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주선의 유령 승객

2화: 항로는 식탁을 기억한다
“레몬을 조금만 더 넣어 줘.” 인터콤의 목소리가 식당에 남았다.
준은 배급표에 등록된 모든 승객을 확인했다. 그 목소리는 누나 백지아의 기록과 비슷했지만, 지아는 30년 전 사고로 사망 처리됐다. 재한은 식당 통신을 끄라고 했다. 준은 스피커의 전원선을 뽑았다. 목소리는 멈췄지만, 그릇 안의 물이 파문을 일으켰다.
다은은 항법실로 돌아가 궤도 자료를 다시 계산했다. 원래 목적지는 목성 외곽 정거장. 현재 진행 벡터는 옛 사고 구역으로 0.02도 기울어 있었다. 자동 보정값은 그 오차를 지우지 않고 확대하고 있었다. “누군가 수동 명령을 보내고 있어요. 명령 기록은 없는데, 항법 장치가 예전 좌표를 목표로 삼아요.”
“30번 좌석에서 신호가 나온다면?”
“통신선이 봉인 구역 뒤로 지나갑니다. 하지만 좌석 아래 배관은 이미 끊겼어야 해요.”
준은 누나의 조리표를 펼쳤다. 레몬 보리죽은 수분을 많이 넣고 낮은 온도에 오래 익히는 음식이었다. 사고 당시 선내 압력이 떨어졌고, 승객들에게 수분을 공급하려면 이 메뉴가 적합했다. 그는 누나가 승객 한 명을 위해 요리를 가져갔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이름이 없다면 누나는 누구에게 음식을 줬을까.
재한은 조리실 창고를 잠갔다. “더 이상 식량을 쓰면 안 돼. 식량이 줄면 전 승객 배급을 깎아야 한다.”
준은 오늘 사라진 한 끼를 자기 배급에서 빼겠다고 했다. 재한은 그 선택이 반복되면 준이 먼저 쓰러질 거라고 말했다. “한 사람을 찾겠다고 백 명의 몫을 줄일 수는 없어.”
“그럼 당신은 뭘 숨기고 있죠?”
재한은 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준은 그가 지나간 뒤 냉동 창고에서 레몬 껍질이 든 작은 봉지를 발견했다. 재한의 보관 코드가 붙어 있었지만, 유통기한은 30년 전이었다. 봉지 안쪽에는 아직 향이 남아 있었다. 준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밀폐 용기에 넣었다.
다은은 구형 항법 단말기에서 삭제된 궤도 조각을 복원했다. 노마는 30년 전 사고 좌표에서 구조 신호를 받은 뒤, 항로를 바꾼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담당자는 즉시 원래 항로로 복귀했다. 그 사이 승객 명단 하나가 삭제됐고, 구조 신호는 잡음으로 분류됐다. “그때 이 배는 누군가를 두고 떠났어요.”
준은 누나도 그 신호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식사를 전하려고 갔다면, 늦기 전에 문을 두드렸겠죠.”
“문이 열리면 감압이 시작될 수 있어요.”
“그걸 알면서도 갔을까요?”
다은은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항로 조절 레버 위에서 떨렸다. 30년 전 사고 직후, 다은의 어머니도 구조 대기 명단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이 항해사가 된 이유가 그 빈칸을 찾기 위해서라고 털어놓았다. 그동안은 데이터만 믿었다. 이제 데이터가 누군가를 지운 흔적을 보고 있었다.
준은 조리실의 열선으로 레몬 보리죽을 만들었다. 작은 냄비 하나 분량, 오늘 배급에서 따로 뺀 양이었다. 그는 봉인 좌석까지 들고 가서 바닥에 놓았다. 문을 열지 않은 채, 냄새가 통풍구로 흐르도록 약한 팬을 돌렸다. 다은은 압력계와 통신선을 감시했다. 재한은 멀리서 지켜봤다.
십 분 뒤 그릇이 가볍게 움직였다. 누군가 안쪽에서 받친 것이다. 준은 그릇을 당기지 않았다. “누나가 맞아?”
대답 대신 통풍구에서 종이가 밀려 나왔다. 거기에는 ‘지아는 나를 빼냈어’라고 적혀 있었다. 글씨는 떨리고, 종이는 기름에 젖어 있었다. 준은 그 이름이 누나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재한이 급히 다가와 종이를 빼앗으려 했다. 다은이 그의 앞을 막았다. “이름을 지운 건 당신이에요?”
재한은 한참 버티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날 구조대가 들어왔지만, 문 안쪽에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재한은 배의 산소가 부족해 출입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지아는 문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끌어내려 했고, 재한은 그때 구조 신호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는 지아를 구하지 못했고, 살아남은 사람을 명단에서 지웠다.
“왜요?” 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사람이 배에 남으면 더 많은 사람이 위험해진다고 믿었어.”
“그 사람은 살아 있나요?”
“모르겠어.”
30번 자리의 봉인등이 깜박였다. 항로가 사고 좌표에 가까워질수록 선체 진동이 커졌다. 다은은 현재 경로를 유지하면 세 시간 뒤 파편 지대를 통과한다고 경고했다. 좌석을 열어 신호를 확인하려면 항로를 바꿔야 했다. 승무원 합의가 필요했다. 재한은 반대했고, 준은 식사 한 끼를 더 잃더라도 사람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식당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비상등만 붉게 켜지고, 봉인된 좌석 안에서 두드림이 났다. 이번에는 세 번이 아니라, 네 번이었다.
“준아.” 인터콤에서 누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 애를 깨우지 마.”
다은은 좌석 뒤의 통신 회선을 추적하기 위해 항법실에서 휴대형 탐지기를 가져왔다. 탐지기는 벽면을 따라가다 식당 바닥에서 멈췄다. 회선은 봉인 좌석이 아니라 조리실의 냉각고 아래로 이어졌다. 준은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 누나가 일하던 시절부터 쓰던 낡은 냉동고였다. 외부 케이스에는 30년 전 사고 당시 교체됐다는 정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준이 냉각고를 비우자 뒤쪽에서 작은 구멍이 드러났다. 구멍은 사람이 통과할 수 없지만, 통신선을 끌어오는 데는 충분했다. 안쪽에는 이름 없는 조리 카드가 끼어 있었다. 카드는 재한의 코드로 승인된 식량 반출 기록이었다. 사고 당일, 재한은 비상 배급 중에 한 사람 몫을 따로 떼어 냈다.
재한은 돌아오자마자 카드부터 뺏으려 했다. 다은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이 혼자 숨긴 건가요?”
“그때는 식량을 어디로 보냈는지 말할 수 없었어.”
“누가 살아 있는지 알았으면서도 명단에서 지웠어요?”
“명단에 넣으면 그 사람을 찾으러 배를 되돌려야 했어. 지아가 나가서 구해 올 거라 생각했지.”
“돌아오지 않았잖아요.” 준이 말했다.
재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선내 경고가 울렸다. 항법 편차가 급격히 커졌다. 다은은 누군가 구형 회선에 접속해 자동항법을 과거 좌표로 고정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전원을 끊으려 했지만, 이 회선은 통신과 생명 유지 장치가 함께 묶여 있었다. 무턱대고 자르면 냉동 구역의 온도가 올라간다.
준은 냉각고를 다시 열고 오래된 배선에 손을 넣었다. 전류가 흐르고 있어 장갑이 뜨거워졌다. 다은이 그를 말렸다. “네가 감전되면 조리실은 물론 항법도 못 고쳐.”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선부터 분리하지 말고, 신호가 어디로 가는지 찾아.”
다은은 탐지기를 들고 통로를 따라갔다. 신호는 식당을 지나 선체 외벽 쪽으로 이어졌다. 준은 신호가 끊기지 않도록 조리실의 전력을 낮추며 따라갔다. 수송선은 몸을 기울였고, 그릇과 칼이 서랍 안에서 부딪쳤다. 조리대 위 냄비가 미끄러졌다. 준은 손으로 받으려다 손바닥을 데었다. 물이 쏟아지고, 가열판이 꺼졌다.
선체 통로 끝에는 응급 정비구가 있었다. 이곳은 사고 이후 봉인됐고, 그 안에 낡은 산소 호스가 남아 있었다. 호스의 반대쪽은 30번 좌석 안쪽으로 연결돼 있었다. 누군가 30년 동안 좌석을 열지 않고도 산소를 공급했다면, 정기적으로 필터와 식량을 교체했어야 했다.
다은은 항법망의 신호가 외부에서 오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정비구 단말기를 연결했다. 화면에는 ‘유지보수 승인: 백지아’가 떴다. 날짜는 사고 다음 날로부터 2주 뒤였다. 지아가 살아서 정비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었다. 재한은 화면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날 나는 그녀가 죽었다고 서명했어.”
“그럼 그 서명은 틀렸네요.” 준이 말했다.
“혹은 누군가 내 계정을 썼겠지.”
재한은 변명처럼 말을 뱉고, 곧 고개를 떨궜다. 다은은 기록을 복사했지만, 바로 공개하지 않았다. 승객들에게 잘못된 희망을 줄 수 있었다. 준은 손바닥의 화상을 찬물에 식혔다. 누나가 살아 있었든 아니든, 누군가는 그녀의 이름으로 식량을 옮겼고 항로를 유지했다. 그 흔적을 따라가려면 좌석을 열기 전에 더 많은 사람의 동의가 필요했다.
선내 조명은 파편 지대 경고 때문에 붉게 바뀌었다. 자동항법은 목적지 경로로 되돌아가는 대신, 사고 좌표를 향해 더 크게 꺾였다. 좌석 안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재한 씨, 이번에는 문을 열어 줘요.”
준은 누나가 남긴 조리표의 얼룩을 확대해 보았다. 그을음이 아니라 산소 필터의 탄소 먼지였다. 사고 당일 조리실 환기구가 고장 났을 때 묻은 흔적이다. 그는 지아가 그 메뉴를 만들면서 자신의 몫을 줄였다는 점을 알아챘다. 조리표에는 2인분으로 적혀 있었지만, 배급 계산은 1인분만 잡혔다. 누나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건네면서 자기 몫으로 처리한 것이다.
재한은 그 사실을 알고도 장부를 고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날 추가 배급을 공개하면 수송선의 배급량이 재산정되고, 구조 대기자 전원이 위험 등급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을 살리려다 모두를 굶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이름을 복구할 기회는 있었다. 그는 그것을 계속 미뤘다.
준은 그의 말을 듣고도 용서한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레몬 조각을 세어 조리표에 붙였다. 다은은 항법실에서 오래된 회선이 향하는 좌표를 찾아냈다. 그쪽으로 통신을 보내자 돌아온 것은 잡음뿐이었지만, 음성 파형의 시작 부분에 사람의 숨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