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12화: 손끝에 닿은 온기
정적 속에서 흩날리던 분홍빛 꽃가루가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소복이 쌓여 내렸다.
카이엔은 품에 안긴 로제트의 얼굴을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 속에는 무너져 내리던 세계의 끝에서 구원줄을 붙잡은 자의 갈망이 일렁였다.
“환영이……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겠느냐고?”
카이엔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이 낮게 떨렸다.
그는 장갑을 벗어 던진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로제트의 창백하게 질린 뺨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서늘한 공기와는 다른 생생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었다.
“환영이라면 이토록 뜨거운 숨을 내쉴 리 없다.”
카이엔의 엄지손가락이 로제트의 가느다란 목덜미로 내려앉았다.
콩, 콩, 콩.
작고 여린 고동이 그의 손끝을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다급하게 요동치는 살아 있는 심장의 박동이었다.
“내 손끝 아래에서 이토록 거칠게 심장이 뛸 리도 없지.”
카이엔이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틈을 주면 한 줌 연기처럼 흩어질까 두려운 듯했다.
로제트는 그의 품에 갇힌 채 마른침을 삼켰다.
“너는 누구냐.”
카이엔이 짓씹듯 물었다.
“대체 누구이기에 내 심연까지 들어와 나를 구하는 것이냐. 현실의 너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갈증이 묻어 있었다.
로제트는 긴장감을 억누르며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분홍빛 눈동자에 특유의 능청스러운 빛이 돌아왔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전하의 꿈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치우러 온 청소부…… 아니, 꿈의 길잡이라고요.”
“청소부라.”
“피투성이 전쟁터와 불을 뿜는 괴물까지 키워 두시면 과로사하기 딱 좋습니다. 세상에 어느 미친 환영이 남의 악몽에서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야간 노동을 하겠습니까?”
로제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억울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 당돌한 태도에 카이엔의 입술 틈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독한 불면증 속에서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낮고 허탈한 실소였다.
“청소부라…… 내 목숨을 구하고 이 지옥을 정원으로 뒤바꾼 존재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하군.”
“소박하지만 청소 비용은 결코 소박하지 않을 겁니다. 제 꿈은 은퇴 자금을 넉넉히 챙겨 유유자적 사는 것이거든요. 떼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카이엔의 붉은 눈동자에 짙은 다정함이 번져 나갔다.
“좋다. 얼마든 청구해라. 네가 원한다면 제국의 금고라도 털어 네 발밑에 쏟아부어 주마. 그러니 말해라. 네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물음에 로제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바닥을 덮은 꽃가루 융단이 아침 햇살을 머금은 듯 깜빡이기 시작했다. 마력이 고갈된 로제트의 손끝이 흐릿한 빛무리가 되어 서서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전하, 이제 꿈을 닫아야 합니다. 제 마력도 바닥났고요.”
카이엔이 로제트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굳게 움켜쥐었다.
“가지 마라. 또 이렇게 사라질 셈인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퇴근하는 겁니다. 그래야 내일 밤에 또 청소하러 올 것 아닙니까?”
“……내일 밤에도 오는 것인가.”
“악몽의 쓰레기를 투기하지 않는다면요. 그러니 이제 눈을 감으세요.”
로제트는 남은 마력의 온기를 카이엔의 미간에 얹었다. 손목에 묶인 은실을 마음속으로 세 번 당기자 시야가 분홍빛 빛무리에 휩싸이며 암전되었다.
“하아……!”
로제트는 짧은 숨을 삼키며 번쩍 눈을 떴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푸르스름한 여명이 스며드는 황태자의 침실이었다.
로제트는 안락의자에 파묻힌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현기증이 덮쳐왔다. 손목의 은실은 풀려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살았다……”
로제트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규모로 브레스를 치환하고 흑룡을 몰아내는 일은 막대한 영혼의 소모를 요구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현실의 육신까지 망가질 뻔했다.
바스락.
침대 위에서 비단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트는 얼른 허리를 펴고 흐트러진 옷깃과 앞치마를 매만졌다. 떨리는 손가락은 앞치마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카이엔이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매일 아침 그를 옥죄던 고통의 흔적은 없었다. 두통도 충혈된 눈동자도 보이지 않았다.
손목의 저주 실금은 옅은 잿빛으로 가라앉았고 가슴을 짓누르던 쇳덩이 같은 무게감도 사라져 있었다.
카이엔의 붉은 눈동자가 안락의자를 향했다.
“……로제트.”
카이엔이 맨발로 다가왔다. 그의 커다란 체구가 로제트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하, 기상하셨습니까.”
카이엔은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창백한 뺨과 핏기 가신 입술을 응시하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얼굴이 몹시 창백하군. 입술도 바짝 말라 있다.”
“전하의 곁을 밤새 뜬눈으로 지키느라 그런 듯합니다. 혹여 악몽에 시달리실까 염려되어 눈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로제트는 태연하게 시녀의 가면을 둘러썼다. 카이엔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뜬눈으로 지킨 것치고는 안색이 지나치게 흉흉하구나. 마치 밤새 집채만 한 마수와 사투를 벌이고 온 사람처럼 기력이 바닥나 있어.”
카이엔의 붉은 눈동자가 로제트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꿈속에서 품에 안았던 여인의 체온, 목덜미의 맥박, 그리고 이마에 닿았던 시원한 감각. 그 모든 것이 지금 눈앞에 선 하급 시녀의 지친 모습과 완벽하게 겹쳐지고 있었다.
로제트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전하처럼 위압적인 분 곁에서 밤을 새우는 일 자체가 맹수와 대치하는 것만큼 고된 노동입니다. 시녀의 충정을 몰라주시니 서운합니다.”
“말대답 하나는 여전히 청산유수로군.”
카이엔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는 손을 뻗어 로제트의 어깨를 쥐려다 멈추었다. 그녀의 몸이 갈대처럼 아슬아슬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엔의 눈빛에서 차가운 기운이 걷히고 대신 묵직한 배려가 자리를 채웠다.
“오늘 오전 침실 정리는 다른 시녀에게 맡겨라.”
“예?”
“차만 집무실로 올리고 너는 처소로 돌아가 쉬도록 해라. 낮 동안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 말고 잠이나 자 둬라.”
로제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늘 냉혈하던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호의였다.
“하지만 전하, 저는 전담 시녀로서……”
“전담 시녀가 쓰러지면 내 차는 누가 끓이나. 명령이다. 쉬어라.”
그는 옷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뒷모습마저 압도적인 위엄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 어깨에는 광증의 살기가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철컥.
황태자 침실의 육중한 황금빛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의 숨소리가 일제히 멎었다.
근위대 기사장 대리 레온을 비롯한 기사들과 수석 의관 바네를 필두로 한 시종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수면제를 거부한 황태자의 침실 문이 열리는 아침은 늘 피와 파괴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어 나온 카이엔의 모습은 예상을 완벽히 깨부수었다.
황금 견장과 흑모피 망토를 두르고 걸어 나오는 황태자의 자태는 고결하고 당당했다.
흑발 아래 붉은 눈동자는 얼음 호수처럼 맑았으며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제국 최고 통치자의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쿵!
레온이 벼락 맞은 듯 굳어 있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검을 내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뒤따르던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수석 의관 바네는 안경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입을 벌렸다.
“전, 전하……! 어찌 이토록 기운이 맑으실 수가…… 기적입니다!”
수년간 황태자의 영혼을 갉아먹던 광증의 파동이 완벽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웅성거림이 복도를 타고 번져 나갔다.
“황태자 전하의 광증이 씻겨 나갔어!”
“이틀 연속으로 평온한 아침을 맞으시다니!”
황태자궁 전체가 기적의 도래에 들썩였다. 카이엔은 쏟아지는 찬탄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레온에게 닿았다.
“레온.”
“예 전하!”
“황후궁 뒤편 수로와 봉인판을 건드린 자의 행방은.”
낮고 단단한 음성이 복도의 소란을 베어 넘겼다. 레온이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새벽에 도주한 조향 보좌관 에릭을 추적 중입니다. 놈은 남쪽 별궁 인근의 폐쇄 구역으로 숨어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통로를 차단하고 수색대를 급파했습니다.”
카이엔의 눈동자 속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쥐새끼 한 마리도 살아서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라. 내 침실에 저주를 흘려보낸 대가가 무엇인지 뼈마디를 부러뜨려 가며 가르쳐 줄 테니.”
“명령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이 우렁차게 복명했다. 광증이 사라진 황태자는 이전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빈틈없는 지배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한편 열주 회랑 2층 발코니 그늘 속에서는 차가운 시선 하나가 아래를 쏘아보고 있었다.
황태후궁의 선임 시녀 베아트였다.
그녀는 난간을 쥔 손가락에 하얗게 핏기가 가실 만큼 힘을 주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향초와 수로를 통해 저주의 기운을 충분히 불어넣었다. 그런데 눈앞의 카이엔은 제국 최강의 검사다운 완벽한 위용을 되찾고 있었다.
그때 베아트의 시선이 카이엔의 뒤편을 따르는 인물에게 가닿았다.
은제 차 쟁반을 든 채 발걸음을 옮기는 시녀 로제트였다. 창백한 안색과 피로에 젖은 어깨. 어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풍기던 장미 향기가 뇌리를 스쳤다.
‘저 시녀…… 황태자가 안정을 찾은 시점과 저 아이가 들어간 시점이 정확히 일치해.’
베아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황태후에게 당장 이 이변을 고해야 했다. 그녀가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아래층 안뜰 회랑을 가로지르던 카이엔이 불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열주 사이를 가르며 회랑 안으로 거세게 들이쳤다. 탈진해 있던 로제트는 매서운 칼바람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쟁반을 쥔 손끝이 시리도록 굳어졌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로제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이엔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더니 성큼 다가와 어깨에 둘러져 있던 흑모피 망토의 금빛 버클을 거침없이 풀었다.
“……전하?”
로제트가 놀란 순간 훈훈한 온기와 은은한 백단향이 담긴 거대한 망토가 그녀의 가냘픈 어깨 위로 푹신하게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찬 바람이 차단되었다.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이 회랑을 집어삼켰다.
뒤따르던 레온은 숨을 들이켰고 시종들은 경악으로 눈을 의심했다. 황실 문양이 새겨진 황태자의 망토를 일개 하급 시녀에게 둘러주다니.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총애였다.
“전, 전하……! 하급 시녀가 감히 전하의 망토를 두르다니요!”
로제트가 식겁하며 망토를 벗어내려 했다. 그러나 카이엔의 단단한 손이 망토 깃을 쥐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눌러 막았다.
“바람이 차다. 네가 감기라도 걸리면 내 차는 누가 끓이나.”
“그래도 규율에 어긋납니다……”
로제트가 당혹감에 귓가를 붉히며 작게 항변했다.
카이엔은 그런 로제트를 내려다보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의 얼굴이 로제트의 귓가로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졌다. 입술이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오직 그녀만을 울리는 은밀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어젯밤 네가 흩뿌린 분홍빛 꽃가루는 참으로 화려했다.”
쿵!
로제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숨통이 일순 멎었다.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든 채 카이엔을 올려다보았다.
카이엔의 입술 끝이 치명적인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 밤도 기대하지 나의 작은 청소부.”
카이엔은 망토 깃을 가볍게 톡 치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거대한 망토에 파묻힌 채 로제트는 멍하니 굳어 있었다. 멀어지는 카이엔의 등 뒤로 붉은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