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70화: 이름 없는 종
종이 다시 울렸다.
카일은 황도 밖 북서쪽 도로의 부서진 이정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동 주문의 잔향은 사라졌고 발밑의 흙은 분명히 단단했다. 손바닥에는 금화 한 닢과 낡은 인장 패만 남아 있었다.
종소리가 난 쪽에는 낮은 성벽과 등불 몇 개가 있었다. 성별교의 깃발도 황실의 문장도 보이지 않았다.
카일은 등불과 반대쪽으로 걸었다.
이름을 버리려고 떠났는데 가장 먼저 만난 것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좋은 징조일 리 없었다.
성벽의 작은 창이 열렸다. 지친 여자의 얼굴이 어둠 밖으로 나왔다.
“회나루는 첫 종 뒤에 문을 닫습니다.”
“그럼 운이 없군.”
“이름이 있으면 여관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카일은 여자의 눈을 살폈다. 외지인을 속이려는 눈이 아니었다. 규칙을 어기면 자신이 곤란해지는 사람의 눈이었다.
“이름을 적으면 안전합니까?”
여자의 입술이 굳었다.
“세 사람의 이름이 장부에서 지워졌어요. 얼굴과 목소리는 기억하는데 이름을 부르려고 하면 혀가 굳습니다.”
“그런데도 장부를 씁니까?”
“안 쓰면 다음 사람이 지워질지 모르니까요.”
공포는 진짜였다.
카일은 부서진 이정표를 돌아봤다. 판자에 남은 글자 중 하나가 바렌이라는 소리에 가까웠다.
“바렌.”
“성은요?”
“없습니다.”
“출신은요?”
“길 위.”
여자가 문을 닫으려 하자 카일은 금화를 꺼냈다.
“잔돈은 없습니다. 하룻밤 값으로 받지 말고 내일 아침까지 일한 뒤 남는 금액은 식량으로 돌리죠.”
“이름을 먼저 적어야 해요.”
“이름과 본인 진술을 한 칸에 섞으면 나중에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는 대성당이 아니에요.”
“그래서 더 필요합니다. 고칠 사람이 적으니까.”
여자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 문 옆의 종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소년이 낡은 장부를 안고 달려왔다.
“루흐. 문을 열어 줘.”
카일은 장부를 펼쳤다. 오래된 줄 사이에 이름과 확인자와 발화자와 수령자를 적을 수 있는 칸이 갈라져 있었다. 누군가 설계한 양식이 아니라 검은 얼룩이 종이를 먹어 만든 빈틈에 가까웠다.
카일은 붓을 빌려 적었다.
‘이름: 바렌.’
‘발화자: 본인.’
‘확인 위치: 회나루 성문.’
‘수령자: 공란.’
붓끝이 마지막 칸을 떠나는 순간 금화가 뜨거워졌다. 검은 얼룩이 이름 아래의 빈칸을 향해 가느다랗게 번졌다.
종탑에서 두 번째 울림이 났다.
“종지기가 당기지 않았는데…….”
소년이 장부를 움켜쥐었다.
카일은 금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종지기는 어디 있지?”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관 주인의 이름은 도아였다.
그녀는 금화를 받아 장부 한쪽에 양도인과 수령인을 나누어 적으려 했다.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가 누구에게 넘겼는지만 적으세요. 목적과 반환 조건은 내일 정리합시다.”
“돈을 빌려주는 겁니까?”
“내가 내일 아침까지 살아 있으면 빌려준 셈이죠.”
루흐가 장부를 품에 안은 채 물었다.
“아저씨는 기록을 할 줄 알아요?”
“사람이 거짓말하는 얼굴은 알아볼 줄 안다.”
“그럼 우리 아버지도 찾을 수 있어요?”
“얼굴은 기억하니?”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해요. 이름만 안 떠올라요.”
루흐는 입술을 달싹였다.
“세…… 세르…….”
검은 얼룩이 장부에서 한 줄 흔들렸다.
카일은 소년에게 붓을 돌려주었다.
“네가 직접 들은 음절만 적어. 그게 이름인지까지 정하지 마.”
“이름을 안 쓰면 아버지가 더 사라질지도 몰라요.”
“이름을 모른다고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야.”
그 말은 자신이 성별교에서 하던 말과 너무 비슷했다. 카일은 불쾌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종탑 아래에는 노인이 서 있었다. 손에 든 종줄은 축 늘어져 있었다.
“오린입니다.”
도아가 낮게 말했다.
“종을 지켜온 사람인데 며칠 전부터 당기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종은 계속 울립니다. 오린이라는 이름도 그가 본래 쓰던 이름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오린이 고개를 들었다.
“바렌.”
카일은 멈췄다.
“내 이름을 누가 말했습니까?”
“종이 먼저 들었습니다.”
오린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는 자신이 종을 울리지 않았다고 직접 말했다. 카일은 그 진술을 장부에 옮겼다.
‘발화자: 오린.’
‘진술: 종을 당기지 않음.’
‘확인자: 바렌.’
‘수령자: 공란.’
종탑 안쪽 벽에는 열여섯 개의 홈이 있었다. 열다섯 곳에는 지워진 이름의 흔적이 남았고 마지막 홈은 비어 있었다. 그 아래에 검은 글자가 떠 있었다.
‘다음 기록자:’
뒷부분은 얼룩에 묻혀 읽을 수 없었다.
“이걸 누가 썼습니까?”
“모릅니다.”
오린이 대답했다.
그가 자기 이름을 말하려 하자 소리 대신 마른 숨이 나왔다. 루흐는 계단 아래에서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도 저렇게 됐어요.”
카일은 열여섯 번째 홈을 바라봤다. 대성당의 판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름 칸에서 검은 선이 번지고 수령자 칸이 비어 있는 모습은 너무 닮아 있었다.
닮았다는 것은 증거가 아니었다.
종이 세 번째로 울렸다.
이번에는 오린의 목소리가 종탑 안에서 울렸다.
“바렌. 수령을 확인해.”
카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는 자신과 비슷했지만 숨이 끝나는 지점이 달랐다.
“발화자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순간 장부에서 검은 선이 뻗어 오린의 손목으로 기어갔다.
“모두 뒤로 물러서!”
주민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린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오린이 종을 울린 거야!”
“저 사람이 우리 이름을 가져갔어!”
도아가 오린에게 달려가려 하자 카일이 막았다.
“그렇게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쓰러졌어요!”
“그래서 수령자를 먼저 만들면 안 됩니다.”
카일은 부엌에서 등잔 기름과 젖은 행주를 가져왔다. 도아에게는 주민을 세 갈래로 나누게 했다. 한 줄은 출입구를 지키고 한 줄은 오린에게 닿지 못하게 막고 마지막 줄은 장부를 들었다.
“루흐. 네 아버지의 이름은 쓰지 마. 네가 직접 기억하는 얼굴과 목소리만 적어.”
“그래도 아버지를 찾아야 해요.”
“그러니까 장부가 대신 정하게 하지 마.”
검은 선이 오린의 손목에 닿았다. 카일은 낡은 인장 패를 선과 사람 사이에 밀어 넣고 젖은 행주를 그 위에 감았다. 선이 패에 달라붙자 금화가 주머니 안에서 뜨거워졌다.
―한 손이면 충분하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네가 수령자가 되면 모든 이름을 되돌릴 수 있다.
‘없는 기억은 만들 수 없어.’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서 안 받는다.’
카일은 오린의 손목으로 향한 한 가닥만 집었다. 팔 안쪽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관자놀이에 남은 검은 흔적이 눈 뒤까지 번졌다.
“지금부터 직접 확인한 것만 말해!”
카일이 소리쳤다.
“오린은 종을 당기지 않았습니다. 장부에는 본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검은 선이 손목에 닿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확인된 사실입니다.”
주민들의 시선이 오린에게서 장부로 옮겨갔다.
카일은 행주를 당기며 선을 인장 패 쪽으로 끌어왔다. 그 순간 검은 선 하나가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쇠 맛과 겹친 목소리가 머리를 때렸다.
‘발화자 없음.’
카일은 그 문장만 붙잡았다.
검은 선이 끊어졌다.
종의 추도 멈췄다. 오린은 쓰러졌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검은 얼룩은 열여섯 번째 홈으로 물러났고 장부에 지워진 이름은 돌아오지 않았다.
루흐가 떨리는 손으로 글을 적었다.
‘발화자: 루흐.’
‘진술: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말한 음절은 세른.’
‘확인 위치: 종탑 아래.’
‘수령자: 공란.’
그 글자 위로 번지던 얼룩은 멈췄다.
도아가 장부를 들어 올렸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루흐가 썼고 검은 선은 멈췄어요.”
“기적이라고 적지 마.”
카일은 손가락을 감쌌다.
“검은 선이 멈춘 사실만 적어.”
열여섯 번째 홈에서 검은 선 하나가 빠져나와 북쪽으로 뻗었다. 끝은 벽 밖으로 사라졌다.
“저건 북쪽 길로 이어집니다.”
카일이 말했다.
도아가 물었다.
“따라갈 건가요?”
“그렇게 약속한 적은 없습니다.”
카일은 쓰러진 오린을 바라봤다.
“다만 장부가 사람을 대신 수령하기 전에 끊어야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회나루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오린은 깨어났지만 자신이 본래 어떤 이름을 썼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루흐는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오린은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잃어버린 이름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아는 식탁에 앉아 장부를 다시 옮겨 적고 있었다.
‘이름: 바렌.’
‘발화자: 본인.’
‘확인 위치: 회나루 성문.’
‘수령자: 공란.’
그 아래에는 검은 선에 관한 관측만 남았다. 기적도 구원도 없었다.
“마을에 남지 않을래요?”
도아가 물었다.
“내가 남으면 사람들은 모든 책임을 내 이름 하나에 적을 겁니다.”
“그래도 종이 다시 울리면 당신이 필요해요.”
“필요한 사람이 한 명뿐인 마을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루흐가 장부를 끌어안았다.
“그럼 이름이 있어도 안 좋은 거네요.”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이름은 도구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적었는지가 더 중요해.”
문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북쪽에서 온 상인이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여긴 조용하군. 북쪽 길에서는 밤새 종이 울렸는데.”
카일의 손이 금화를 덮었다.
“어디서부터요?”
“돌무덤 너머부터. 길가 장부마다 검은 줄이 생겼어. 어떤 여관은 주인 이름이 통째로 비어 있더군.”
상인은 카일을 흘끗 보았다.
“황도에서 온 사람이라면 조심해. 빛 속으로 사라진 교주 이야기가 여기까지 내려왔거든.”
카일은 웃지 않았다.
장부의 바렌 아래에서 검은 획이 움직였다.
‘다음은 바렌을—’
카일이 붓을 들자 도아가 장부를 접었다.
“빈칸은 채우지 않기로 했잖아요.”
도아는 겁먹은 얼굴로 장부를 놓지 않았다.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는 직접 말하지 않았고요.”
카일은 금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새 이름은 자신이 골랐지만 다음 칸까지 정할 수는 없었다.
루흐가 문밖으로 따라 나왔다.
“바렌. 아버지의 이름을 확인해 주세요.”
“찾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그럼 확인만 해 주세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북쪽 길이 열려 있었다. 금화 가장자리의 검은 획도 그쪽을 가리켰다.
멀리서 종이 한 번 울렸다.
회나루의 종탑은 움직이지 않았다.
카일은 북쪽으로 걸었다.
금화 위의 검은 글자가 짧게 떨렸다.
‘다음은 바렌을—’
이번에는 마지막 획이 조금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