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7화: 장부의 칼날
말발굽 소리가 협곡의 바닥을 두드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어온 기병은 열두 명이었다. 낡은 철제 흉갑에는 독수리와 저울이 새겨져 있었고 뒤따르는 마차 두 대에는 빈 자루와 쇠사슬이 함께 실려 있었다.
선두의 뚱뚱한 사내가 말에서 내렸다. 턱 아래로 늘어진 수염에 붉은 침 자국이 묻어 있었다.
“갈고리 골짜기의 촌장은 누구냐?”
마렌이 한 걸음 나섰다. 카일은 팔을 들어 그를 멈췄다.
“제가 듣겠습니다.”
사내의 시선이 카일의 수선한 망토와 임시 제단을 훑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허리춤에서 봉인된 두루마리를 꺼냈다.
“나는 바르텐 영주령 수석 징수관 볼코프다. 광산세 삼 년 치가 밀렸다. 체납액은 은화 백스무 닢과 운송 노동자 열 명으로 받겠다.”
공터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카일은 쇠사슬을 한 번 바라본 뒤 장부를 펼쳤다.
“영주령의 징수 명령서에 인신 징발 항목이 있습니까?”
볼코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법을 따질 처지인가? 수배범이 이단 집회를 열고 있는 꼴부터 설명해라.”
“설명은 장부에 적겠습니다. 그 전에 징수 대상부터 확인해야겠군요.”
카일은 마렌에게 손짓했다.
“공동 창고의 보리와 약재를 개인 재산과 분리해 적으세요. 누가 무엇을 냈는지 증인도 세우고요.”
마렌이 장부를 펼쳤다. 병사들이 창고 쪽으로 움직이자 레오나의 손이 검자루 위에 올라갔다.
“카일. 저들이 창고를 건드리면 막겠다.”
“검은 아직 뽑지 마십시오.”
“주민의 식량을 빼앗는데도?”
“우리가 먼저 칼을 뽑으면 저들은 강도와 반역자를 동시에 얻습니다. 그 명분은 사람을 끌고 가기에 충분하죠.”
레오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검자루에서 손을 떼지는 않았다.
카일은 볼코프의 두루마리로 시선을 돌렸다.
“수석 징수관님. 체납된 광산세는 언제부터 계산됐습니까?”
“네놈이 숫자를 알아서 무엇을 하게?”
“오늘 마차에 실을 물건의 값이 정해져야 하니까요. 사람 열 명의 목숨까지 계산하실 생각이라면 더 정확해야 합니다.”
카일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자 주민들의 시선이 쇠사슬로 모였다. 볼코프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광산은 영주님의 재산이다. 갱도에서 캐낸 광석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몸뚱이도 영주님의 의무를 갚는 수단이지.”
“그 말도 장부에 적어도 되겠습니까?”
“뭐?”
“영주령의 공식 입장으로 말입니다. ‘주민의 몸뚱이는 영주님의 재산이다.’ 제가 정확히 받아 적겠습니다.”
카일이 펜을 들었다.
볼코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카일이 마렌을 보았다.
“들으신 대로 적으세요.”
마렌의 펜 끝이 종이를 눌렀다. 적기 시작하자 볼코프 뒤의 징수병 하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병사의 눈에 잠깐 망설임이 떠올랐다.
‘전부가 볼코프와 같은 생각은 아니군.’
그때 창고 쪽에서 로웨의 목소리가 울렸다.
“곡물 자루 서른두 개와 약초 상자 네 개입니다! 징수 목록에 올릴 개인 재산은 없습니다!”
볼코프가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전부 실어라.”
“수석 징수관님.” 카일이 장부를 덮지 않은 채 말했다. “재난 광산의 세금은 유예됩니다.”
볼코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헛소리냐?”
“제국 광산령 제17조입니다. 붕괴나 유독성 기체로 광산이 폐쇄된 기간에는 채굴세와 운송세를 재난 심사 뒤로 미룬다는 조항이 있죠. 하부 갱도 폐쇄 기록과 사망자 기록도 있습니다.”
카일은 마렌이 적은 장부를 들어 올렸다. 베른의 이름과 사망 확인 그리고 봉인 균열을 정화했다는 기록이 주민들 앞에 드러났다.
“저희가 광산을 닫은 게 아닙니다. 광산이 사람을 죽여서 닫힌 겁니다. 영주령에서 조사관을 보냈습니까?”
볼코프의 눈이 장부 위에서 흔들렸다.
“그런 조항은 현장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세금은 세금이다.”
“조사관의 서명 없이 징수하는 것도 현장 관행입니까?”
볼코프가 두루마리를 펼쳤다. 붉은 밀랍 인장은 멀쩡했지만 하단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영주님의 명령이면 충분하다.”
“명령서에 체납액의 산출 근거가 없습니다. 이전에 납부한 광산세가 어디에서 빠졌는지도 없고요.”
마렌의 손이 멈췄다. 그는 창고 뒤편에 놓아 둔 낡은 서류 뭉치를 떠올렸다.
“카일 님. 이장이 보관하던 예전 수납증을 가져와도 되겠습니까?”
볼코프의 얼굴이 굳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마라.”
그가 외쳤지만 마렌은 이미 도안에게 서류 위치를 일러 주고 있었다.
“수납증을 가져오세요. 로웨는 병사 수와 마차의 빈 자루 개수를 기록하십시오.”
볼코프의 병사 두 명이 마렌 쪽으로 달려갔다. 레오나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검을 뽑지 않았지만 두 병사는 대검의 그림자만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한 발 더 오면 무기를 내려놓게 하겠다.”
“저 계집을 치워라!”
볼코프가 소리쳤다. 병사들이 창을 세우자 주민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질 듯한 순간 카일이 제단의 돌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모두 들으십시오!”
그의 목소리가 협곡 벽을 타고 울렸다.
“성별의 두 번째 기둥은 증명입니다. 우리는 먼저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우리의 식량과 사람을 빼앗으려 했는지는 한 줄도 빠짐없이 남깁니다.”
카일은 주민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창고 앞을 지키되 병사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오늘 일은 누구도 혼자 기억하지 않습니다.”
주민들이 창고 앞을 막고 등잔을 들었다. 누구도 병사에게 달려들지 않았지만 아무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볼코프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자의 공포가 썩어 가는 냄새가 난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먹지 마. 지금 필요한 건 배고픈 악신이 아니라 겁먹은 관리야.’
―칼을 내놓으면 저들을 전부 침묵시킬 수 있다.
‘침묵은 증거가 아니다.’
카일은 볼코프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내렸다. 검은 가죽 장부 하나가 겉옷 안쪽에 끼워져 있었다. 명령서를 꺼낼 때마다 그 모서리가 드러났다.
수납증을 들고 돌아온 마렌이 숨을 헐떡이며 장부를 펼쳤다.
“여기 있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은화 서른 닢과 광석 열두 자루를 냈습니다. 그런데 볼코프 수석 징수관의 명부에는 한 번도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건 영주령의 장부가 아니다.”
“인장은 같습니다.”
마렌이 수납증을 들어 보였다. 붉은 독수리 인장이 볼코프의 명령서와 나란히 드러났다.
카일은 징수 마차를 가리켰다.
“마차에 수납 도장이 있군요. 명부에 찍으십시오. 오늘 이 골짜기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볼코프가 코웃음 쳤다.
“네가 감히 내게 명령해?”
“선택지를 드리는 겁니다. 지금 철수하고 수납하지 못한 징수 명령으로 기록하시든지 이중 징수와 주민 인신 징발 시도를 함께 상급 기관에 보내시든지.”
카일은 장부의 새 페이지를 펼쳤다.
“마렌 기록관과 주민 그리고 병사들이 증인이 됩니다. 어느 쪽이 더 편하십니까?”
볼코프의 얼굴에 핏줄이 돋았다. 그는 마차 옆의 기병을 보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누구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때 한 병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희는 은화 서른 닢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볼코프가 그 병사의 뺨을 후려쳤다.
“입 닥쳐!”
“그것도 기록하겠습니다.”
카일이 즉시 끼어들었다.
볼코프의 손이 허리의 검으로 향했다. 레오나가 한 걸음 움직였고 검집이 바위에 부딪혀 낮은 소리를 냈다.
“카일.”
“아직입니다.”
칼이 뽑히면 레오나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골짜기는 폭동 현장이 된다.
카일은 볼코프가 돈보다 자신의 이름이 장부에 남는 일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읽었다.
“볼코프 수석 징수관.”
카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당신은 세금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아 이 골짜기에 카일이라는 이름이 있는지 확인하러 왔죠.”
볼코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소리냐.”
“사형수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 기병 열두 명과 쇠사슬 두 마차는 과합니다. 두루마리에는 주민 명단도 제 죄목도 없군요.”
카일은 빈 서명란을 두드렸다.
“이건 세금 명령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내용을 채우는 확인용 문서입니다.”
볼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죽여라. 저자의 공포가 진실을 토해 내고 있다.
‘아니. 진실은 공포가 아니라 증인에게서 나온다.’
카일은 마차 앞의 병사를 바라보았다.
“당신. 이 문서를 누가 건넸습니까?”
병사는 볼코프를 보았다. 뺨을 맞은 병사가 손을 떨며 창을 세웠다.
“대답하면 네놈도 반역죄다.” 볼코프가 으르렁거렸다.
“대답하지 않아도 오늘 주민을 끌고 가면 증인이 됩니다.” 카일이 말했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스스로 판단하세요.”
긴 침묵이 흘렀다.
결국 병사가 입을 열었다.
“수도에서 온 검은 외투의 서기관이 줬습니다. 영주령의 인장과는 다른 봉인을 하나 더 찍으라고 했습니다.”
볼코프가 욕설을 내뱉었다.
이들은 영주령의 손발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눈이었다.
“철수하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오늘 이 골짜기에서 가져갈 것은 없습니다. 명부에는 재난 광산 세금 유예와 이중 징수 의혹 그리고 주민 인신 징발 시도가 기록될 겁니다.”
볼코프는 이를 갈았다.
“이단 교주 놈.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저는 기록을 남겼을 뿐입니다.”
“쇠사슬을 싣고 돌아가십시오. 그걸 끌고 가면 오늘의 목적이 세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볼코프는 마차에 실린 쇠사슬을 걷어찼다. 잠시 뒤 그는 병사들에게 짧게 명령했다.
“철수한다.”
기병들이 몸을 돌렸다. 창고 앞에 선 주민들은 길을 열었지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마렌은 끝까지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로웨는 마차의 빈 자루 수를 세었다.
볼코프가 협곡 입구를 지나기 전 말에서 내렸다. 그는 바위에 손을 대고 짧은 주문을 읊었다.
검은 밀랍이 녹아내리며 부서진 원과 별 하나가 겹친 표식으로 굳었다.
레오나가 즉시 대검을 뽑았다.
“저건 징수대의 표식이 아니다.”
카일도 그 문양을 보았다. 갱도 봉인 벽에서 본 부서진 원과 너무 닮아 있었다.
가슴 안쪽의 파멸의 별이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은 불꽃이 움츠러들었다. 오래전 자신을 묶었던 사슬을 알아본 짐승 같은 반응이었다.
볼코프는 말에 올라타며 낮게 웃었다.
“교주님. 다음에는 장부를 쓸 손부터 가져가겠다.”
카일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는 손을 가져오기 전에 이름부터 남기십시오.”
징수대가 협곡 밖으로 사라졌다.
억눌렀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도안은 주먹을 움켜쥐었고 로웨는 마차 자국을 바라보았다.
“정말 돌려보냈습니다.”
마렌이 장부를 덮으며 말했다.
“아니요.” 카일은 검은 봉인 표식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들은 확인할 것을 확인하고 갔습니다.”
“무엇을요?”
“제가 살아 있는지. 그리고 이 골짜기에 무엇이 있는지.”
카일이 표식 가까이 다가갔다. 바위 너머 깊은 곳에서 아주 약한 진동이 올라왔다. 제단 아래에서 들었던 두드림과 같은 박자였다.
―열어.
이번에는 속삭임이 파멸의 별의 목소리인지 갱도 안쪽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카일은 장부를 세게 움켜쥐었다.
바르텐 영주령의 징수대는 빈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수도에서 내려온 검은 봉인은 골짜기 안쪽의 문을 향해 정확히 찍혀 있었다.
성별교의 첫 번째 장부가 칼날을 막아 냈다면 다음에는 그 칼날이 어디서 내려오는지 밝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