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8화: 붉은 광산의 비밀
바위에 박힌 검은 밀랍 표식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바르텐 영주령의 징수대가 협곡을 빠져나간 직후였다. 볼코프가 새겨 두고 간 부서진 원과 별 문양은 식어 굳지 않았다. 오히려 흙먼지를 빨아들이며 핏빛으로 붉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카일 님, 바위가……!”
마렌의 외침과 동시에 발밑에서 묵직한 진동이 울렸다.
쿵.
낮은 타격음이 협곡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땅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짐승이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불쾌한 파동이었다.
카일은 협곡 입구의 바위로 다가갔다. 검은 표식 주변으로 실핏줄 같은 붉은 균열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 균열의 끝은 정확히 골짜기 안쪽의 폐쇄된 광산 갱도를 가리켰다.
―열린다. 오래된 찌꺼기가 깨어난다.
가슴 한가운데서 파멸의 별이 낮게 속삭였다. 징수대 앞에서는 겁에 질린 듯 움츠러들었던 악신이 이번에는 탐욕스러운 갈증을 드러내며 혀를 찼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저 표식이 갱도를 건드린 건가?’
―건드린 것이 아니다. 저들이 닫아 둔 봉인의 자물쇠를 비튼 것이다.
그 순간 절벽 위 망루 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메아리쳤다.
“살려 주십시오! 갱도가, 제3갱도가 무너졌습니다!”
흙투성이가 된 채 달려온 이는 척후조의 로웨였다.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손톱은 부러져 흙이 잔뜩 끼어 있었다.
“로웨, 진정해라. 무슨 일이지?”
레오나가 달려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로웨는 헐떡이며 갱도 쪽을 가리켰다.
“징수대가 물러난 뒤에 혹시 갱도 입구 지지대가 흔들렸나 보러 토마스 아저씨와 광부 두 명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닥이 꺼지더니 붉은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붉은 연기라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시커먼 안개였습니다! 토마스 아저씨와 동료들이 막장 안쪽에 갇혔는데 입구가 무너져 내리고 독기가 차오르고 있습니다!”
공터에 모여 있던 주민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토마스가…… 우리 남편이 거기 있단 말이에요!”
“안 돼, 그 안개에 닿으면 살점이 썩어 나간단 말이다!”
비명과 울음소리가 뒤섞이며 공터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몇몇 광부들이 곡괭이를 들고 뛰어가려 했지만 갱도 입구 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안개를 보자마자 기침을 토하며 뒤로 나뒹굴었다.
“크흑!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어!”
“유황 가스가 아니야! 마력이 뒤엉킨 저주다!”
카일은 갱도 입구를 노려보았다.
동굴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안개는 평범한 가스가 아니었다. 공기 중에 흩어지지 않고 뱀처럼 똬리를 틀며 지면을 기어 다녔다. 풀과 바위가 안개에 닿자마자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미치겠군. 저런 데를 어떻게 들어가?’
카일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사기꾼이지 영웅이 아니었다. 칼질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마법이라곤 눈속임 환각술이 전부였다. 저 독기 구덩이에 발을 들이는 순간 폐가 녹아내려 십 초도 못 버티고 죽을 게 뻔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지금 여기서 물러서서 광부들이 갱도 안에서 몰살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방금 전 피땀 흘려 세운 ‘성별교’의 권위는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주민들은 카일을 무능한 가짜라 여길 것이고 흩어진 주민들은 영주령 기병이나 신전의 사냥개들에게 도륙당할 터였다. 주민들이 사라지면 카일의 목숨줄도 끝이었다.
‘살리려면 들어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크크크, 망설일 게 무엇이냐.
파멸의 별이 뇌리를 긁어댔다.
―저 붉은 안개는 오래전 심연을 누르던 자들이 남긴 부패한 마력의 찌꺼기다. 네놈 같은 필멸자에게는 맹독이지만 내게는 훌륭한 안주거리에 불과하지.
‘네가 저걸 다 먹어 치울 수 있다고?’
―네놈의 육신을 통로로 열어라. 저 안개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켜 주마. 대신 그 대가로 네놈의 살과 피가 얼어붙는 고통을 맛보게 되겠지만 말이다.
카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고통 따위는 교수대에서 목이 매달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카일은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그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지워지고 세상 그 어떤 어둠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성자의 위엄이 자리 잡았다.
“마렌 기록관.”
카일의 묵직한 중저음이 울부짖던 공터를 갈랐다.
“예, 예! 교주님!”
“물에 적신 천과 정제된 유황 가루 그리고 튼튼한 밧줄을 가져오십시오. 레오나 기사는 각목과 쐐기를 챙겨 나를 따르십시오.”
레오나의 푸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카일, 설마 직접 들어가겠다는 건가? 저 안개는 단순한 독이 아니다. 정통 신전의 퇴마 사제들도 결계 없이 들어가지 못하는 흑마법 오염이다!”
“그렇기에 내가 가야 합니다.”
카일은 제단 위에 놓여 있던 감색 망토를 힘차게 휘감았다.
“성별교의 첫 번째 기둥은 구휼이며 우리의 첫 번째 진리는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입니다. 저 어둠 속에 갇힌 형제들을 버린다면 우리가 세운 제단은 한낱 돌무더기에 불과합니다.”
카일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주민들의 울음이 멎었다. 절망에 차 있던 광부들의 눈에 경악과 경외가 동시에 차올랐다. 자신들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던 세상에서,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저주의 구덩이로 뛰어들겠다는 지도자는 난생처음이었다.
“교주님……!”
마렌이 떨리는 손으로 젖은 천과 밧줄을 바쳤다.
카일은 젖은 천을 입에 두르고 갱도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레오나. 내 뒤를 지키십시오. 토마스와 광부들을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나옵니다.”
레오나는 대검을 고쳐 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알겠다. 네 목숨은 내가 지킨다.”
갱도 안쪽은 지옥 그 자체였다.
발을 들이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붉은 안개가 시야를 가로막았고 벽면을 타고 흐르는 썩은 물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치이익!
천에 닿은 붉은 기운이 옷감을 좀먹기 시작했다.
‘제기랄, 숨이 안 쉬어져!’
카일의 가슴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다리가 풀리려는 찰나였다.
―지금이다. 문을 열어라!
파멸의 별이 카일의 영혼을 강하게 흔들었다.
카일은 멈추지 않고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붉은 안개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형성되었다.
후우우웅!
공기를 찢는 기이한 흡기음과 함께 갱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붉은 안개가 카일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독기가 몸속으로 들어오자 뼛속까지 시린 오한이 몰려왔다. 얼음 송곳 수만 개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헤집는 듯한 격통이었다. 카일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면 뒤따라오는 레오나에게 정체가 들통난다.
카일은 이를 악물고 악신의 흡수력을 더 강하게 끌어올렸다.
‘전부 삼켜! 한 톨도 남기지 말고 처먹어라!’
―크하하하! 맛이 아주 진하구나!
파멸의 별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마력을 게걸스럽게 집어삼켰다. 카일의 전신을 감싼 검은 기류가 붉은 안개를 찢어발기며 길을 열었다.
뒤따라오던 레오나는 눈앞의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눈앞의 청년은 거룩한 별의 대리자처럼 보였다. 흑마법의 유독 가스가 그에게 닿는 족족 소멸하여 사라지고 있었다. 어떤 보호 주문도 영창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육신과 권능만으로 저주를 정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성력을 방출하는 게 아니라 어둠 그 자체를 흡수해 소멸시키고 있어…… 대체 어떤 차원의 권능이란 말인가.’
레오나의 눈빛에 깃든 충성과 경외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앞입니다! 무너진 암석 틈새에서 소리가 납니다!”
레오나가 소리쳤다.
제3갱도 막장 앞이었다. 커다란 암석과 부러진 지지대가 갱도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고 그 틈새로 붉은 피고름 같은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토마스! 안에 있습니까!”
카일이 외치자 바위 너머에서 희미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살려…… 교주님…… 살려 주십시오……!”
“레오나, 바위를 부수세요!”
“맡겨라!”
레오나가 기합을 내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묵직한 참격이 암석을 가르고 파편을 날려 보냈다. 틈이 벌어지자 카일은 즉시 안으로 몸을 던졌다.
막장 안쪽에는 세 명의 광부가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피부는 이미 검붉은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고 호흡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광부들이 파헤치던 막장 깊은 곳의 암벽에 거대한 균열이 가 있었다. 그 균열 한가운데에 부서진 원과 십자가 모양의 고대 문양이 새겨진 석판이 박혀 있었고 그 틈에서 주먹만 한 붉은 마력 덩어리가 박동치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쿵, 쿵 뛰며 붉은 독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저건…… 마력 핵인가?”
레오나가 검을 세우며 경계했다.
“광부들을 먼저 데리고 나가세요! 여긴 내가 막습니다!”
“하지만 카일, 저 핵이 터지면 갱도 전체가 붕괴한다!”
“내가 정화할 수 있습니다! 어서!”
카일의 단호한 일갈에 레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쓰러진 광부 두 명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나머지 한 명을 가슴에 안아 들었다.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 네가 죽으면 이 사람들도 살 수 없다!”
레오나가 광부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홀로 남은 카일은 붉은 마력 핵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연기가 아니라 농축된 마력 덩어리였다. 저게 폭발하면 골짜기 절반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야, 악신! 저것도 처먹을 수 있냐?’
―저것은 심연의 심공을 막던 고대 쐐기의 파편이다. 누군가 겉면을 긁어내 마력을 폭주시켰군. 아주 달콤한 정수다!
‘헛소리 말고 빨리 흡수해!’
카일은 양손을 뻗어 붉게 박동하는 석판을 짚었다.
화아아악!
그 순간 붉은 빛이 카일의 양팔을 타고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참지 못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력의 폭풍이 카일의 영혼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동시에 카일의 뇌리 속으로 낯선 환영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얀 로브를 입은 사제들이 피를 흘리며 도망치는 광경. 거대한 황금빛 신전이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 그리고 누군가가 검은 외투를 입고 갱도 석판에 새겨진 봉인을 끌로 파내며 비웃는 뒷모습이었다.
‘이건…… 과거의 기억인가? 이 광산의 오염은 자연재해가 아니었어!’
누군가 고의로 봉인을 훼손해 재앙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내게 넘겨라! 찌꺼기 따위가 감히 나를 거스르려 하느냐!
파멸의 별이 맹렬하게 포효했다.
카일의 손바닥에서 칠흑 같은 암흑의 소용돌이가 터져 나왔다. 붉은 마력 핵이 비명을 지르듯 뒤틀리더니 순식간에 찌그러지며 카일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지지직!
붉은빛이 완전히 꺼졌다.
지독하던 썩은 냄새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갱도 안에는 서늘하고 맑은 바람만이 감돌았다. 붉게 맥동하던 석판은 평범한 회색 바위로 변해 바스러져 내렸다.
“하아…… 하아…….”
카일은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얼음물에 담긴 듯 떨려왔고 손끝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악신이 트림을 하듯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배가 부르구나. 하지만 조심해라, 사기꾼 놈. 저 봉인을 뜯어낸 자들이 머지않아 이 냄새를 맡고 찾아올 테니.
‘입 닥쳐…… 골치 아프니까…….’
카일은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일어섰다.
몸은 만신창이였지만 쓰러질 수는 없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관객들이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갈고리 골짜기 공터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임시 제단 앞에 모인 주민들은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레오나가 세 명의 광부를 짊어지고 나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카일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카일 님…… 제발 무사히…….”
마렌이 촛불을 든 채 갱도 쪽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토마스를 비롯한 광부들은 마렌이 바른 약초와 맑은 공기 덕분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그들은 눈을 뜨자마자 카일이 어디 있느냐며 갱도를 바라보았다.
“교주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혼자 남으셨다고?”
토마스의 굵은 눈물방울이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로 그때 갱도 어둠 속에서 뚜벅, 뚜벅 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민들의 고개가 일제히 들렸다.
어두운 동굴 입구를 헤치고 감색 망토를 휘감은 청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먼지와 그을음이 묻어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흔들림이 없었고 얼굴에는 자애롭고 고결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갱도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안개는 거짓말처럼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카일 님!”
“교주님이 살아 돌아오셨다!”
공터가 뒤흔들릴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주민들이 일제히 달려와 카일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토마스와 광부들은 기어가듯 다가와 카일의 망토 자락을 붙잡고 통곡했다.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저주받은 지옥에서 저희를 건져내셨습니다!”
카일은 떨리는 손을 숨기며 토마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일어나십시오, 형제여. 별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습니다. 어떤 저주도 우리의 터전을 삼킬 수 없습니다.”
카일의 선언에 주민들은 가슴을 치며 환호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믿음과 감사의 에너지가 또다시 카일의 가슴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차갑게 식어 있던 카일의 몸이 따뜻하게 덥혀지며 악신의 냉기가 녹아내렸다.
카일은 제단 옆에 선 마렌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명했다.
“마렌 기록관.”
“예, 교주님!”
“장부를 펼치십시오. 오늘 세 명의 광부가 살아 돌아왔으며 제3갱도의 독기가 완전히 정화되었음을 한 줄도 빠짐없이 기록하십시오.”
“기록하겠습니다! 성별의 은총을 영원히 남기겠습니다!”
마렌이 눈물을 훔치며 펜을 들었다.
카일은 협곡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바위에 새겨졌던 볼코프의 검은 표식은 빛을 잃고 바스러져 있었다.
하지만 카일의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광산의 봉인을 뜯어낸 검은 외투…….’
수도에서 내려온 수배령과 영주의 징수대, 그리고 갱도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던 심연의 파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음모로 이어지고 있었다.
카일은 제단의 촛불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갑게 읊조렸다.
‘세상이 사기를 치고 있다면, 나도 판을 더 크게 벌려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