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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10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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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소문은 바람을 타고

갈고리 골짜기의 입구가 사람으로 막혔다.

해가 협곡 너머로 기울 무렵이었다. 낡은 수레 네 대가 비탈을 긁으며 내려왔고 그 뒤로 걸어온 사람은 서른 명이 넘었다. 광부 차림의 사내들, 아이를 업은 여자들, 얼굴을 천으로 가린 노인들이 성수 배급 천막 앞에 엉켜 서 있었다.

“비켜 주시오! 우리 아들이 숨을 못 쉽니다!”

“먼저 온 사람부터 줄을 서시오. 밀치면 모두 못 받습니다!”

마렌이 장부를 안고 소리쳤지만 목소리는 아우성에 파묻혔다. 천막 안에는 이미 기침하는 환자 열두 명이 누워 있었다. 성수를 담을 병은 모자랐고 산엉겅퀴와 형광 이끼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카일은 제단의 계단 위로 올라섰다.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그가 낮게 말하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까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 속에서 믿음과 절박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저들은 네가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더 시끄럽군. 신도는 모이면 장부가 되고 장부는 모이면 재앙이 되지.’

카일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제까지만 해도 은화 사십 닢을 보며 한 달 뒤 도주를 계산했다. 오늘은 은화가 아니라 대기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마렌. 줄을 세 갈래로 나누세요. 당장 쓰러질 사람은 첫째 줄, 아이와 노인은 둘째 줄, 가벼운 환자는 셋째 줄입니다. 골짜기 주민은 무료로 먼저 받게 하되 외부인은 이름과 출신 갱도를 적으세요.”

“하지만 교주님. 저 사람들은 전부 성수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전부에게 한 병씩 주겠다는 약속을 하지 마십시오.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구한다고 말하세요.”

열 살쯤 된 소년이 어머니의 품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여자는 손바닥 위에 은화 두 닢을 올려 보였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한 병 값이 모자라면 제 목걸이라도 받으세요. 아이가 사흘째 피를 토합니다.”

카일은 여자의 손에 묻은 피를 보았다.

‘저건 상인의 돈이 아니라 마지막 목숨값이야.’

“토마스.”

“예, 교주님.”

“소년을 안으로 데려가십시오. 무료 구휼 몫으로 처리합니다.”

“외부인인데도 말입니까?” 마렌이 놀라 물었다.

“오늘 이 아이는 손님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레오나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소년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카일을 한 번 바라본 뒤 천막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아이의 숨이 거칠게 끊기지 않고 일정해졌다. 울음을 터뜨린 어머니가 카일의 발치에 이마를 찧었다.

카일은 손을 들어 은화를 밀어냈다.

“성수는 목숨을 놓고 경매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다만 이 골짜기의 약초와 병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자는 다음 사람의 몫이 남도록 곡식과 약재를 보태 주십시오.”

누군가가 울먹이며 외쳤다.

“성별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그 말이 행렬을 훑었다. 사람들은 품에서 보리 자루와 말린 뿌리를 꺼냈다. 은화가 아닌 물건들이 배급 천막 한쪽에 쌓였다.

카일은 씁쓸하게 웃었다. 적어도 오늘은 돈보다 좋은 것이 들어왔다.


밤이 깊어질 때 유랑 상인 하나가 마차를 몰고 골짜기 안으로 들어왔다. 마차 옆판에는 붉은 여우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페르딘이라고 합니다. 바르텐 동쪽 상단에서 왔습니다.”

사내는 카일에게 허리를 숙였다. 눈은 예의보다 병과 장부를 먼저 훑었다.

“소문이 대단하더군요. 죽어 가던 광부가 한 모금에 일어나고 검은 피가 물처럼 빠져나왔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은 대개 병보다 빨리 부풀지요.”

“그래서 직접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페르딘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병 안에는 별빛이 거의 사라진 성수 한 모금이 남아 있었다.

“이걸 백 병 주십시오. 바르텐의 부유한 집안들은 은화 한 닢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한 병에 은화 두 닢을 드리지요.”

카일의 눈이 잠시 빛났다. 은화 두 닢이면 도주 자금이 빠르게 찬다. 하지만 한 상단이 성수 공급을 독점하면 그 마차가 어디로 가는지 모두가 알게 된다.

“백 병은 안 됩니다. 오늘 만든 만큼만 나옵니다. 다섯 병을 드리되 다른 상단에도 같은 수량을 공급하겠습니다.”

“그럼 제 상단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병을 사 간 사람의 이름은 성별교 장부에 남습니다. 상단의 이름도 예외가 아닙니다.”

페르딘의 미소가 굳었다. 카일은 병목에 작은 천 조각을 묶었다. 별 하나와 갈라진 원이 함께 수놓아져 있었다.

“복용한 사람의 증상과 날짜를 적어 보내십시오. 효과가 없었다고 거짓말하는 자가 생기면 확인해야 합니다. 성수의 이름만 팔 생각은 없습니다. 치료 기록까지 쌓을 겁니다.”

페르딘은 은화 열 닢을 내려놓았다. 몸을 돌리려던 그가 카일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카일이라는 이름이 맞습니까?”

레오나의 손이 즉시 검자루를 찾았다.

“누가 그런 이름을 말했습니까?”

“상인들은 물건보다 만든 사람을 기억합니다. 바르텐의 여관마다 ‘수배된 교주 카일’ 이야기가 돌고 있어요. 도망칠 생각이라면 너무 유명해지셨습니다.”

페르딘은 병을 품에 넣고 마차로 돌아갔다.

“죽일까요?” 레오나가 물었다.

“상인은 소문을 운반할 뿐입니다. 죽이면 소문이 멈추는 게 아니라 피 냄새를 얻습니다.”

카일은 골짜기 바깥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마차 바퀴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위치를 세상에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렸다.


다음 날 정오 무렵 검은 말 두 필이 골짜기로 들어왔다.

말에서 내린 사내는 바르텐 영주령의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독수리 문장이 달렸고 손에는 붉은 밀랍으로 봉한 문서가 들려 있었다.

“영주령 행정관의 명령이다. 성수 제조와 배급을 즉시 중지하라.”

행렬이 술렁였다. 어제 성수를 마시고 기침이 멎은 광부들이 토마스 뒤로 모였다.

카일은 문서의 봉인을 바라보았다. 독수리 문장 옆에 태양을 세 갈래로 가른 작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중지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허가 약품의 제조, 이단 교리의 선전, 영주령 밖으로의 불법 유통이다. 성수의 제조법과 판매 장부를 제출하면 조사를 마친 뒤 허가를 검토하겠다.”

“허가를 검토하는 동안 환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정통 신전에 보내라.”

카일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태양신전까지 가려면 산길로 사흘이다. 숨이 막히는 환자가 그 시간을 버틸 리 없었다.

“그 신전에서 어제 완치된 토마스와 같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까?”

“신성한 치료를 모욕하지 마라.”

“모욕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답을 장부에 적겠습니다.”

카일이 마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렌은 날짜와 전령의 명령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전령이 얼굴을 붉혔다.

“감히 행정관의 명령을 심문하나?”

“협조하려는 겁니다. 그러려면 조사관의 이름과 책임자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환자들이 전부 살아 있는데 약품을 폐기하겠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막 안에서 아이의 울음이 터졌다. 레오나가 소년을 안고 나왔다. 아이의 얼굴에는 아직 열기가 남았지만 숨은 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성수 한 병이면 고비를 넘길 수 있습니다.” 레오나가 말했다. “그 병을 빼앗겠다면 먼저 내 시체를 넘어가십시오.”

그녀가 검집을 반쯤 들어 올리자 호위병들이 창을 세웠다. 토마스와 광부들도 곡괭이를 움켜쥐었다.

카일은 손을 들었다.

“무기를 내리십시오. 저들은 우리가 폭동을 일으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전령의 문서로 손가락을 뻗었다.

“이 명령은 영주령의 조사입니까? 태양신전의 요청입니까?”

“둘 다다.”

“그렇다면 태양신전의 조사관 이름을 밝혀 주십시오.”

전령은 입을 다물었다. 문서 끝의 글자가 바람에 펄럭였다.

‘이단 심문관 에단 사제의 요청에 따라 현장 보존 및 관계자 확보.’

카일은 이름을 읽었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태양신전이 움직였다. 영주령은 앞잡이에 불과했다.

“제조법은 제출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환자 명단과 배급 장부는 공개하죠. 성수 한 병을 분석하고 싶다면 정식 조사관을 보내십시오. 저는 도망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전령이 비웃었다.

“네가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무사히 나가는 것은 제가 결정합니다. 누가 환자의 약을 빼앗으려 했는지는 이 장부가 결정할 겁니다.”

전령은 문서를 말아 쥐었다. 그가 돌아서자 행렬의 사람들이 길을 막았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지만 누구도 비키지 않았다.

“에단 사제께서 직접 오실 것이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카일은 손에 남은 문서의 인장 자국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문양 아래에는 가느다란 검은 금이 하나 나 있었다. 갱도 봉인에서 본 부서진 원의 흔적과 닮아 있었다.

―그 이름을 기억한다.

파멸의 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에단? 네가 아는 자냐?’

―아직은 말하지 않겠다. 다만 저자는 빛을 믿는 자가 아니다. 빛을 핑계로 봉인을 만지는 자다.

“오늘부터 장부를 두 권으로 나누세요.” 카일이 마렌에게 말했다. “하나는 환자 치료 기록이고 하나는 외부 공급 기록입니다. 누구도 혼자 들고 다니지 마십시오.”

“교주님. 정말 신전 사람이 옵니까?”

“온다고 했으니 오겠죠.”

새 수레들이 골짜기 입구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사람,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사람, 성수 병을 들고 되돌아온 상인까지 있었다.

“형제자매들이여. 줄을 서십시오. 오늘도 한 사람씩 구하겠습니다.”

카일의 목소리가 골짜기 벽을 타고 퍼졌다.

같은 시각 태양신전 본청에서는 은빛 잔이 검은 천 위에 놓였다.

에단 사제는 잔 안의 성수를 손끝으로 저었다. 물은 맑았지만 바닥에 가라앉은 빛이 태양의 색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검은 실이 별가루처럼 흔들렸다.

“이것이 정말 환자를 살렸다고?”

“예. 세 명의 광부가 즉시 일어났고 바르텐 전역에서 같은 증언이 들어왔습니다.”

옆자리의 원로가 말했다.

“기적이라면 신전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성수를 압수해 본청에서 재현하면 권위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에단은 잔을 내려놓았다.

“재현은 나중이다. 먼저 누가 이 힘을 만들었는지 확인한다.”

“이단 심문관께서 직접 가시겠습니까?”

“기적을 믿지 않는 자는 눈앞의 환자를 죽게 한다. 기적을 너무 쉽게 믿는 자는 악신에게 문을 열어 준다.”

에단은 문서에 붉은 인장을 찍었다.

“갈고리 골짜기로 간다. 성수의 원료와 제조자 그리고 그 교단의 장부를 모두 확인한다.”

그의 시선이 검은 실이 사라진 잔에 머물렀다.

“저 안에 악신의 잔향이 있다면 교주를 체포한다. 신도들이 방해하면 교단 전체를 봉쇄한다.”

태양신전의 종이 세 번 울렸다.

그날 해질녘 에단 사제의 조사대가 수도를 떠났다.

갈고리 골짜기에서는 카일이 마지막 성수 병의 마개를 닫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병 속의 별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카일은 멀리서 다가오는 깃발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파멸의 별은 보았다.

―빛을 든 사냥개가 온다.

카일의 손이 병목에서 멈췄다.

그는 천천히 웃었다.

“그럼 사냥개에게도 값을 받아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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