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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61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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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수령을 거부한 손

그림자의 손가락이 문턱을 완전히 넘어왔다.

북부 초소의 열여섯 번째 판에서 검은 선이 튀어나왔다. 선의 끝은 카일의 손목이 아니라 소매 끝을 먼저 감쌌다. 천이 팽팽해지며 카일의 몸이 판 쪽으로 끌렸다.

카일은 발을 멈췄다.

“레오나. 내가 수령자가 되지 않게 막으십시오.”

레오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뽑았지만 선을 겨누지는 않았다. 칼끝은 카일의 팔과 소매 사이로 파고들었다.

천이 찢어졌다.

검은 선은 잘리지 않았다. 카일의 소매만 어깨 아래에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은 떨어진 천에 남아 계속 판 쪽을 당겼다.

카일의 팔에는 닿지 않았다.

레오나는 잘린 소매를 흰 재 바깥으로 밀어냈다. 라우렌의 부러진 휘장을 세우고 그 위에 철제 말뚝을 눌러 선이 천과 휘장 사이에만 머물게 했다.

마렌이 붓을 들었다.

“직접 관측을 읽겠습니다. 카일의 소매에 검은 선이 붙었고 레오나가 천과 몸을 분리했습니다.”

“수령자 칸은요?”

도렌이 물었다.

“없음입니다. 소매를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카일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검은 흔적은 가슴 아래에서 멈춰 있었다. 선을 끌어당겨 먹어 치우면 더 쉽게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을 쓰는 순간 자신의 이름과 선이 하나의 중심으로 묶일 수 있었다.

파멸의 별이 낮게 웃었다.

―천을 버리고 사람을 남겼군. 이제 네 몸만 내놓으면 된다.

‘오늘은 네 입을 빌리지 않는다.’

카일은 손을 뻗지 않았다. 레오나가 그의 앞을 막아선 채 잘린 소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명령을 바꾼 겁니까?”

“당신을 수령자로 만들지 말라는 명령을 따랐습니다.”

레오나가 검을 거두었다.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명령의 글자보다 뜻을 먼저 봅니다.”

열여섯 번째 판에는 기존의 ‘수령자: 총서기관’이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 새 글자가 겹치듯 번졌다.

‘최종 수령자: 카일.’

마렌의 붓끝이 멈췄다.

“두 표기가 동시에 남아 있습니다.”

“발생 시각과 소매가 분리된 시각을 나눠 적으십시오. 새 표기가 이전 표기를 지웠다고 쓰지 마십시오.”

카일은 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카일’이라는 글자의 마지막 획이 흐려졌다. 검은 선이 소매 쪽으로 당겨지자 글자도 천을 따라 흔들렸다.

그 순간 황궁 쪽 물거울이 검게 물들었다.

그림자가 총서기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발밑 없는 몸이 문턱에서 몸을 틀었다. 푸른 커튼 뒤에 있던 얼굴 없는 머리가 북부를 향했다.

열여섯 번째 판에 새 줄이 올라왔다.

‘다음 확인자: 에단.’

카일은 잘린 소매를 내려다봤다.

“이제 사람을 바꿉니다.”


황궁 지하 봉인실에서 총서기관은 자신의 팔을 잡아당겼다.

인장은 기록판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림자의 손가락은 그의 손목을 감싼 채 피부 안쪽으로 가느다란 검은 선을 밀어 넣고 있었다.

에단은 총서기관의 팔을 놓지 않았다.

“인장을 떼십시오.”

“내가 붙인 게 아니야.”

“누가 붙였든 당신의 손이 판에 닿은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황실의 인장은 황실의 책임을 뜻한다. 내가 책임을 진다고 했으니 장치가 명령을 받은 거다.”

총서기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아직도 장치가 권한의 언어를 알아들을 것처럼 말했다.

라시안은 벽에 기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검은 선이 목 아래에서 한 번 조여 왔지만 문틈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총서기관. 당신이 책임진다는 말은 내가 당신에게 넘겨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총서기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장을 떼려던 손이 떨렸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그림자의 손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에단은 기록판을 총서기관 앞에 세웠다.

“이름을 말하십시오. 현재 위치를 말하십시오. 인장을 눌렀다는 사실을 말하십시오. 그다음 라시안의 수령에 동의했는지 말하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심문을 하겠다는 건가?”

“심문이 아니라 진술입니다. 당신의 직책은 수령자의 동의가 아닙니다.”

그림자가 에단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에단. 확인하라.”

문턱을 넘은 손이 총서기관의 손목에서 떨어져 에단 쪽으로 움직였다. 총서기관의 팔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지만 검은 선은 끊기지 않았다.

라시안이 기록판을 들었다.

“먼저 내가 말하겠습니다.”

“전하.”

“나는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습니다. 귀환 위치는 황태자 동쪽 접견실로 정했지만 수령자는 없습니다. 총서기관에게 넘겨지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총서기관을 바라봤다.

“당신도 당신이 한 일을 말하십시오.”

총서기관의 얼굴이 굳었다. 금속 테두리 안의 세 갈래 홈이 검게 젖어 있었다.

“나는 총서기관이다.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다. 황실 인장을 기록판에 눌렀다.”

그의 목소리는 낮아졌지만 문장은 흐려지지 않았다.

“나는 라시안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라시안이 내게 넘겨지는 것에 동의한 적은 없다.”

그림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총서기관은 그 틈을 보며 숨을 삼켰다.

“나는 그의 수령자라고 적혔지만 그 표기가 내게 사람을 넘길 권한을 주지는 않는다.”

말이 끝나자 손목을 죄던 힘이 한 박자 느려졌다. 인장은 여전히 판에 붙어 있었고 ‘수령자: 총서기관’이라는 글자도 사라지지 않았다.

에단은 세 문장을 따로 적었다.

‘총서기관의 직접 진술: 인장을 눌렀고 라시안을 옮기려 했으나 라시안의 인계 동의는 받지 않음.’

‘장치 표기: 수령자: 총서기관.’

‘진술 뒤 그림자의 당김이 한 박자 느려짐. 원인 미확인.’

에단은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멈춘 사실과 풀린 사실은 다릅니다. 진술이 원인이었다고 적지 않겠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총서기관이 물었다.

에단이 대답하기 전에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없는 곳에서 라시안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음성이 새어 나왔다.

“에단. 확인하라.”

에단의 앞에 놓인 빈 판 위로 검은 글자가 번졌다.

‘다음 확인자: 에단.’

그는 붓을 들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자기 이름을 지우지는 않았다.


북부의 물거울에는 소리가 없었다. 카일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고 총서기관의 진술도 건너오지 않았다. 대신 황궁 쪽 거울마다 서로 다른 검은 점이 흔들렸다.

마렌이 물었다.

“황궁의 내용을 어떤 문장으로 보내겠습니까?”

“한 문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카일은 공동 기록판을 세 장으로 나눴다.

“첫 번째는 총서기관이 인장을 판에 눌렀다는 관측입니다. 두 번째는 라시안이 넘겨지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는 직접 진술입니다. 세 번째는 에단이 그림자를 보고 기록했다는 관측입니다.”

도렌이 은판을 들어 올렸다.

“세 장을 같은 연락소로 보내면 하나의 명령처럼 읽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각자 자기 위치와 직접 본 사실을 먼저 쓰게 합니다. 전달자는 수령자가 아닙니다. 읽는 사람도 수령자가 아닙니다.”

카일은 잘린 소매를 가리켰다. 검은 선은 천에 붙어 있었지만 그의 팔로는 넘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내 환각은 쓰지 않습니다.”

마렌이 눈을 들었다.

“교주님의 얼굴 없이 연락망을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움직이는지부터 기록해야 합니다. 내 얼굴이 없으면 장치가 훔칠 입도 하나 줄어듭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믿음과 복종을 섞는 입은 네 것이다.’

카일은 흰 재 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손목에 남은 검은 흔적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흡수하지 않습니다.”

레오나가 그를 바라봤다.

“손을 쓰지 않으면 선이 남습니다.”

“손을 쓰면 내가 중심이 됩니다. 남은 선이 무엇을 먹는지 보면서 기록하겠습니다.”

마렌은 북부 초소의 판에 먼저 적었다.

‘이름: 마렌.’

‘현재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직접 본 사실: 카일의 소매에 검은 선이 붙었고 레오나가 소매를 분리함.’

‘수령자: 없음.’

남쪽 역참의 기록관은 자신이 직접 본 검은 별과 은판의 도착 시각만 기록했다. 동쪽 창고의 기록관은 에단의 이름을 읽지 않았다.

북부 마을에서는 노인이 손녀에게 자신의 위치를 받아 적게 했다.

“없음이라고 쓰거라. 내가 누구의 수령자도 아니라는 뜻이다.”

각 기록은 서로 달랐다. 같은 문장을 외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진술을 자기 말로 바꾸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판의 검은 선이 물거울을 따라 갈라졌다. 카일의 소매를 당기던 힘은 한 줄로 남지 않고 기록판 가장자리마다 얇게 걸렸다.

마렌이 시간을 확인했다.

“검은 별이 다시 점으로 나뉩니다.”

“분산됐다고 적으십시오. 멈췄다고 적지 마십시오.”

도렌은 각 이동표의 수령자 칸을 다시 확인했다. 어느 칸에도 이름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열여섯 번째 판에 새 문장이 나타났다.

‘수령자: 없음.’

유르가 숨을 내쉬었다.

“총서기관의 표기가 지워졌습니다.”

“새 표기가 나타났고 이전 표기의 빛이 약해졌다고 쓰십시오. 지워졌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황궁 쪽 물거울을 보았다. 총서기관의 팔은 여전히 그림자에 붙잡혀 있었다.

“사람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다.”


에단은 자신의 판에 글을 쓰고 있었다.

‘이름: 에단.’

‘현재 위치: 황궁 지하 봉인실.’

‘직접 본 사실: 발밑 없는 그림자가 문턱을 넘어 총서기관의 팔에 닿았고 내 이름을 부름.’

‘역할: 기록자.’

‘수령자: 없음.’

그림자는 글자를 따라 손을 움직였다. 검은 손가락이 판의 가장자리를 긁었지만 빈 수령자 칸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라시안이 에단의 판을 바라봤다.

“그 기록을 내 동의로 승인하지 않습니다.”

“승인하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장치가 그 틈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기록이 나를 대신하는 문장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에단은 그 말을 별도의 줄로 옮겼다.

‘라시안의 직접 진술: 에단의 기록을 라시안의 동의로 승인하지 않음.’

총서기관은 기록판과 자신의 팔을 번갈아 보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에단은 총서기관의 손목을 확인했다. 검은 선은 피부 안쪽에 머물렀고 그림자의 손은 더 끌어당기지 않았다. 인장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확인된 것은 당신이 인장을 눌렀다는 사실과 라시안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은 아직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자가 뒤로 물러났다. 문이 닫힌 것은 아니었다. 푸른 커튼과 빈 의자는 그대로 보였다.

황궁 쪽 판의 글자가 북부 물거울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수령자: 없음.’

그 아래에 다른 문장이 이어졌다.

‘기록자: 에단.’

카일은 그 문장을 읽고 손을 뻗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판의 마지막 줄이 천천히 올라왔다.

‘다음 기록자: 카일.’

아무도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파멸의 별이 웃음을 삼켰다.

―이번에는 네 손으로 써라.

카일은 잘린 소매를 바라봤다. 검은 선은 천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소매 안쪽에서 작은 검은 점 하나가 떨어져 그의 손가락 마디에 닿았다.

카일은 붓을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열여섯 번째 판의 마지막 획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실제 지정인지 장치의 표기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검은 획의 방향만은 그의 손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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