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64화: 성자의 눈물
열여섯 번째 판의 검은 획이 공동 철필을 지나 카일의 손바닥을 향했다.
‘다음 기록자: 손.’
마렌이 읽었다.
“제 이름이 아니라 손이라고 적혔습니다.”
“그러니 이름으로 읽지 마십시오.”
카일은 손을 뒤로 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앞으로 내밀지도 않았다. 공동 철필을 잡은 레오나와 도렌과 마렌과 유르의 손가락도 철제 손잡이에 붙어 있었다.
한 사람이 놓으면 철필이 기울 수 있었다. 기울어진 펜촉이 판을 긁는 순간 그 사람의 이름이 기록자로 남을지도 몰랐다.
“마렌. 새 항목을 하나만 만드십시오.”
“무엇을 적습니까?”
“신체 부위. 접촉자. 수령자. 동의.”
마렌은 판에 손을 대지 않고 얇은 기록판에 자기 이름과 위치부터 적었다.
‘작성자: 마렌.’
‘현재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직접 관측. 검은 선이 철필 안쪽에서 카일의 손바닥을 향하고 있습니다. 카일은 철필을 잡지 않았습니다. 수령자와 동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남기십시오.”
도렌이 철봉을 살짝 들어 올렸다. 철필 안쪽의 검은 점이 맥박쳤다. 네 손잡이에 걸린 힘은 한쪽으로 쏠렸지만 누구도 밀지 않았다.
“철필이 기록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추정입니다.”
카일이 말했다.
“직접 본 사실과 나누십시오.”
도렌은 자기 판에 짧게 적었다.
‘직접 관측: 철필 안쪽의 검은 점이 카일의 손바닥 방향으로 선을 뻗음.’
레오나는 카일의 팔꿈치만 잡았다.
“내가 팔꿈치를 고정했습니다. 카일의 동의를 대신 말하지 않습니다.”
마렌이 그 문장을 옮겼다.
철필 끝이 바닥에서 한 뼘 떠올랐다. 펜촉은 허공에서 흔들리며 판의 빈칸을 향했다.
카일의 손바닥 안쪽에서 검은 흔적이 꿈틀거렸다. 턱 아래까지 번진 자국이 심장 박자에 맞춰 뛰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한 손이면 충분하다.
‘충분한 건 네가 먹을 양이지.’
―네 이름을 쓰게 두어라. 다시 중심이 될 수 있다.
‘중심이 되면 수령자가 된다.’
카일은 검은 선 가운데 가장 가느다란 한 가닥만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통증이 손바닥을 찢었다. 검은 흔적이 목을 타고 내려오려 했다. 카일은 이를 악물고 연결 하나만 끊었다.
철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오나가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물었다.
“더 하지 마십시오.”
“더 할 생각은 없습니다.”
선은 끊겼지만 검은 점은 철필 안쪽에 남았다. 판의 글자도 지워지지 않았다.
‘기록자: 공동 기록.’
그 아래에는 여전히 ‘수령 대기’가 남아 있었다.
카일은 두 줄을 보며 입술을 굳혔다.
“우리가 누구도 수령자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만 확실합니다.”
그때 북부 초소 바깥에서 종이 울렸다.
이번에는 장치가 만든 소리가 아니었다. 눈을 밟는 발소리와 수레바퀴 소리가 함께 다가왔다.
돌담 바깥으로 부상병과 피난민이 섞인 행렬이 들어왔다.
낡은 천에 별 문양을 그린 아이가 맨 앞에서 깃발을 들었다. 누군가는 카일의 이름을 불렀고 누군가는 무릎을 꿇었다.
“셀레스티알!”
“구원자께서 살아 계신다!”
카일의 위장이 뒤틀렸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은 이미 북부까지 도착했다. 사람들은 악마가 사라진 밤을 승리라 불렀다. 그들이 카일에게 건네는 것은 감사가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노파가 카일의 손을 잡으려 했다. 레오나가 손등으로 길을 막았다.
“접촉은 따로 기록해야 합니다.”
“나는 감사 인사만 하려 했습니다.”
“말로 하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다른 뜻으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노파가 손을 거두자 카일은 자신이 다시 공포를 이용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도 여러분의 손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이름과 현재 위치를 각자의 방식으로 남기십시오. 돌아갈 곳이 없으면 없다고 적으십시오.”
마렌이 빈 판을 나눠 주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옆 사람에게 말로 불러 주었다. 마렌은 대신 적으면서 발화자와 작성자를 분리했다.
‘수령자: 없음.’
그 짧은 문장이 판마다 반복됐다.
사람들은 카일에게 속했다는 증거를 쓰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어디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남기고 있었다.
카일은 원래 그런 교단을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없어도 돌아가는 교단. 그런데 그 구조의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었다.
깃발을 든 아이가 카일을 올려다봤다.
“교주님은 이제 어디로 돌아가세요?”
카일은 웃으려 했다.
“각자 돌아갈 곳으로.”
“교주님도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카일에게 갈고리 골짜기는 너무 많은 사람이 아는 곳이었다. 황궁은 기록판과 인장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북부는 지금 눈앞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아이는 카일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모두가 돌아갈 때까지 여기 계시는군요.”
“그런 뜻은…….”
카일은 말을 삼켰다. 이 자리에서 자신이 사기꾼이라고 밝히면 사람들은 기록을 멈추고 다시 그의 손만 바라볼 것이다.
카일은 아이에게 판을 돌려주었다.
“네가 돌아갈 곳을 먼저 적어라.”
아이는 서툰 글씨로 작은 집을 그렸다. 마렌은 그것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물거울이 그때 흔들렸다.
황궁 지하 봉인실의 모습이 물거울에 떠올랐다.
에단은 기록판을 들고 있었고 라시안은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총서기관의 손목에는 검은 선이 붙어 있었다. 황실 인장은 아직 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카일.”
에단이 말했다.
“공동 기록 표기는 남았습니다. 수령 대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가 직접 한 말인지 장치가 보낸 말인지 나누십시오.”
“내가 직접 말했습니다. 장치가 보낸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에단이 즉시 두 줄을 만들었다.
라시안이 물거울 너머를 향해 말했다.
“나는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습니다. 황태자 동쪽 접견실을 귀환 위치로 유지합니다. 그러나 이동하거나 총서기관에게 인계되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에단은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총서기관이 인장을 기록판에 눌렀다.
“황실을 대표하는 내 손이 수령을 승인한다.”
“직책은 라시안의 동의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에단이 답했다.
검은 선이 총서기관의 팔을 당겼다. 그의 손이 판 위로 끌려갔다. 에단은 붓을 들었지만 판에 닿게 하지 않았다.
“기록자와 수령자를 혼동하지 마십시오.”
북부의 판에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기록자: 공동 기록.’
‘수령 대기.’
라시안이 카일에게 물었다.
“누가 나를 구했습니까?”
카일은 마렌과 북부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가 물거울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한 문장으로 대답하면 다시 자신이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끊은 선이 있습니다. 레오나가 경계를 지켰고 마렌이 기록했습니다. 도렌은 도구와 물자를 나눴습니다. 유르는 본 것을 증언했습니다. 에단은 황궁의 동의를 분리했습니다. 라시안은 자신의 거부를 직접 말했습니다.”
카일은 자신을 구원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것은 확인되지 않은 채 남겨 두십시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수령자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렌의 붓이 멈췄다.
판의 빈칸에서 검은 획이 움직였다.
‘수령자: ’
에단은 카일의 말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줄을 적었다.
‘수령자: 확인되지 않음.’
검은 획이 멈췄다.
에단이 말했다.
“이 기록은 공개 보관하겠습니다. 교주가 한 일과 공동체가 한 일을 섞지 않겠습니다.”
군중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교주님께서 자신의 공을 나누신다.”
“저것이 성자의 겸손이다.”
카일은 눈을 감고 싶었다.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려 한 말이 오히려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카일을 수레 위에 세웠다.
그는 내려가려 했지만 수레 주인은 이미 별 문양의 천을 걸고 있었다. 레오나는 주변에 선을 긋고 사람들을 물렸다.
“여기부터는 기록 구역입니다. 누구도 카일의 손을 잡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대신 쓰지 않습니다.”
마렌은 피난민의 판을 이름과 위치를 아는 사람. 귀환 위치가 없는 사람. 오염 물건과 접촉한 사람으로 나눴다. 도렌은 물자 수레를 별도 줄로 옮겼다.
카일은 그 모습을 보며 머리가 아파졌다.
이것은 자신이 바라던 교단이었다. 누군가의 신비한 손길이 없어도 사람을 살리는 구조였다.
그런데 그 구조의 가운데에 자신이 있었다.
“교주님이 없어도 기록은 이어져야 합니다.”
레오나가 말했다.
“당신이 만든 규칙이지 않습니까?”
카일은 그녀를 바라봤다.
레오나는 남아 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카일이 없어도 경계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매달려서 떠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된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카일은 군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구원은 한 사람에게 수령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울음을 터뜨렸다.
“교주님께서 저희에게 구원을 나눠 주신다!”
“아니.”
카일은 부정하려 했다.
턱 아래의 검은 흔적이 뜨겁게 뛰었다. 손바닥에서 끊은 선의 통증이 눈가까지 올라왔다. 눈물 한 방울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감격해서가 아니었다.
승리해서도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선명했다. 이름 없는 술집 주인으로 살며 돈을 세고 싶었다. 교리도 기록도 수령자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돌아갈 곳을 적는 아이가 있었다. 황궁에는 자기 동의를 지키려는 황태자가 있었다. 옆에는 카일이 없어도 경계를 세우겠다는 레오나가 있었다.
그들은 카일의 거짓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카일이 만든 규칙을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를 울게 했다.
“성자님께서 우신다.”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우신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 우신다.”
소문은 눈물보다 빠르게 퍼졌다.
카일은 손바닥을 감추지 못했다. 눈물이 검은 흔적 위로 번지자 공동 철필 안쪽의 점이 한 번 크게 맥박쳤다.
열여섯 번째 판의 글자가 흔들렸다.
‘기록자: 공동 기록.’
‘수령 대기.’
새로운 명령은 나타나지 않았다.
에단의 목소리가 물거울에서 끊겨 나왔다.
“다음 공개 기록은 교단의 운영 주체를—”
문장이 끝나지 않았다.
모든 시선이 다시 카일에게 모였다.
카일은 눈물을 닦지 않았다. 이제 그 눈물이 무엇으로 해석되든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망칠 곳이 없다.’
파멸의 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공동 기록판의 빈칸에서 검은 선 하나가 다음 줄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