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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9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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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성수 제조법

아침 안개가 걷힌 갈고리 골짜기는 여전히 신음하고 있었다.

제3갱도의 붉은 마력 핵은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주민들의 육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임시로 세운 거적 천막 안에서는 밤새 끊이지 않는 기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쿨럭! 컥, 쿨럭!”

토마스는 마른 짚 위에 엎드려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갱도 안에서 들이마신 독기 탓에 입술은 바짝 말라 터졌고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옆에 누운 다른 두 광부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피부 밑으로 거미줄 같은 검붉은 핏줄이 번져 있었다.

“어쩌면 좋습니까…… 탕약을 세 사발이나 먹였는데도 열이 내리질 않습니다.”

마렌이 피 묻은 물수건을 짜내며 울먹였다. 그의 발치에는 바닥을 드러낸 약초 상자가 뒹굴고 있었다.

“말린 엉겅퀴도, 뱀눈풀도 이제 세 뿌리밖에 안 남았습니다. 마을 창고의 곡물도 사흘 치가 전부입니다. 이대로라면 갱도를 다시 파기는커녕 열흘도 못 버티고 모두 굶거나 앓아눕게 됩니다.”

장부를 든 마렌의 손이 하얗게 질려 떨렸다.

천막 입구에 선 레오나가 허리춤의 대검 자루를 꽉 쥐었다.

“인근 숲으로 사냥을 다녀오겠다. 산돼지나 들짐승이라도 잡아 오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안 됩니다. 레오나 기사님. 바르텐 영주령의 순찰대가 협곡 너머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냥을 나갔다가 마주치기라도 하면 교단의 위치가 발각됩니다.”

마렌의 절망 섞인 만류에 레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천막 구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일은 조용히 관자놀이를 짚었다.

‘제길, 갱도에서 영웅 놀이 한번 멋지게 끝냈더니 이번엔 현실적인 빚잔치가 기다리고 있었네.’

속이 타들어 갔다.

광부 세 명을 구해내며 교단의 결속력은 하늘을 찔렀지만 신앙심만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당장 먹을 식량이 없고 마실 약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신도가 굶어 죽고 병들어 죽으면 교단은 껍데기만 남고 혼자 남겨진 사기꾼은 영주나 신전의 손에 넘어가 단두대로 직행할 터였다.

‘돈이 필요해. 식량도, 약재도 전부 은화가 있어야 사 오든 밀수를 하든 할 게 아닌가.’

하지만 갈고리 골짜기의 빈민들에게서 뜯어낼 돈 따위는 없었다. 그들이 가진 거라곤 흙먼지와 목숨뿐이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돈을 끌어와야 했다. 사람들의 지갑을 스스로 열게 만들고 마차째로 곡식을 싣고 오게 만들 절대적인 미끼가 필요했다.

‘병을 고치는 기적…… 그래, 약이다.’

카일의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판타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고 누구나 목을 매는 상품. 바로 성수(聖水)였다.


카일은 임시 제단 뒤편의 낡은 조리용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리대 위에는 마을에서 긁어모은 몇 안 되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쓴맛이 지독해 가축도 잘 안 먹는 산엉겅퀴 말린 것, 갱도 입구 바위에서 긁어온 푸른 형광 이끼 그리고 징수대 마차에서 노획했던 귀한 백설탕 반 자루였다.

‘정통 신전의 성수가 왜 비싼가? 신성력이 담겨 있어서 잡귀를 쫓고 병을 낫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지.’

하지만 카일에게는 성스러운 신성력 따위는 단 한 방울도 없었다.

대신 그에게는 다른 게 있었다.

‘어이, 파멸의 별. 자냐?’

카일이 속으로 나직하게 부르자 가슴 한구석에서 검은 불꽃 같은 기운이 꿈틀거렸다.

―……감히 이 위대한 포식자를 함부로 깨우느냐. 어제 삼킨 마력 핵의 맛이 썩 훌륭하여 깊은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어제 대량의 붉은 음기를 집어삼킨 덕분인지 악신의 목소리에는 제법 느긋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배부르게 처먹었으면 밥값을 해야지. 네 힘 좀 조금만 빌리자.’

―내 힘을? 또 저 바깥의 버러지들을 속여먹으려는 수작이냐?

‘속이는 게 아니라 상부상조하는 거지. 네가 갱도에서 독기를 빨아들일 때 쓰는 그 마력 분해 파동 있지? 그걸 아주 미세하게 물 한 바가지에 찻숟가락만큼만 흘려 넣어 봐.’

파멸의 별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하! 고대의 신격을 한낱 물장사 약장수로 쓰겠다고? 오만한 필멸자 놈. 내 권능은 세계를 삼키고 마력을 파괴하는 파멸의 숨결이다. 그런 천박한 물장난에 쓸 힘 따위는 없다!

‘아, 그러셔? 그럼 관둬라.’

카일은 코웃음을 치며 설탕 자루를 툭툭 쳤다.

‘마을 놈들 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으면 신앙이고 뭐고 다 끝장이야. 신도가 없으면 너한테 바쳐질 믿음도 없고 새로운 마력도 못 먹어. 넌 다시 그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서 백 년 천 년 굶주리게 되겠지. 난 그냥 목 매달려 죽으면 그만이지만 너는 어쩌냐?’

―……크으윽.

정곡을 찔린 악신이 분을 삭이며 이를 갈았다.

―교활한 혓바닥을 가진 사기꾼 놈. 네놈의 영혼을 찢어발기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알면 빨리 협조해. 길게 갈 것도 없어. 딱 저 물병에 손가락 담글 테니까 아주 약하게 정화 파동만 뿜어.’

카일은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지폈다.

먼저 산엉겅퀴와 형광 이끼를 빻아 넣었다. 엉겅퀴는 해독과 염증 완화에 효과가 있는 평범한 민간 약초였고 형광 이끼는 어두운 곳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시각 효과용이었다.

물이 끓어오르며 약초 향이 퍼지자 카일은 귀한 백설탕을 듬뿍 쏟아부었다.

휘휘 저어 설탕을 완전히 녹이자 쓰디쓴 약초 물이 달콤 쌉싸름한 향을 풍기며 걸쭉해졌다.

‘몸이 아플 때 가장 직효가 나는 건 사실 포도당과 따뜻한 수분 보충이지.’

전생과 사기꾼 시절의 경험에서 나온 철저한 현실적 계산이었다.

영양실조와 탈수에 시달리는 빈민들에게 고농도의 당분과 전해질, 따뜻한 수분만큼 즉각적인 기력을 불어넣는 약은 없었다. 거기에 엉겅퀴의 소염 성분이 목과 폐를 진정시킬 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적'이 되지 못한다.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카일은 한 김 식힌 유리병에 맑게 거른 약초 설탕물을 담았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병 입구에 살짝 담갔다.

‘지금이다. 쏴라.’

―쯧!

악신이 혀를 차며 미세한 파동을 토해냈다.

찌릿!

카일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실바람 같은 기운이 빠져나가 설탕물 속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푸른빛을 띠던 액체가 투명하게 정제되더니 물방울 표면에서 은하수처럼 은은한 백색 별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달콤한 설탕물 속에 흑마법과 독기를 분해하는 악신의 미세한 포식 파동이 완벽하게 용해된 것이었다.

카일은 병을 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영롱한 유리병 안에서 별빛 가루가 흩날리는 듯한 시각적 효과와 함께 코를 간지럽히는 향긋한 단내가 풍겼다.

‘완벽해.’

카일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사기꾼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불경하며 확실한 만병통치약.

‘성별의 거룩한 은총, 성수(聖水)’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카일은 성수 세 병을 들고 환자들이 누워 있는 치료 천막으로 향했다.

천막 안에는 여전히 무거운 침묵과 신음만이 가득했다. 마렌은 촛불을 켠 채 환자들의 이마를 짚고 있었고 레오나는 벽에 기대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카일 님……?”

마렌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가 카일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서 은은하게 일렁이는 푸른빛과 백색의 별빛. 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교주님, 그 손에 들린 것은……?”

“성별께서 이 땅의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내리신 은총입니다.”

카일은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토마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토마스 형제여.”

카일의 묵직하고 따뜻한 중저음이 천막 안에 울렸다.

의식을 잃고 헐떡이던 토마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에 은빛으로 빛나는 카일의 모습이 비쳤다.

“교, 교주님…… 가슴이…… 숨이 쉬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어둠이 흩어지고 별의 빛이 형제의 숨결을 채울 것입니다.”

카일은 무릎을 꿇고 토마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받쳤다. 그리고 유리병의 마개를 열어 달콤한 성수를 그의 입술 사이로 천천히 흘려 넣었다.

꿀꺽, 꿀꺽.

따뜻하고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토마스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커헉……!”

토마스의 목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토마스 아저씨!”

마렌이 경악하여 다가서려 하자 레오나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기다려라. 방해해서는 안 된다.”

레오나의 시선은 카일의 손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카일은 태연한 표정으로 토마스의 흉부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미세한 마력 파동을 일으켜 환각과 열감을 동시에 주입했다.

실제로는 성수 속에 녹아 있던 악신의 정화력이 토마스의 기관지와 폐에 달라붙어 있던 붉은 음기 찌꺼기를 사정없이 먹어치우고 있었다. 동시에 고농도의 설탕과 엉겅퀴 약효가 탈진한 혈관을 타고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우웨에엑!”

토마스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바닥에 시커먼 핏덩어리와 가래를 토해냈다.

폐를 틀어막고 있던 흑마법 오염 찌꺼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피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치이익 소리와 함께 하얗게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허억…… 허억……!”

시커멓게 죽어가던 토마스의 뺨에 순식간에 불그스레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거칠게 쌕쌕거리던 숨소리가 거짓말처럼 편안해졌고 온몸을 덮고 있던 검붉은 핏줄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토마스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과 목을 매만졌다.

“숨이…… 숨이 쉬어져요! 가슴을 짓누르던 쇳덩이가 사라졌습니다!”

토마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카일의 발치에 엎드렸다.

“교주님! 살아났습니다! 제 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지켜보던 마렌의 턱이 떡 벌어졌다.

“말도 안 돼…… 흑마법의 독기가 단 한 모금에 정화되다니……!”

카일은 남은 두 병의 성수를 옆에 누운 다른 두 광부에게도 차례로 먹였다.

그들 역시 검은 찌꺼기를 토해낸 뒤 언제 앓아누웠냐는 듯 생기를 되찾고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다.

천막 안은 순식간에 눈물과 환희의 도가니로 변했다.

레오나는 두 손으로 칼자루를 쥔 채 가슴에 대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정통 신전의 대사제들이 은식판을 두드리며 영창하던 그 어떤 기적보다도 빠르고 거룩하다. 교주님의 손이 닿으면 평범한 물조차 신의 피가 되는구나.’

레오나의 푸른 눈동자 속에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맹세가 새겨졌다.


기적의 소식은 번개보다 빠르게 골짜기 전체로 퍼져나갔다.

오후가 되자 임시 제단 앞 공터에는 갈고리 골짜기의 모든 주민이 모여들었다. 아이를 안은 여인부터 노인, 부상당한 광부들까지 모두가 카일의 제단만을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카일은 제단 위에 서서 군중을 굽어보았다.

그의 앞에는 나무통에 가득 채워진 푸른빛의 성수와 수십 개의 작은 도자기 호리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카일은 손을 들어 군중을 진정시켰다. 공터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성별의 형제자매들이여.”

카일의 목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 태어났으나 결코 어둠 속에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별께서는 우리에게 병마를 이겨내고 스스로 일어설 힘을 주셨습니다.”

카일은 도자기 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 성수는 병든 자를 치료하고 지친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첫 번째 원칙은 구휼입니다. 골짜기의 형제자매들에게는 매일 한 잔씩의 성수가 무상으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교주님 만세!”

“성별교 만세!”

주민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카일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우리의 두 번째 원칙은 자립입니다. 베풂을 받기만 하는 자는 영원히 노예로 남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성수로 우리의 터전을 지키고 제3갱도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카일은 뒤편에 선 마렌에게 눈짓했다.

마렌이 엄숙한 표정으로 장부를 펼치고 선언했다.

“오늘부터 갈고리 골짜기 밖에서 찾아오는 인근 갱도의 광부들과 유랑 상인들에게는 성수 한 병당 은화 반 닢, 혹은 그에 상응하는 곡물과 약재를 교단 발전 헌금으로 받을 것입니다!”

공짜로 퍼주면 교단은 망한다.

골짜기 내부 주민들에게는 무료로 배급해 충성과 노동력을 확보하고 외부인들에게는 돈과 식량을 받고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

그야말로 사기꾼 시절 갈고닦은 완벽한 종교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그날 해 질 무렵부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3갱도에서 살아 돌아온 광부들의 이야기를 들은 인근 다른 광산의 노동자들과 소문을 들은 떠돌이 행상인들이 협곡 입구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이 물을 마시면 진폐증과 광산 독기가 씻겨 나간다는 게 정말이오?”

“여기 은화 한 닢이 있소! 제발 우리 어머니에게 먹일 성수 두 병만 주시오!”

“우리는 밀가루 세 포대를 가져왔소! 성수로 바꿔 주시오!”

마렌의 천막 앞에는 은화와 곡식 자루를 든 외부인들이 줄을 섰다.

짤랑, 짤랑!

교단의 나무 궤짝 안으로 은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닥을 드러냈던 곡물 창고에는 밀가루 포대와 훈제 고기, 건초가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마렌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장부를 적으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 하루 만에 은화 사십 닢과 곡식 열 포대가 모였습니다……! 교주님, 이건 기적입니다!”

제단 뒤 그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카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아주 순조로워. 이 페이스대로 딱 한 달만 성수 팔아치우면 황도로 튈 도주 자금은 넉넉히 모이겠어.’

풍족한 식량, 든든한 은화 그리고 자신을 성자로 떠받드는 충직한 신도들.

모든 것이 사기꾼 카일의 계산대로 완벽하게 굴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카일은 아직 알지 못했다.

성수를 사 들고 골짜기를 빠져나간 유랑 상인들의 입을 통해 '변방 골짜기에 죽은 자도 살려내는 기적의 성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바르텐 영주령을 넘어 제국 수도로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소문의 끝이 태양신전의 가장 서슬 퍼런 이단 심문관의 귀에 닿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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