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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67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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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이별의 준비

황태자 동쪽 접견실의 문이 손가락 하나만큼 열려 있었다.

문을 누른 손은 없었다. 바닥에는 발자국도 없었다. 황궁 지하 봉인실의 누구도 문으로 다가가지 않았는데 안쪽의 어둠만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문이 열렸습니다.”

에단이 빈 철판을 들고 문턱 바깥에 세웠다. 그는 문과 철판 사이에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간격을 남긴 뒤 봉인용 백랍을 바닥에 얇게 흘렸다.

“직접 관측. 접촉자 없음. 문 안쪽 확인 불가.”

총서기관은 바닥에 떨어진 인장을 내려다봤다.

“황태자의 귀환 위치가 열렸소. 지금 옮기면—”

“나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라시안이 벽을 짚고 일어섰다. 목 아래의 검은 선이 맥박에 맞춰 흔들렸다.

“그곳으로 이동하거나 누구에게 인계되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하의 안전을 위한 조치요.”

“안전과 이동 동의는 같은 항목이 아닙니다.”

에단의 붓끝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황태자 라시안. 현재 위치: 황궁 지하 봉인실. 귀환 위치: 황태자 동쪽 접견실. 이동·인계 동의: 없음.’

물거울 너머에서 카일은 열린 문을 보았다. 안쪽에는 벽처럼 보이는 어둠이 있었다. 그러나 그 깊이를 확인할 수 없었다. 벽인지 통로인지 장치가 흉내 낸 빈 공간인지 알 수 없었다.

총서기관이 철판 쪽으로 다가서자 에단이 팔을 들어 막았다.

“접촉과 관측을 분리하겠습니다.”

“문을 확인하는 것조차 막겠다는 것이오?”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으면 확인이 아닙니다.”

북부 초소에서도 열여섯 번째 판의 검은 선이 흔들렸다. ‘두 번째는 문을—’이라는 미완성 문장 아래로 가느다란 획 하나가 내려왔다.

마렌이 판과 물거울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문이 열린 시각과 판의 획이 움직인 시각은 같습니다. 원인이라고 적지는 않겠습니다.”

“그대로 적으십시오.”

카일은 손바닥을 감쌌다. 미완성된 문장이 피부 아래에서 뜨겁게 뛰었다.

―문을 열면 네가 대표가 된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대표가 아니라 수령자가 되겠지.’

―수령되면 모든 문을 열 수 있다.

‘사람까지 같이 끌려가겠지.’

카일은 물거울에서 시선을 떼었다.

“아무도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라시안의 위치는 바뀌지 않습니다. 두 줄을 먼저 기록하십시오.”

마렌이 그 말을 적었다.

카일은 자신의 허리춤을 만졌다.

오래된 가죽 주머니의 모서리가 손끝에 닿았다. 그 안에는 황궁에 들어온 뒤에도 공용 장부에 섞지 않았던 개인 여비가 있었다. 신분 문서와 작은 보석과 다른 지방에서 통할 위조 패도 함께 봉인돼 있었다.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는 주머니부터 확인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준비를 멈출 수는 없었다.


비공개 물자실의 문을 닫자 북부 초소의 소음이 한 겹 멀어졌다.

마렌은 등잔을 하나만 켰다. 카일은 선반 뒤쪽의 낡은 봉인 상자를 꺼냈다. 상자에는 성별교 문양이 없었다. 개인 여비와 신분 문서를 공용금에서 분리할 때 붙인 작은 점만 남아 있었다.

“공용금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마렌이 먼저 말했다.

“구휼 창고는 도렌의 장부에 있습니다. 기록 비용은 증명 항목에 있습니다. 운송비는 자립 항목에 남아 있습니다.”

“알고 있어.”

카일은 상자를 열었다.

금화 스물한 닢과 은화 두 묶음이 나왔다. 신분 문서 세 장과 낡은 인장 패 하나와 다른 지방의 이름이 적힌 작은 패가 뒤따랐다. 대단한 재산은 아니었다. 그래도 혼자 국경을 넘고 작은 방을 구해 몇 달 숨어 지낼 수 있는 돈이었다.

카일은 금화를 네 무더기로 나눴다.

“네 사람에게 나눠 줄 거야.”

“운영비라면 공용 장부를 거쳐야 합니다.”

“운영비가 아니야. 내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넘기는 거다. 받은 사람의 조건과 반환 여부는 각자 정하게 해.”

마렌의 붓이 멈췄다.

“왜 지금입니까?”

카일은 열린 문을 떠올렸다.

“대표 기록자가 한 손이라면 그 손이 비었을 때 무엇을 기록하는지 봐야 하니까.”

마렌은 그 대답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양도인과 수령인과 목적과 반환 조건을 따로 적을 수 있는 작은 기록판 네 장을 꺼냈다.

“제 이름을 수령인으로 적겠습니다. 장치의 수령자와 혼동되지 않게 직접 받은 사실도 남기겠습니다.”

“좋아.”

“다른 분들에게도 같은 절차를 적용하겠습니다.”

“나를 의심하는군.”

“의심하지 않으면 기록관이 아닙니다.”

카일은 목적지 칸이 비어 있는 신분 문서 하나를 접어 마렌에게 건넸다.

“이것도 맡아.”

“반환 조건은요?”

“내가 요구하면 돌려줘.”

“요구하지 못하는 상황은요?”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렌은 그 침묵을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문서 아래에 작은 점을 찍었다.

‘반환 요구자 부재 시 처리: 미정.’


첫 번째 봉투는 레오나에게 갔다.

카일은 북부 초소의 부서진 방패 옆에서 그녀를 만났다. 레오나는 칼날을 갈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었지만 그녀 주변에는 비어 있는 반경이 만들어져 있었다.

“경계 유지에 쓰십시오.”

카일이 봉투를 내밀었다.

레오나는 받지 않고 카일의 얼굴을 보았다.

“명령입니까?”

“개인 양도야. 네가 거절할 수 있는 돈이라는 뜻이지.”

레오나는 봉투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왜 제게 줍니까?”

“내 이름을 빌리지 않고 경계를 세울 수 있어야 하니까.”

카일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떠나실 생각입니까?”

“아직 떠나지 않았어.”

“떠날 생각이 없다는 대답은 아니군요.”

“내가 없어도 선을 지킬 수 있게 준비하는 거야.”

레오나는 봉투 겉면의 문장을 확인했다.

‘경계 유지. 카일의 이름을 대행하지 않음. 사용 사유 공개.’

“받겠습니다. 다만 교주님이 저를 떠나보내기 위해 준 돈이라고 쓰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네가 정해.”

“교주님이 떠나면 쫓아가지 말라는 뜻인지도 쓰지 않겠습니다. 그 명령은 직접 듣지 못했으니까요.”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번째 봉투는 도렌의 수레 밑에 들어갔다.

“운송비입니다.”

도렌은 봉투를 받자마자 저울을 꺼냈다.

“사람을 옮기는 비용은 아닙니다. 귀환할 사람이 자기 짐을 가지고 움직일 때 씁니다. 장치가 수령물로 적은 사람을 옮기는 데는 쓰지 않겠습니다.”

“그 조건이면 됐어.”

도렌은 봉투를 열어 금화를 세었다. 그는 금화 한 닢을 다시 카일에게 내밀었다.

“이건 교주님이 가지십시오.”

“나는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래서 하나는 남겨 두겠습니다.”

카일은 금화를 받아 들었다.

그날 밤 마지막 봉투는 물거울을 통해 황궁으로 건너갔다.

에단은 봉투를 열기 전에 출처와 전달자를 물었다. 마렌은 물거울 앞에서 양도 기록을 읽었다.

“양도인 카일. 전달자 마렌. 수령인 에단. 목적은 황궁 기록과 성별교 기록의 분리 보관. 황실에 대한 동의나 대표 권한은 포함하지 않음.”

에단이 봉투를 받았다.

“개인 재산을 왜 내게 맡깁니까?”

“황궁에는 공식 기록이 너무 많아. 내 이름이 붙은 문서도 많고.”

“그것을 없애라는 뜻입니까?”

“없애지 마. 내가 한 말과 장치가 한 말을 나눠 보관해.”

에단은 금화와 함께 들어 있는 낡은 신분 문서 사본을 펼쳤다. 사형수 명부에 적히기 전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빈 목적지 칸이 있는 이동 문서와 현재의 교주 신분을 증명하는 표식이 들어 있었다.

“당신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군요.”

“독립을 준비하는 거야.”

“두 말은 다르지만 서로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에단은 봉투를 닫았다.

“저는 사용 전에 기록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경우의 처리까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카일은 물거울 너머의 사제를 바라봤다.

에단은 누구보다 늦게 알아차렸지만 가장 정확한 곳을 찔렀다.


새벽이 가까워졌을 때 세 봉투와 한 장의 문서 전달이 끝났다.

카일은 봉인 상자에 남은 것을 확인했다. 금화 한 닢과 낡은 인장 패 하나뿐이었다. 신분 문서는 마렌에게 넘어갔고 도주용 패는 에단의 보관 기록에 들어갔다.

그는 금화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그것만 있으면 된다.

파멸의 별이 낮게 속삭였다.

―빈손으로 문을 통과하면 네 이름도 비워진다.

‘사람이 아니라면.’

―사람과 이름을 나누는 건 네가 아니었다.

카일은 금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물거울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황궁 동쪽 접견실의 문이 다시 보였다. 이번에는 문틈 안쪽의 어둠에 세로 획 하나가 떠 있었다.

열여섯 번째 판에도 같은 획이 나타났다.

‘두 번째는 문을—’

그 아래에 새 표기가 붙었다.

‘수령 대기.’

마렌이 숨을 들이켰다.

“자산을 나눈 시각과 표기가 겹칩니다.”

“겹쳤다는 사실만 기록하십시오.”

카일은 열린 문을 보았다. 문 안쪽의 세로 획은 손처럼 보였지만 손가락도 주인도 없었다. 누구의 의사도 확인되지 않았다.

레오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떠나실 생각입니까?”

카일은 한참 뒤에 대답했다.

“내가 없어도 너희가 살아갈 준비를 하는 중이야.”

“그건 답이 아닙니다.”

“내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장부에 넣어 두는 거다.”

레오나는 카일의 주머니를 보았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카일은 금화 한 닢을 꺼내 손가락 사이에 세웠다.

“내가 가진 마지막 재산.”

“그것도 나누실 겁니까?”

카일은 동전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빈손으로 떠나면 돌아올 때 아무것도 살 수 없으니까.”

레오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마렌은 카일의 말을 두 줄로 나눠 적었다.

‘카일의 진술: 자신이 없어도 공동체가 살아갈 준비를 함.’

‘개인 추정: 귀환하지 못할 가능성을 고려함.’

그 순간 카일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대표는 수령자가—’

미완성 문장이 피부 아래에서 뛰었다. 황궁의 문 안쪽에서는 세로 획이 한 번 더 내려왔다.

이번에는 문장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 물거울의 어둠이 카일의 주머니 속 금화 한 닢을 향해 고개를 돌린 것처럼 보였다.

카일은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이별을 준비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누구를 떠나보내는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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