀 필요는 없었다. 한 조각만 말랑하게 만들 수 있다면 발을 헛디디게 할 수 있었다.
그녀가 빗자루 끝을 밀어 올렸다.
가시 끝에서 번진 분홍빛이 비늘에 닿았다.
검붉은 표면이 손톱만큼 희어졌다. 로제트가 조금 더 힘을 보내려는 순간 맞잡은 카이엔의 손이 뒤틀렸다.
그의 숨이 뚝 멎었다.
“전하?”
옷깃 아래로 검은 실금이 솟았다. 흑룡의 앞발에서도 같은 선이 번쩍였다. 비늘에서 뻗은 가느다란 실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가 카이엔의 발밑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다.
로제트는 곧장 빛을 거뒀다.
흰 얼룩이 사라지자 카이엔의 가슴을 조이던 검은 선도 느슨해졌다. 그는 짧게 숨을 토했다. 검끝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아프셨어요.”
“계속할 수 있다.”
“아픈지 여쭤봤어요.”
로제트는 굳게 닫힌 그의 손 안에서 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제야 손등을 누르던 힘이 조금 풀렸다.
카이엔은 앞발을 노리던 검을 내렸다.
“심장을 잡아 비트는 것 같았다.”
“그럼 저 발은 건드리면 안 되겠네요.”
한꺼번에 치우고 싶었다. 낮에는 황후궁 시녀에게 턱을 붙잡히고 밤에는 남의 꿈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그 조급함으로 저 비늘을 억지로 벗겼다면 카이엔의 가슴에서 무엇이 찢어졌을까.
로제트는 빗자루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제가 멈출 때까지 참지 마세요. 먼저 말씀하셔야 해요.”
“너도 손이 떨린다.”
그녀는 왼손을 내려다봤다. 검은 비늘에 힘을 밀어 넣은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건 제 월급으로 감당할 크기가 아니긴 하네요.”
“그 농담은 대답이 아니다.”
로제트가 입술을 다물었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크게 바꾸기는 힘들어요. 작은 곳부터 찾아야 해요.”
돌벽 위를 긁던 발톱이 멎었다. 로제트가 고개를 들었다. 흑룡은 앞발을 빼는 대신 몸을 옆으로 틀고 있었다.
“저쪽으로!”
카이엔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수로 벽이 안으로 터졌다.
흑룡의 꼬리가 돌담을 쓸었다. 카이엔이 로제트의 손을 끌고 달렸다. 둘은 물길이 휘어진 곳으로 몸을 던졌다. 조금 전 서 있던 자리에 부서진 장미 아치가 처박혔다.
로제트는 넘어지려는 발을 겨우 디뎠다. 수로 끝으로 검은 회랑이 보였다. 두 번째 문에 걸어 둔 분홍 자물쇠가 충격을 받아 가늘게 흔들렸다.
저 안까지 불이 번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 왼쪽 소매에서 따끔한 통증이 일었다.
무너진 돌벽에 묻어 있던 불씨 하나가 천 위에서 살아 움직였다.
로제트가 소매를 남은 물웅덩이에 눌렀다.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붉은 점이 물속에서도 천의 올을 먹어 들어갔다. 카이엔이 칼끝을 가져오자 로제트가 고개를 저었다.
“탄 천만 잘라 주세요.”
카이엔은 칼날을 비스듬히 돌려 피부에서 떨어진 소매 가장자리를 베었다. 로제트가 빗자루 가시로 천 조각을 받아 들었다.
한 점이었다. 손가락으로 가리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불꽃.
로제트는 그 가장자리에 분홍빛을 얹었다. 모양을 바꾸기 전에 열부터 걷어 낼 생각이었다. 천을 타고 번지던 붉은 빛이 한 번 부풀었다.
카이엔의 손은 그대로였다.
“가슴은요?”
“변한 것 없다.”
로제트는 숨을 조금씩 내쉬며 불씨를 감쌌다. 뜨거움이 빠진 자리에 희미한 불빛이 남았다. 빗자루 끝에 매달린 작은 등불처럼 흔들렸다.
그녀가 가시를 기울였다. 불빛이 벽에 닿아도 돌은 녹지 않았다.
“이 불씨는 바뀌네요. 전하께 통증이 돌아가지도 않았어요.”
“다음 불길도 그렇게 만들 수 있나.”
로제트가 고개를 들었다. 흑룡이 그들을 찾아 목을 꺾고 있었다. 비늘 틈마다 붉은 빛이 다시 차올랐다.
빗자루 끝의 작은 빛과 하늘을 가린 아가리.
“전부는 아직 몰라요.”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양이 조금 다르잖아요.”
농담을 하고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불씨가 붙었던 천 조각이 가시 끝에서 부스러졌다. 이 작은 것 하나에도 손바닥이 젖어 있었다.
카이엔은 회랑 앞을 살폈다. 불길이 이대로 쏟아지면 보관함까지 삼킬 방향이었다. 그가 옆으로 걸음을 떼자 맞잡은 손이 팽팽해졌다.
로제트는 더 세게 붙잡았다.
“혼자 미끼가 되실 생각이면 안 돼요.”
“고개를 돌려야 한다.”
“같이 돌리면 되죠.”
그녀가 옆에 섰다. 손이 이어진 만큼만 움직일 수 있었다. 대신 카이엔이 가리키는 방향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아직 타지 않은 장미밭이 수로 건너에 남아 있었다. 로제트가 그쪽으로 한 발 옮기자 흑룡의 눈도 움직였다.
놈은 정원 어디든 태우려는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선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꽃밭을 낮춰 그 안으로 들어가면 보관함에서 공격을 멀리 끌어낼 수 있었다. 양옆에 흙벽을 남기고 두 사람에게 닿는 불길만 좁은 곳에서 받으면 된다.
하지만 남은 정원은 사라진다.
카이엔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저쪽을 써라.”
“전하께서 편히 쉬시던 곳이에요.”
“알고 있다.”
그는 무너진 벤치를 돌아보지 않았다. 로제트가 쥔 빗자루 자루에 시선을 내렸다.
“다시 만들 손까지 태울 셈인가.”
로제트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꽃 한 송이 상하지 않는 방벽을 세우려면 저 하늘까지 덮어야 했다. 기존의 흙과 돌로 두 사람의 피신처만 만들면 손댈 곳이 훨씬 적었다.
손등을 받친 카이엔의 엄지가 움직였다. 서두르라고 잡아끌지 않았다. 로제트가 남은 장미에서 눈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럼 도와주세요.”
카이엔이 검을 세웠다.
“어디를 지키면 되지.”
빗자루가 물길 가장자리를 쓸었다.
장미 뿌리가 흙에서 빠져나왔다. 화단이 낮아지고 돌 경계가 양옆으로 밀렸다. 로제트는 뜯겨 나오는 꽃송이를 보지 않으려고 발밑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로는 회랑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깊게 이어졌다. 끝으로 갈수록 양쪽 벽이 좁아졌다. 비늘을 건드렸을 때와 달리 카이엔의 가슴은 조용했다. 대신 로제트의 숨이 가빠졌다.
“바닥이 다시 올라오지 않게 해 주세요.”
카이엔이 검끝을 발치의 돌 틈에 눌렀다.
“이 길은 무너지지 않는다.”
붉은 선이 두 사람 주위로 번졌다. 발밑을 밀어 올리던 진동이 조금 잦아들었다. 회랑을 눌러 두었던 힘이 이번에는 좁은 길 양옆을 붙들었다.
로제트는 빗자루의 가시를 풀었다. 기다란 가시들이 뻗어 나가 수로의 좁은 끝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숨을 만한 폭의 성긴 격자였다. 거대한 불길을 막기에는 빈틈이 너무 많았다.
카이엔의 눈썹이 움직였다.
“새어 나오겠군.”
“네. 사이로 나오게 할 거예요.”
로제트는 격자 한 칸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만큼씩 나눠서요.”
격자가 저절로 불을 꺼 주지는 않는다. 사이로 지나오는 것에 로제트가 직접 힘을 보내야 했다.
그녀는 손바닥을 대어 가장 가까운 가시부터 분홍빛으로 적셨다. 멀리 뻗은 끝까지 욕심내지 않았다.
작은 불씨 하나를 바꾸던 감각을 손끝에 붙잡았다. 온 하늘을 덮는 것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눈앞의 작은 칸이라면 볼 수 있었다. 바꿀 경계도 그릴 수 있었다.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로제트가 손을 쥐자 카이엔도 똑같이 힘을 주었다.
둘은 새로 만든 수로를 따라 움직였다. 카이엔은 검끝으로 바닥을 짚으며 뒤로 걸었다. 흑룡의 눈동자가 그들을 따라 돌아왔다. 거대한 턱이 회랑에서 멀어졌다.
“조금만 더요.”
로제트가 한 걸음 물러섰다. 뒤꿈치가 좁아진 수로의 끝에 닿았다. 격자가 두 사람과 흑룡 사이에 놓였다.
하늘을 가린 마수가 숨을 들이마셨다.
가시 끝에 남았던 작은 불빛이 꺼졌다. 주변의 재가 흑룡 쪽으로 끌려갔다. 바람이 멎은 찰나 카이엔의 검끝이 바닥을 긁었다.
“길을 오래 붙들 수는 없다.”
아프냐고 묻기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로제트는 좁아진 길의 모퉁이를 확인했다. 실패하면 함께 몸을 던질 자리였다.
“한 번만 받아요. 안 되면 바로 저쪽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왼손을 격자에 댔다.
“준비됐어요.”
“끝까지 함께 간다.”
목 안쪽의 붉은 빛이 터졌다.
불길이 수로를 타고 밀려왔다. 양옆으로 넘친 화염이 비워 둔 화단을 삼켰다. 돌벽의 윗부분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카이엔이 이를 악물고 검을 더 깊이 눌렀다. 두 사람의 발밑만은 내려앉지 않았다.
로제트의 왼손에서 분홍빛이 피어났다.
열기가 격자에 닿았다. 가시가 타는 냄새와 함께 촘촘한 붉은 선이 손등으로 몰려왔다. 로제트는 빗자루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손목에 힘을 줬다.
크게 벌어진 턱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웃었다.
“분리수거부터 하겠습니다.”
첫 번째 불꽃이 가시 사이에서 꽃잎 모양으로 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