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72화: 평화로운 일상?
아침 해가 창틀을 넘기 전에 카일은 눈을 떴다.
잠을 잔 곳은 침대가 아니라 술집 안쪽의 빈 의자였다. 목은 뻐근했고 관자놀이에서 눈 뒤로 이어진 열기는 밤새 식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잔을 들 수는 있었다.
‘잔을 닦고 장작을 패고 하루 세 끼를 먹는다.’
그 정도면 훌륭한 도주 생활이었다.
“일할 거면 문부터 열어요.”
술집 주인이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부터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손님 이름이 다음 날 사라지는 곳에 자기 이름을 적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일당은?”
“아침은 죽. 저녁은 남은 음식. 그릇을 깨지 않고 손님을 쫓아내지 않으면 동전 두 닢.”
“숙박비는요?”
“오늘은 의자. 내일부터는 다락방을 생각해 볼게요.”
“생각해 본다는 말은 계약이 아니군요.”
“술집 주인도 장부를 읽을 줄 알아요.”
주인이 문빗장을 풀었다. 차가운 바람이 마른별의 골목을 훑고 지나갔다. 카일은 앞치마를 둘렀다.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려면 평범한 일을 해야 했다.
그는 잔을 닦으며 선반을 훑었다. 보리술 병은 장부에 다섯 개라고 적혀 있었지만 선반에는 여섯 개가 있었다. 하나는 뒷벽 아래 상자에 굴러가 있었고 병목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어제 손님이 자기 병이라고 했어요.”
주인이 말했다.
“그 사람 이름은요?”
“다음 날 사라졌어요. 병만 남았죠.”
카일은 깨끗한 종이를 네 조각으로 찢었다. 시간과 물건과 값을 적을 칸을 만들고 이름을 쓰는 자리는 만들지 않았다.
“손님이 주문하면 컵 아래에 둡니다. 결제한 사람은 동그라미를 받고 물건을 받은 사람은 선을 하나 더합니다.”
“술집에서 그렇게까지 해요?”
“이름을 남기고도 사라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첫 손님이 들어와 늘 마시던 술을 달라고 했다.
“늘 마시던 게 뭡니까?”
카일이 묻자 노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매일 오는데 그것도 몰라?”
“매일 온 손님이 주문을 안 하면 매일 다른 술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투덜거리며 보리술 반 잔과 외상 빵을 주문했다. 카일은 쪽지에 적고 손가락 자국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내일 당신이 당신이라고 확인되면 외상으로 남기죠.”
“그게 무슨 말이야?”
“이름이 남는다는 보장이 없는 마을이니까요.”
노인은 못마땅한 얼굴로 쪽지를 눌렀다.
잔은 깨지지 않았고 손님도 쫓겨나지 않았다. 첫 번째 규칙은 지켜졌다.
점심 무렵 검은 천을 두른 사내가 술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아침에 보았던 수레꾼 둘이 따라붙었다. 한 사람은 붉은 실이 감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저 물건은 내 겁니다. 어제 맡겼고 오늘 찾으러 왔소.”
검은 천의 사내가 말했다.
“장부에는 맡긴 사람이 비어 있어요.”
주인이 장부를 펼쳤다. 이름 하나가 검은 얼룩으로 지워져 있었고 꾸러미의 크기와 붉은 실이라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가져가면 됩니다.”
“그건 내 동생 물건이오.”
수레꾼 하나가 사내의 팔을 잡았다.
“어젯밤 우리가 함께 맡겼소.”
“이름을 말해 보시오.”
사내가 몰아붙이자 수레꾼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 얼굴이었다.
카일은 꾸러미를 들었다.
“이름으로 확인하지 마십시오. 맡긴 시각은 언제입니까?”
“해가 지기 전.”
“꾸러미를 묶은 사람은?”
“내 동생이오.”
검은 천의 사내가 끼어들었다.
“내가 묶었소.”
카일은 매듭을 살폈다. 세 번 꺾인 실 끝이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수레꾼은 아침부터 장작을 나르고 있었고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많았다. 사내는 매듭의 바깥만 보고 있었다.
“두 분 모두 물건을 본 적은 있습니다. 맡긴 사람과 가져갈 사람은 따로 확인해야 합니다.”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네가 뭔데 내 물건을—”
“주인님. 금고 열쇠를 안쪽 선반으로 옮겨 두십시오.”
카일이 술집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이 움직이기도 전에 사내의 시선이 카운터 아래로 미끄러졌다.
“열쇠는 거기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당신이 먼저 봤으니까요.”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꾸러미를 주인에게 건넸다.
“지금은 누구에게도 넘기지 마십시오. 맡긴 시각과 매듭을 본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그때 받은 사람이 직접 말하게 하죠.”
“그럼 오늘 장사는요?”
“판단을 미루는 것도 장사의 일부입니다.”
수레꾼이 마차로 달려가 잠든 동생을 데려왔다. 청년의 손에는 붉은 실을 묶을 때 생기는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검은 천의 사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물러났다.
주인이 물었다.
“그 사람이 물건을 훔치려 했다고 적을까요?”
“직접 확인한 건 카운터 아래를 살핀 행동뿐입니다. 그 이상은 적지 마십시오.”
카일은 쪽지에 적었다.
‘발화자: 수레꾼 둘.’
‘직접 관측: 검은 천의 사내가 카운터 아래를 살핌.’
‘물건 수령자: 확인 전.’
주인은 쪽지를 읽고 입술을 삐죽였다.
“이 술집에서 누가 그런 걸 가르쳤어요?”
“아무도요.”
카일은 쪽지를 컵 아래에 밀어 넣었다.
“그래서 아직 망하지 않은 겁니다.”
해가 서쪽 지붕에 걸렸을 때 젊은 인부가 술집으로 들어왔다. 왼손 엄지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고 작업복에는 북쪽 다리 공사장의 흙이 붙어 있었다.
“일당을 받으러 왔습니다.”
주인이 이름을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젊은 인부도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을 꺼내려 하면 목 안쪽이 잠기는 듯했다.
“장부에 적힌 사람이 비어 있어요.”
주인이 장부를 내밀었다.
“나는 사흘 동안 북쪽 다리의 세 번째 기둥을 세웠습니다. 오늘 아침에 감독에게 돈을 받으러 오라는 말도 들었고요.”
뒤따라 들어온 다른 인부가 비웃었다.
“그런 사람은 우리 작업장에 없었어.”
“내가 없었다고?”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네가 그 사람이지?”
젊은 인부가 주먹을 쥐었다. 카일은 빈 봉투를 꺼냈다.
“일당은 얼마입니까?”
“동전 세 닢과 빵 한 개.”
“세 번째 기둥에 사용한 도구는?”
“손잡이가 갈라진 망치. 머리 쪽에 철심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카일은 다른 인부를 보았다.
“당신은 작업 순서를 기억합니까?”
“아침에 흙을 나르고 점심 뒤에 기둥을 세웠소.”
“아닙니다.”
젊은 인부가 즉시 말했다.
“비가 와서 오전에는 구덩이를 덮었고 점심 뒤에 흙을 날랐습니다. 망치질은 해가 기울 때 했습니다.”
술집 주인이 손을 들었다.
“사흘 동안 저녁마다 빵을 샀어요. 첫날에는 오른손으로 계산했고 어제는 왼손 엄지를 다쳐 동전을 입에 물고 내밀었죠.”
다른 인부는 침묵했다.
카일은 봉투에 동전과 빵값을 적었다. 그러나 젊은 인부에게 건네지는 않았다.
장부의 빈칸에서 검은 선이 움직였다. 선은 봉투를 지나 젊은 인부의 손목으로 향했다. 붕대에 닿기 직전 가늘게 떨렸다.
―받는 사람을 정해.
파멸의 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한 손에 넣으면 다툼이 끝난다.
카일은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관자놀이의 열이 눈 뒤로 번졌다.
발화자도 수령자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선을 잡지 않았다.
“돈은 바로 넘기지 않습니다.”
“나를 못 믿습니까?”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부분을 믿지 않는 겁니다.”
카일은 봉투를 탁자 가운데 놓았다.
“당신이 말한 작업 장소와 도구를 직접 본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 봉투는 술집 주인이 보관합니다. 당신도 주인도 아닌 상태로요.”
“그럼 내 돈을 누가 가져갑니까?”
“가져가는 사람이 정해질 때까지 아무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주인은 봉투 위에 컵을 엎어 놓았다. 다른 인부는 작업장에 사람을 부르러 나갔다.
잠시 뒤 마차 대기장에서 또 다른 인부가 들어왔다. 그는 젊은 인부의 망치 손잡이에 난 갈라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두 증언이 맞아떨어지자 봉투를 감싼 검은 선이 조금 옅어졌다.
젊은 인부가 돈과 빵을 받아 들었다. 그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지만 자기 이름은 끝내 말하지 못했다.
“이름을 몰라도 돈을 받은 사실은 남습니다.”
카일이 말했다.
“당신이 직접 받은 것과 우리가 직접 본 것을 따로 적었으니까요.”
젊은 인부는 봉투를 품에 넣었다.
“내일도 여기로 오겠습니다.”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깊어지자 마지막 손님이 나갔다.
주인은 바닥을 쓸며 카일에게 동전 두 닢을 내밀었다. 동전 아래에는 딱딱하게 굳은 빵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오늘 일당입니다.”
“숙박비를 빼지 않았군요.”
“의자는 숙박이 아니니까요.”
“내일은 다락방을 생각해 보겠다는 말이 계약이 아니라고 했죠.”
“내일도 그릇을 안 깨면 생각해 볼게요.”
카일은 금화 한 닢과 낡은 인장 패가 든 주머니에 동전 두 닢을 넣었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내일도 일하겠습니다.”
주인은 빈 의자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거기서 자요. 등받이가 덜 부러졌으니까.”
카일은 의자에 앉았다. 잔을 닦고 장작을 옮기고 술값을 적었다. 누구도 그를 교주라고 부르지 않았다. 누구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빛을 찾지 않았다.
평화롭다고 생각하려는 순간 등 뒤에서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술집 장부의 표기가 길어지고 있었다.
‘다음 기록자: 바렌—’
마지막 획 뒤로 작은 칸 하나가 열렸다.
검은 선은 그 칸과 흐릿한 ‘셀레스티알’ 사이에서 갈라졌다. 한 갈래는 빈 이름 칸으로 향했고 다른 한 갈래는 카운터 안쪽의 열쇠 고리에 닿았다.
열쇠에는 주인이 손을 대지 않았다.
카일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선을 먹어 치우면 무엇이 사라질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의 통증으로는 한 가닥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장부 안쪽에서 술집 주인의 목소리와 닮은 발화가 흘러나왔다.
“내일 받을 사람은…….”
주인은 창고에서 잠들어 있었다. 목소리의 끝은 그녀와 달랐다.
카일은 동전 두 닢을 쥔 채 장부를 바라봤다.
오늘은 잔을 깨지 않았다.
내일은 누가 무엇을 받게 될지 정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