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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11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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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이단 심문관의 등장

쇠사슬이 성수 배급소 앞을 가로질렀다.

카일은 막 잔을 내밀던 손을 멈췄다. 협곡 위로 태양 문양 깃발이 펼쳐졌다. 전령이 돌아간 뒤 나흘 동안 외웠던 환영 인사는 쇠가 부딪히는 소리에 묻혔다.

“지금부터 성수에 손대지 마라.”

회색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말에서 내렸다. 마흔을 넘긴 얼굴에 가느다란 안경을 걸쳤다. 그는 향로도 성상도 꺼내지 않고 서기관에게 손을 내밀어 빈 종이부터 받았다.

레오나가 검집 끝으로 쇠사슬을 눌렀다.

“여기는 환자가 드나드는 길입니다.”

호위병들이 창대를 세웠다. 뒤에서 짚수레 하나가 멈춰 섰다. 수레 위 광부의 입에서는 젖은 풀무 같은 소리가 났다.

“수레를 들여보내라. 사슬은 병이 놓인 탁자 앞으로 옮겨.”

사제가 말했다. 호위병이 머뭇거리자 그가 안경 너머로 노려보았다.

“사람을 압수하라고 했나?”

카일은 레오나의 손목에 손을 얹었다. 검을 뽑을 이유가 하나 줄었다. 동시에 상대를 모욕할 구실도 하나 사라졌다.

“먼 길을 오셨군요. 성별교의 교주입니다.”

“카일.”

사제는 인사 대신 이름을 불렀다.

“태양신전 이단 심문관 에단이다. 네 이름과 이 물에 관한 증언을 가지고 왔다. 제조자 본인이 맞나?”

“맞습니다.”

“그럼 여기 남아라. 도주하면 조사에 응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기록하겠다.”

카일은 사제복의 해진 소매를 살폈다. 은장식은 가슴의 태양 하나뿐이었다. 은화를 밀어 넣을 만한 틈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 빛을 가까이 들이지 마라.

‘네가 겁낼수록 나는 더 웃어야 하거든.’

카일은 입꼬리를 올렸다.

“마렌. 장부 두 권을 가져오세요. 사제님께 의자도 드리고요.”

에단은 의자를 환자 쪽으로 돌려 놓았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깃펜이 멈췄다.

“외부 공급가는 은화 반 닢이라고?”

“혹은 그만큼의 곡식과 약재입니다.”

“페르딘. 다섯 병에 열 닢. 이것도 같은 값인가?”

카일은 눈을 내리깔았다. 성수의 빛보다 장부의 숫자에 먼저 걸려들 줄은 몰랐다.

“상단이 제시한 값을 받았습니다. 더 좋은 약을 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는 것은 누가 증명하지?”

“그날 곁에 있던 레오나가 거래를 봤습니다. 마신 사람의 기록은 돌려받기로 했습니다.”

“아직 받지 못한 기록은 증거가 아니다.”

에단은 해당 줄에 종이쪽을 끼웠다. 손가락이 바로 옆 치료 장부로 옮겨 갔다.

“무상 치료. 외부 광부의 아들. 이것은 왜 값을 받지 않았나?”

카일은 천막 그늘을 가리켰다. 소년이 어머니 옆에 앉아 보리죽을 식히고 있었다.

“돈을 셀 동안 숨이 끊어질 것 같아서요. 직접 물어보십시오.”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어머니는 남은 성수 병을 치마 뒤로 감췄다. 사제가 아이의 맥을 짚으려는 것을 보고서야 작은 손목을 내주었다.

“아직 기운이 없군. 오늘은 눕혀 두시오.”

사제는 탁자로 돌아와 마렌을 보았다.

“숨은 안정됐지만 기운이 없고 기침도 남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완치라고 적었어.”

마렌의 귀가 빨개졌다.

“숨을 쉬게 됐으니…….”

“다시 피를 토하면 치료가 끝났다고 돌려보낼 셈인가?”

카일은 마렌이 대답하기 전에 장부를 당겼다.

“표현을 고치세요. 처음 적은 글자는 읽을 수 있게 남기고 관찰한 상태를 덧붙이십시오.”

“교주님의 기적을 의심하는 기록이 됩니다.”

“다시 앓으면 처음부터 환자를 바꿨다고 할 겁니다. 그때 형제를 지키는 것도 이 장부입니다.”

마렌이 입술을 다물고 펜을 들었다. 에단은 고쳐 쓰는 손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레오나가 카일의 귓가에 낮게 말했다.

“저자에게 흠을 잡힐 텐데도 환자부터 챙기시는군요.”

카일은 고개만 끄덕였다. 숫자를 숨겨 봤자 저 사제는 사람 수부터 세어 볼 것이다. 차라리 장부 앞에 오래 붙들어 두는 편이 나았다.

카일은 그 틈에 환자 쪽 의자를 더 당겼다.

“원본을 가져가시면 내일 먹일 몫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대조하시죠. 궁금한 것은 본인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눈앞에서 웃는 환자만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에단이 탁자 위 성수 병을 들었다.

“본청에 보내온 성수에 검은 실 같은 흔적이 있었다. 태양의 신성은 그런 잔향을 남기지 않아.”

카일의 혀끝이 입천장에 붙었다.

‘네가 물에 뭘 남겼다고?’

파멸의 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초의 빛깔은 아닙니까?”

“그런지는 제조 과정을 보면 알겠지.”

에단이 병을 내려놓는 순간 천막 안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짚수레의 광부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물을 받으려 몸을 일으키다 굴러떨어진 것이다.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동료가 그를 세우려 했지만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숨소리가 가늘어졌다.

레오나가 달려들어 어깨를 받쳤다. 에단이 무릎을 꿇었다. 손끝에서 번진 황금빛이 찢어진 이마를 덮자 붉은 피가 서서히 멎었다.

군중 사이에서 누군가 탄성을 삼켰다.

카일은 그 빛 아래 드러난 목을 보았다. 피부 밑에 검붉은 줄이 뻗어 있었다. 토마스가 앓을 때 보았던 것과 같았다.

“새벽부터 이랬습니다. 남쪽 갱도에서 나올 때는 걸었는데…….”

동료가 광부의 굳은 손을 주물렀다.

에단은 가슴 위로 손을 옮겼다. 황금빛이 옷감을 비췄다. 광부의 몸이 잠깐 펴졌다가 다시 오그라들었다.

사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겉의 상처가 아니다. 안쪽에 오염이 붙어 있어.”

빛이 약해지자 검붉은 줄이 다시 목을 기어올랐다. 에단은 손을 떼지 못했다.

“누르고는 있다. 하지만 이 상태로 밖으로 끌어낼 수는 없어.”

카일은 탁자에 남은 성수 병들을 보았다.

증거물에 손을 대는 순간 칼이 날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치료를 구경하다 사람이 죽으면 이곳은 더 이상 돈을 모을 장소가 아니었다. 신도와 함께 카일의 방패도 무너질 터였다.

“같은 증상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그 물을 주십시오.”

“누가 골라 둔 병이지?”

“아무 병이나 직접 고르세요.”

에단이 호위병을 돌아보았다. 병사는 탁자 끝의 도자기 병을 집어 마개를 열었다. 사제는 향을 맡고 손가락에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투약을 허용한다. 내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먹여.”

카일은 광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제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이 약을 마시겠습니까?”

핏발 선 눈이 카일을 향했다. 광부의 손가락이 병목을 더듬었다.

“주……시오.”

카일은 토마스에게 빈 대야를 가져오게 했다. 레오나가 광부의 등을 받쳤다. 잔에 덜어 낸 물이 조금씩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저자의 빛도 먹을 수 있다.

악신의 목소리가 귀 안쪽을 핥았다.

‘입 닥쳐. 이미 만든 약이면 충분해.’

카일은 새로 힘을 부르지 않았다. 환자의 목이 움직이는 것만 기다렸다.

한 번.

두 번.

갑자기 광부가 허리를 꺾었다.

“커헉!”

대야로 검은 가래가 떨어졌다. 레오나가 몸을 옆으로 돌려 받쳤다. 토마스는 예배할 때처럼 눈을 감았다가 얼른 대야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비린내와 함께 검은 김이 피어올랐다.

에단의 손이 멈췄다. 광부의 목을 타고 있던 어두운 줄이 옅어졌다. 쇠를 긁던 숨소리가 거친 숨으로 바뀌더니 마침내 공기가 길게 들고났다.

“사……살았다.”

동료가 엉엉 울었다.

카일은 병을 쥔 손의 땀을 망토에 닦았다. 누군가 그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광부를 가리켰다.

“찬양은 나중에 하십시오. 등을 받칠 짚부터 가져오세요.”

마렌이 뛰어갔다. 에단은 자신의 서기관을 불렀다.

“투약 뒤 오염 징후와 호흡이 호전됨. 의식 있음. 회복 경과는 더 관찰할 것.”

서기관의 펜이 움직였다. 마렌도 짚을 내려놓고 같은 문장을 적었다.

카일은 사제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는 환자도 증거도 살아 있군요.”

에단은 대야 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래서 더 확인해야겠어.”


낮이 되자 조리 막사의 문에 붉은 밀랍이 굳었다.

카일의 미소도 함께 굳었다.

“효과를 직접 보셨습니다.”

“오늘 숨을 돌려준 힘이 내일 무엇을 요구할지는 모른다. 출처를 확인하기 전에는 다른 마을까지 퍼뜨릴 수 없어.”

에단은 천막 안의 광부를 돌아보았다. 환자는 동료의 손을 놓지 못한 채 얕게 잠들어 있었다.

“저 사람의 밤을 지켜보겠다. 너도 여기서 함께 지켜.”

에단은 남은 성수의 수량을 서기관에게 세어 적게 했다. 치료에 쓸 병은 천막 안으로 옮겼고 반출용 병은 봉인한 막사에 두었다.

“남은 물은 내 감독 아래 치료에 쓴다. 외부 판매와 추가 제조는 중지한다. 내일 배급 전 심문에서 계속 만들 조건을 정하겠다.”

마렌이 재고 장부를 펼쳤다.

“치료용으로 남긴 병에서 지금 대기한 분들 몫을 빼면 여섯 잔뿐입니다. 내일 아침 줄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은화가 들어오는 길이 끊겼다. 협곡 입구에 번쩍이는 창날은 카일이 나갈 길도 막고 있었다.

“계속 만드는 조건을 정해야겠군요.”

“힘의 출처와 너희 교리를 진술해라. 네가 이 물에 무엇을 청하는지 알아야 한다.”

카일은 서기관이 펼친 처분서로 손을 뻗었다.

“장부 원본은 여기 둡니다. 심문도 제단 앞에서 하시죠. 약이 계속 나올지 기다리는 사람들이 들을 권리가 있습니다.”

에단은 잠깐 그를 보았다.

“원본은 현장에서 대조한다. 공개 심문도 좋다. 신도들 앞에서 한 말은 전부 기록하겠다.”

에단이 처분서의 다음 줄을 짚었다.

“도주하거나 봉인을 훼손하면 즉시 구금한다. 치료소 밖으로 나갈 때도 호위병이 동행한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적어도 조용히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렌이 처분서를 읽고 원본 장부 두 권을 품에 안았다. 카일은 체류 의무가 적힌 줄 아래에 자기 이름을 썼다.

환자들이 줄을 다시 움직였다. 호위병 하나가 병마개를 열 때마다 서기관의 펜이 따라 움직였다. 카일은 그제야 잉크 묻은 손을 폈다. 오늘 먹일 약만큼은 지켰다.

토마스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교주님이 신전 분들까지 환자를 돌보게 하셨군요.”

카일은 대꾸할 힘도 아꼈다. 그의 눈에는 제단으로 옮겨진 의자가 심문대처럼 보였다.

에단은 마렌에게 교리문을 받아 펼쳤다. 종이 한 귀퉁이에 카일이 말려 놓은 잉크 얼룩이 남아 있었다.

사제의 손가락이 한 줄 위에서 멎었다.

“고통을 별빛을 증명하기 위한 숭고한 시련이라 했군.”

카일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는 그 시련을 없애는 약을 팔아.”

에단이 교리문을 접었다.

“내일 첫 질문이다. 네가 받드는 별은 저들의 고통을 원하는가?”

가슴속에서 파멸의 별이 웃었다.

카일은 접힌 교리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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