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62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AD
스폰서 광고

62화: 기록을 거부한 이름

그림자의 손가락이 문턱을 완전히 넘어왔다.

북부 열여섯 번째 판의 마지막 검은 획은 카일의 손가락을 향해 기울었다. 잘린 소매 안쪽에서 떨어진 검은 점이 손가락 마디에 달라붙자 피부 아래가 얼음처럼 식었다.

카일은 손을 움켜쥐지 않았다.

“레오나. 손을 베지 마십시오.”

레오나는 칼을 뽑은 채 카일의 손목이 아니라 바닥을 보았다. 그녀는 라우렌의 부러진 휘장을 흰 재 안쪽에 세우고 철제 말뚝을 그 앞에 박았다. 휘장과 말뚝 사이에 가느다란 틈이 남았다.

그림자의 손가락이 그 틈으로 뻗었다. 검은 점은 카일의 손가락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선 하나를 뽑아 휘장 쪽으로 늘였다.

레오나는 부러진 휘장의 모서리를 밀어 선이 카일의 피부와 그림자 사이에 직접 닿지 않게 했다.

“범위를 나눴습니다.”

“내 손은요?”

“아직 당신의 손입니다. 표기는 손에 붙어 있습니다.”

마렌이 열여섯 번째 판을 보며 물었다.

“‘다음 기록자: 카일’을 그대로 읽습니까?”

“장치 표기로 읽으십시오. 내 동의로 옮기지 마십시오.”

카일은 자기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이름을 지우면 장치가 틀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기록의 빈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흰 재 밖에 선 채 마렌을 바라봤다.

“카일의 직접 진술로 적으십시오. 현재 위치는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나는 열여섯 번째 판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기록자가 되거나 누구의 수령자가 되는 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마렌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그 아래에는 관측자를 따로 적었다.

‘마렌의 직접 관측: 검은 점이 카일의 오른손 손가락 마디에 붙어 있음.’

‘장치 표기: 다음 기록자: 카일.’

카일의 얼굴을 한 환영이 물거울 위에서 입을 열었다.

“나는 카일이다. 다음 기록을 승인한다.”

마렌의 붓끝이 멈췄다.

“교주님이 방금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카일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거울 너머의 얼굴이 그의 표정을 따라 웃었다.

“내 얼굴도 기록에 넣지 마십시오. 발화자 없음으로 분리하십시오.”

파멸의 별이 정신 안쪽에서 낮게 웃었다.

―네 이름을 부정하면 되지 않느냐. 네가 아니라고 말한 자리가 비면 내가 그곳을 먹겠다.

‘이름을 비우는 것과 동의를 비우는 것은 다르다.’

카일은 속으로만 답했다.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거울 속 환영이 그의 침묵을 제멋대로 이어 붙이는 동안 레오나는 휘장과 철제 말뚝의 간격을 한 치 더 좁혔다.

검은 선이 떨렸다. 손가락의 점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열여섯 번째 판의 ‘카일’이라는 글자 가장자리가 젖은 먹처럼 번졌다.


황궁 지하 봉인실에서 총서기관의 손목을 감싼 선이 다시 당겨졌다.

인장은 기록판에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총서기관이 팔을 뒤로 빼자 그림자의 손이 함께 움직였고 판 위의 빈 칸이 검게 번졌다.

“에단. 네 이름을 기록해.”

목소리는 그림자의 얼굴 없는 머리에서 흘러나왔다. 에단은 그 말을 자기 판에 옮기지 않았다. 그는 새 판을 세워 세 칸을 나누었다.

‘직접 발화.’

‘장치 추정 발화.’

‘기록자의 역할.’

“총서기관. 이름을 말하십시오. 현재 위치를 말하십시오. 인장을 눌렀다는 사실을 말하십시오.”

“지금 나를 심문할 때인가?”

“당신의 직책을 수령자의 동의로 바꾸지 않기 위한 확인입니다.”

총서기관은 이를 악물었다. 그림자가 팔을 당길 때마다 손가락 끝이 판에 붙었다.

“나는 총서기관이다.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다. 황실 인장을 기록판에 눌렀다.”

“라시안을 당신에게 넘기는 데 동의받았습니까?”

총서기관의 시선이 라시안에게 향했다.

“황실의 명령이 있으면 동의는—”

“질문에 답하십시오.”

에단이 끊었다.

총서기관은 숨을 삼켰다.

“받지 못했다.”

라시안이 곧바로 말했다.

“나는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습니다. 황태자 동쪽 접견실을 귀환 위치로 정했지만 그곳으로 옮겨지거나 총서기관에게 넘겨지는 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에단은 두 사람의 문장을 합치지 않았다. 총서기관의 진술은 총서기관의 판에, 라시안의 말은 라시안의 판에 적었다.

그림자의 손이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인장은 여전히 붙어 있었고 총서기관의 손목에 남은 선도 사라지지 않았다. 에단은 자기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당김이 느려졌습니다.”

라시안이 말했다.

“느려진 사실만 적겠습니다. 진술 때문에 느려졌다고 쓰지 않겠습니다.”

에단은 기록판의 가장자리에 다음 문장을 추가했다.

‘총서기관의 진술 뒤 그림자의 당김이 한 박자 느려짐. 인장과 검은 선은 유지됨. 인과 미확정.’

그림자의 손가락이 총서기관의 팔에서 떨어지는 대신 에단의 기록판으로 움직였다. 금속판 가장자리에 검은 글자가 떠올랐다.

‘기록자: 에단.’

에단은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이 표기는 장치가 쓴 문장입니다. 제가 수령자라는 뜻으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라시안도 자기 판을 들었다.

“에단의 기록을 내 동의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기록자가 있다는 사실도 따로 남기십시오.”

황궁 쪽 물거울에 북부 판의 글자가 겹쳐 나타났다.

‘다음 기록자: 카일.’

총서기관이 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저 이름을 쓰면 장치가 멈출지도 모른다.”

“당신의 손으로 쓰지 마십시오.”

에단은 총서기관의 팔을 잡아당겼다.

“누군가의 이름을 대신 쓰는 순간 그 사람이 동의한 것처럼 섞입니다.”

총서기관은 처음으로 인장보다 자신의 손을 먼저 보았다.


북부에서 검은 점이 움직였다.

카일의 손가락 마디에 붙은 점에서 얇은 선이 빠져나와 부러진 휘장으로 이어졌다. 선의 끝은 휘장을 지나 흰 재 밖에 놓인 공동 기록판의 모서리에 닿았다.

도렌이 판을 보며 말했다.

“검은 점이 판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내 손에서 떨어졌다고 적지 마십시오. 닿은 사실만 기록하십시오.”

카일은 손을 뒤로 빼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면 선의 방향도 달라졌다. 레오나가 그의 팔꿈치를 잡아 고정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내가 움직이면 기록자가 되나?”

“그것도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하나만 남겨야 합니다.”

레오나는 카일의 손을 붙잡은 채 마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카일의 팔을 고정했다는 사실을 적으십시오. 카일이 동의했다는 문장은 적지 마십시오.”

마렌은 그 말을 따로 적었다. 도렌은 공동 기록판을 쇠집게로 밀어 흰 재의 경계 밖으로 옮겼다. 카일과 판 사이의 선은 길어졌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이제 세 기록으로 나눕니다.”

카일이 말했다.

“마렌은 내 진술과 직접 관측을 기록합니다. 레오나는 손을 고정한 행동만 증언합니다. 도렌은 판을 옮긴 행위와 수령자 칸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서로의 문장을 복사하지 마십시오.”

유르가 판 하나를 들었다.

“나는 어디에 들어갑니까?”

“당신은 검은 점이 판에 닿은 순간을 본 사람입니다. 다른 사실은 덧붙이지 마십시오.”

유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기 판에 문장을 썼다.

‘유르의 직접 관측: 검은 점에서 나온 선이 공동 기록판의 모서리에 닿음.’

그 순간 물거울 속 카일의 얼굴이 다시 말했다.

“카일이 판을 만졌다. 카일이 기록을 승인했다.”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마렌이 거울을 보며 물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반박하면 그 목소리도 내 것으로 만들 겁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록하십시오.”

마렌은 ‘카일의 입술 움직임 없음’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 ‘장치 추정 발화: 카일이 판을 만졌고 기록을 승인함’을 따로 넣었다.

검은 별의 중심이 갈라졌다. 작은 점 셋이 물거울 가장자리로 흘렀지만 열여섯 번째 판의 글자는 그대로 남았다.

도렌이 수령자 칸을 확인했다.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빈칸도 기록입니다. 비어 있다고 동의한 것이 아닙니다.”

카일은 그렇게 말한 뒤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검은 점은 피부에서 반쯤 빠져나와 기록판 모서리에 붙어 있었다. 손끝은 차가워졌지만 가슴 아래의 검은 흔적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지금 먹어라. 작은 점 하나면 네가 다시 중심이 된다.

‘중심이 되지 않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래서 다른 손을 빌리느냐?

‘빌리는 것과 빼앗는 것은 다르다.’

카일은 손을 펴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판에서 새로운 칸이 열렸다.

‘기록자: 카일.’

그 아래에 빈 줄이 길게 이어졌다.

‘수령 대기: ’

마렌이 숨을 삼켰다.

“기록자 표기 아래에 수령 대기 칸이 생겼습니다.”

“두 줄을 하나로 읽지 마십시오.”

카일은 판을 바라봤다. 기록자라는 이름은 남아 있었고 그 아래의 빈칸은 마치 손을 기다리는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림자의 손이 물거울을 건너오는 대신 기록판의 모서리를 따라 기어왔다. 검은 점이 손가락에서 판으로 완전히 옮겨가자 카일의 손끝에서 감각이 돌아왔다.

그러나 판 위에는 그의 필체와 닮은 선이 나타났다.

카일은 쓴 적이 없는 곡선이었다. 선은 ‘카일’의 마지막 획을 흉내 내며 빈 수령 대기 칸으로 향했다.

레오나가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베어도 됩니까?”

“선이 판에 있습니다. 베면 판이 둘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을 합니까?”

카일은 손가락을 펼쳤다. 검은 점을 먹어 치우면 필체를 흉내 내는 선도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힘은 손끝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 가닥만 끌어옵니다.”

레오나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대가를 확인하십시오.”

“확인하면서 합니다.”

카일은 검은 흔적을 손끝에 모았다. 기록판으로 이어진 선 가운데 필체를 흉내 내는 한 가닥만 검은 자국 안으로 빨아들였다.

통증이 손바닥을 찢고 팔꿈치까지 번졌다. 가슴 아래의 흔적이 한 줄 올라와 목 가까이 멈췄다.

필체를 흉내 내던 선은 끊겼다. 그러나 ‘기록자: 카일’과 ‘수령 대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마렌이 떨리는 손으로 적었다.

‘카일이 기록판의 모사 선 한 가닥을 제한 흡수함. 흡수 뒤 카일의 검은 흔적이 목 가까이 이동함.’

카일은 숨을 고르며 판을 보았다.

“표기가 남은 사실과 내가 썼다는 사실을 나누십시오.”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기록자라는 표기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말도 적으십시오.”

마렌이 마지막 문장을 쓰려는 순간 황궁 쪽 물거울에서 에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일. 확인하라.”

에단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황궁의 판에도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다음 기록: 카일의 손—’

문장은 끝나지 않았다.

카일은 손을 기록판 위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온 검은 점 하나가 판의 빈칸 안쪽에서 천천히 맥박쳤다.

레오나가 낮게 물었다.

“그 점은 이제 누구의 것입니까?”

“아직 누구의 것이라고 기록하지 마십시오.”

답을 쓰는 순간 그 말이 새로운 소유 선언이 될 수 있었다.

열여섯 번째 판의 빈 수령 대기 칸에서 검은 획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카일의 손이 아니라 카일의 필체를 흉내 내며.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