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63화: 공동 기록의 손
열여섯 번째 판의 빈칸에서 검은 획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카일의 필체를 흉내 내는 속도가 더 빨랐다. ‘수령 대기’라는 글자의 첫 획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선이 카일의 이름 마지막 획을 따라갔다.
카일은 손을 들지 않았다.
“마렌. 새 칸을 만드십시오.”
“어떤 칸을 말합니까?”
“작성자. 기록 대상. 직접 관측. 수령자. 동의.”
마렌은 공동 기록판의 가장자리에 다섯 칸을 그었다. 카일이 말한 항목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자기 이름과 현재 위치를 먼저 적었다.
‘작성자: 마렌.’
‘현재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그녀는 열여섯 번째 판을 보면서도 손을 판 쪽으로 뻗지 않았다.
“직접 관측은 검은 획이 카일의 필체를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록 대상은 열여섯 번째 판의 빈칸입니다. 수령자는 없음. 동의는 확인되지 않음.”
“좋습니다. 그 문장만 남기십시오.”
카일의 오른손 손가락 마디에 붙었던 검은 점은 이제 판의 빈칸 안쪽에서 맥박치고 있었다. 점에서 뻗은 가느다란 선 하나가 카일의 손을 향했다가 공동 기록판 옆에 놓인 철제 펜촉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렌이 펜촉을 쇠집게로 들어 올렸다.
“이건 기록판에 쓰는 도구입니다.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릅니다.”
펜촉 끝이 떨렸다. 검은 선이 금속 안쪽으로 파고들며 카일의 손가락을 흉내 낸 짧은 곡선을 만들었다.
마렌이 붓을 멈췄다.
“펜촉이 움직였습니다.”
“펜촉이 흔들린 사실과 제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나눠 적으십시오.”
레오나는 카일의 팔꿈치를 잡았다. 이번에는 억지로 손을 뒤로 당기지 않았다. 손가락이 판에 닿지 않도록 팔의 위치만 고정했다.
“카일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록하겠습니다.”
“당신이 고정했다는 사실과 내가 동의했다는 문장은 따로 두십시오.”
레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철제 펜촉이 바닥에서 한 뼘 떠올랐다. 끝이 공동 기록판을 향했다. 검은 선이 펜촉과 판 사이에 매달렸고 금속 표면에 카일의 이름과 닮은 첫 획이 번졌다.
도렌이 펜촉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손잡이를 놓는 순간 선이 기록판의 빈칸으로 돌진할 것 같았다.
“놓지 마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대신 내가 잡지 않습니다. 네 기록으로 나눠야 합니다.”
그는 유르를 바라봤다.
“네가 본 것은 펜촉이 떠오른 순간뿐입니다. 그 밖의 뜻은 쓰지 마십시오.”
유르는 자기 판을 끌어안고 적었다.
‘유르의 직접 관측: 철제 펜촉이 바닥에서 떠올라 공동 기록판을 향함.’
검은 선은 그 문장을 읽은 듯 한 번 떨렸다. 열여섯 번째 판의 ‘수령 대기’ 아래에 새 글자가 나타났다.
‘기록자: 카—’
마지막 획은 완성되지 않았다.
카일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파멸의 별이 머릿속에서 낮게 웃었다.
―네 손을 빌리지 않았는데도 네 이름을 쓴다.
‘이름과 손은 같은 항목이 아니다.’
―그럼 손을 버려라.
카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철제 펜촉 끝에서 검은 점 하나가 더 떨어졌다.
황궁 지하 봉인실의 인장은 총서기관의 손목에 붙은 채 에단의 기록판을 향해 끌렸다.
총서기관이 팔을 잡아당겼다. 그림자의 손가락이 함께 움직였고 기록판의 가장자리에 새 문장이 번졌다.
‘다음 기록자: 에단.’
에단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판에 세 줄을 만들었다.
‘내가 직접 말한 문장.’
‘내가 직접 본 장면.’
‘장치가 표기한 역할.’
“총서기관. 인장을 누른 손을 그대로 두십시오.”
“이제 내 손까지 기록하겠다는 건가?”
“이미 기록되고 있습니다. 제가 쓰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림자가 총서기관의 팔을 문턱 쪽으로 당겼다. 푸른 커튼 너머로 보이던 빈 접견실의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문 안쪽 바닥에 검은 선이 번지며 글자를 만들었다.
‘귀환 위치: 황태자 동쪽 접견실.’
라시안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벽에서 등을 떼고 자기 판을 들었다.
“나는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다. 귀환 위치는 황태자 동쪽 접견실로 정했다. 그곳으로 이동하거나 누군가에게 넘겨지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에단은 라시안의 말을 한 글자도 합치지 않고 별도 판에 적었다.
총서기관이 이를 악물었다.
“귀환 위치를 정했다면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절차 아닌가?”
“돌아갈 곳과 누가 받는지는 다른 항목입니다.”
“황실 인장이 그 절차를 승인한다.”
“인장이 닿았다는 사실만 승인합니다.”
에단은 총서기관의 손목과 인장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의 이름과 직책도 따로 기록합니다. 라시안의 수령자는 아닙니다.”
총서기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황실을 대표한다.”
“대표한다는 말과 라시안의 동의를 받았다는 말도 다릅니다.”
인장의 세 갈래 홈에서 검은 액체가 한 방울 떨어졌다. 바닥에 닿은 액체는 그림자의 손가락처럼 휘어 에단의 판 가장자리를 감쌌다.
에단은 붓을 세웠다.
“기록자 표기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령자로 이동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라시안이 물었다.
“증거가 없다는 말이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위험하다는 판단도 기록자가 대신하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북부의 물거울에 에단의 판이 비쳤다. 동시에 북부 철제 펜촉의 끝이 검게 물들었다.
두 장소의 선이 같은 글자를 쓰려 했다.
‘기록자: ’
에단은 손을 멈췄고 카일도 펜촉에 손대지 않았다.
“한 사람이 쓰지 않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카일은 북부 생존자들이 들고 있던 철제 말뚝 네 개를 가리켰다. 도렌은 말뚝의 끝을 짧은 철봉에 묶었다. 철제 펜촉은 철봉 끝에 고정했고 네 방향의 손잡이가 달린 십자형 철필이 만들어졌다.
마렌이 물었다.
“이것도 기록판이 만든 물건입니까?”
“만든 사람과 장치가 반응하는 이유는 따로 적으십시오. 지금은 도렌이 묶었다는 사실만 확인합니다.”
카일은 공동 철필 앞에 서지 않았다. 레오나와 도렌이 한 손잡이씩 잡고 마렌과 유르가 반대쪽을 잡았다. 네 사람의 손이 같은 금속을 만졌지만 펜촉의 움직임을 한 사람이 독점할 수는 없었다.
카일이 말했다.
“각자 자기 위치와 본 것을 말하십시오. 문장은 합치지 않습니다. 철필은 마지막에 한 줄만 씁니다.”
마렌이 먼저 말했다.
“나는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에 있습니다. 철제 펜촉이 검은 선에 붙어 떠오른 것을 보았습니다.”
유르가 이어 말했다.
“나는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검은 점이 펜촉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렌이 손잡이를 쥔 채 말했다.
“나는 철봉과 말뚝을 묶었습니다. 펜촉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레오나는 카일을 보지 않고 말했다.
“나는 카일의 팔을 움직이지 않게 잡았습니다. 카일의 동의를 대신 말하지 않습니다.”
네 사람의 문장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공동 철필은 천천히 움직였다.
금속 끝이 기록판 위에 닿았다. 한 사람이 밀지 않았는데도 첫 획이 그어졌다. 검은 선이 네 손잡이 사이를 오가며 어느 손의 필체도 닮지 않은 글자를 만들었다.
‘기록자: 공동 기록.’
마렌의 숨이 멎었다.
“표기가 바뀌었습니다.”
“바뀐 사실만 쓰십시오. 장치가 공동 기록을 승인했다고 해석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판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기록자: 카일’의 미완성 획은 흐려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공동 기록’이라는 글자 아래에는 여전히 ‘수령 대기’가 남아 있었다.
그때 유르가 소리쳤다.
“손잡이 안쪽에 점이 있습니다.”
철봉의 틈 사이에서 검은 점 하나가 맥박쳤다. 카일의 손가락에서 떨어졌던 점과 같은 모양이었다. 공동 철필이 네 사람의 손 사이에서 다시 움직이려 했다.
레오나가 손잡이를 놓으려 했다.
“놓지 마십시오.”
카일이 말했다.
“한 사람이 놓는 순간 그 사람의 손이 단독 기록자로 표기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손을 확인한 채 멈추십시오.”
네 사람은 손잡이를 쥔 채 움직임을 멈췄다. 철필의 끝은 기록판 위에 머물렀다. 검은 점은 금속 틈 안에서 카일의 손가락을 닮은 작은 곡선을 만들었다.
카일은 그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안도했다.
한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아도 표기는 바뀔 수 있었다.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황궁 지하에서 인장이 갑자기 뒤집혔다.
총서기관의 손이 앞으로 꺾이며 금속 테두리가 기록판을 긁었다. ‘귀환 위치: 황태자 동쪽 접견실’이라는 문장이 검게 깊어졌다.
라시안의 목 아래 선이 조여 왔다. 그는 판을 놓치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붙잡았다.
“에단. 내 위치와 귀환 위치를 따로 쓰십시오.”
“이미 쓰고 있습니다.”
“그럼 왜 문장이 움직입니까?”
에단은 대답 대신 총서기관의 손목을 보았다. 인장은 라시안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귀환 위치를 먼저 짙게 만들고 있었다.
“위치가 표기된 사실과 이동 명령은 다릅니다.”
에단은 새 줄을 추가했다.
‘라시안의 직접 진술: 귀환 위치는 유지하지만 이동과 인계에는 동의하지 않음.’
그림자의 손이 기록판 가장자리를 긁었다. 검은 선이 인장에서 빠져나와 에단의 붓을 향했다.
북부에서는 공동 철필 안의 검은 점이 카일 쪽으로 돌아섰다. 철봉의 틈에서 나온 선이 레오나의 손을 지나 카일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열여섯 번째 판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다음 기록자: 손.’
마렌이 숨을 삼켰다.
“카일의 손입니까?”
“아직 그렇게 쓰지 마십시오.”
카일은 손을 펼쳤다. 손바닥 안쪽의 검은 흔적이 목 가까이에서 다시 한 줄 내려왔다. 파멸의 별이 기뻐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네 손으로 쓰면 된다.
‘한 손으로 쓰지 않는다.’
카일은 검은 점과 공동 철필 사이에 이어진 선 가운데 가장 가느다란 한 가닥만 끌어당겼다. 손바닥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팔꿈치까지 솟았다. 검은 흔적은 목 가까이에서 멈추지 않고 턱 아래까지 번졌다.
공동 철필의 선은 끊겼다. 그러나 철봉 안쪽의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레오나가 카일의 손목을 감쌌다.
“더 쓰지 마십시오.”
“내가 쓴 게 아닙니다.”
“그래도 대가는 당신에게 옵니다.”
카일은 대꾸하지 못했다. 손바닥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먹으로 쓴 글자가 아니라 피부 아래에서 어두운 빛이 밀려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손은 하나가 아니다.’
에단의 판에도 같은 문장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아래에는 다른 줄이 이어졌다.
‘다음 기록자: 손.’
카일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공동 철필을 잡은 네 사람의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열여섯 번째 판의 검은 획은 다섯 번째 손가락을 향해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