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60화: 수령자가 없는 기록
검은 별이 모든 물거울에 떠오른 순간 카일의 목소리는 연결망에서만 사라졌다.
북부 초소의 공기는 그대로였다. 유르가 종줄을 놓친 것도 아니고 마렌의 붓이 부러진 것도 아니었다. 가까이 있던 레오나는 카일의 숨과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물거울 너머로는 아무 말도 흘러나가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판에 남아 있던 문장이 천천히 이어졌다.
‘확인자: 대륙 전체—’
마렌이 붓을 들었다.
“문장이 완성되기 전에 기록하겠습니다.”
카일은 공동 기록판을 끌어당겼다. 그는 먼저 네 칸을 그었다.
‘이름.’
‘현재 위치.’
‘직접 본 사실.’
‘수령자.’
마지막 칸에는 곧장 적었다.
‘없음.’
그는 물거울 쪽을 가리킨 뒤 다섯 번째 줄을 만들었다.
‘발화자: 없음.’
마렌이 그 뜻을 읽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실을 적습니까?”
“아닙니다. 말은 떠올랐습니다. 다만 누가 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 출처가 없는 겁니다.”
동쪽 창고의 물거울 아래에 글자가 떠올랐다.
‘나는 확인했다.’
동쪽 기록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입을 다문 채 자기 이름과 현재 위치를 적었다. 그 아래에는 ‘직접 본 사실: 물거울에 검은 별이 나타남’이라고 썼다.
남쪽 역참의 기록관은 더 짧은 문장을 남겼다.
‘위 문장을 내가 말하거나 승인했다는 증거는 없음.’
도렌이 열두 장의 이동표를 펼쳤다.
“모든 수령자 칸은 비어 있습니다.”
“전달자도 수령자 칸에 넣지 마십시오. 누가 옮겼는지와 누가 받았는지를 한 줄에 넣으면 안 됩니다.”
카일은 마렌을 바라봤다.
“각 연락소에 보내십시오. 내 얼굴을 기다리지 말고 자기 기록을 쓰라고.”
“목소리 대신 문장을 전달하겠습니다.”
“문장을 전달했다는 사실도 따로 적으십시오. 복사한 말은 자기 진술이 아닙니다.”
마렌은 은판에 문장을 새겼다. 은판이 물거울 앞을 지나자 검은 별의 가장자리가 흔들렸다.
각 장소의 사람들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북부 마을에서는 노인이 자기 이름을 손녀에게 받아 적게 했다. 동쪽 창고에서는 세 기록관이 서로의 판을 보지 않은 채 따로 기록했다. 남쪽 역참의 마부는 검은 별이 떠오른 시각만 적었다.
검은 별이 한 점으로 모이지 않았다.
열여섯 번째 판의 문장이 한 글자 더 늘었다.
‘확인자: 대륙 전체—수령자—’
마렌이 숨을 삼켰다.
“확인자 뒤에 수령자를 붙이려 합니다.”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만 적으십시오. 의도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카일은 판의 가운데를 흰 재로 둘러쌌다.
“하지만 한 사람을 가운데 세우려는 건 분명합니다.”
그때 황궁 쪽 수반 하나가 붉게 번졌다. 검은 별 위로 사람의 입 모양이 생겼다.
“에단. 확인하라.”
레오나가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카일은 그녀보다 먼저 기록판을 뒤집었다.
“이번에는 소리를 쫓지 않습니다. 저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적게 하십시오.”
황궁 지하 봉인실의 동쪽 문틈은 조금 더 벌어져 있었다.
푸른 커튼 너머에 서 있던 그림자는 발밑이 없었다. 그럼에도 문턱을 향해 가까워질 때마다 바닥의 먼지가 한 겹씩 밀렸다.
에단은 세 번째 기록판을 가슴 앞에 세웠다.
“나는 에단이다. 지금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다. 동쪽 접견실로 보이는 문틈과 발밑 없는 그림자를 직접 보고 있다. 나는 누구의 수령자도 아니다.”
그림자가 똑같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나는 에단이다. 지금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다. 나는 누구의 수령자도 아니다.”
에단의 손목에 검은 선이 닿았다. 선은 살을 파고들지 않고 기록판의 마지막 칸으로 향했다.
‘수령자: 에단.’
에단은 붓으로 그 문장 위에 선을 그었다.
“이 표기는 내가 수령자로 동의한 것이 아닙니다.”
선이 종이를 통과해 은판 아래까지 번졌다. 라시안이 벽에 등을 기대고 일어났다.
“내 귀환 위치는 황태자 동쪽 접견실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들어가거나 누군가에게 넘겨지는 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판을 들어 그림자에게 보였다.
“이 문장을 내 수령 동의로 기록하지 마십시오.”
그림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라시안의 목소리가 문틈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귀환 위치를 비워라.”
총서기관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전하를 이곳에 계속 두면 장치가 황궁 전체를 뒤집을 겁니다. 접견실로 옮기면 황실의 통제 아래 둘 수 있습니다.”
에단이 막아섰다.
“직책은 수령자가 아닙니다.”
“그 말만 반복해서 무엇을 지킬 수 있나?”
총서기관은 품 안에서 작은 황실 인장을 꺼냈다. 금속 테두리 안쪽에는 낡은 세 갈래 홈이 파여 있었다.
에단의 시선이 인장에 멈췄다.
“그 문양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황실이 책임을 진다는 표식이네. 내가 이 기록에 책임을 지면 장치도 황실의 명령으로 받아들일 걸세.”
총서기관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장치가 사람을 빼앗는다는 사실보다 인장이 통제권을 돌려줄 수 있다는 쪽을 믿고 싶어 했다.
그는 인장을 기록판 위로 가져갔다. 그림자의 손이 문틈 안쪽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에단은 라시안의 판을 끌어당겼다.
“그 인장은 전하의 동의가 아닙니다. 황실이라는 이름도 전하의 동의가 아닙니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이네.”
“누구를 대신해서요?”
총서기관의 손이 멈췄다. 그림자는 처음으로 문턱에 발 없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북부 초소에서는 검은 별이 물거울마다 다른 크기로 흔들렸다.
카일은 연락소 기록판을 둥글게 배치했다. 가운데에는 아무 판도 놓지 않았다. 각 판에는 이름과 장소가 적혀 있었지만 서로 같은 문장은 하나도 없었다.
마렌이 한 판을 들었다.
“동쪽 창고 기록관. 현재 위치는 동쪽 창고 안쪽. 직접 본 사실은 검은 별과 검은 선. 수령자는 없음.”
“그 판은 중앙에 놓지 마십시오. 본인이 쓴 자리에서 읽게 하십시오.”
유르가 북부 생존자들의 판을 옮겼다.
“각자 자기 이름을 읽을까요?”
“예. 남의 문장을 대신 읽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자기 기록을 읽었다. 문장 사이에는 숨이 끼어들었고 어떤 문장에는 더듬음이 남았다. 검은 별은 그 차이를 따라갔지만 한 사람의 목소리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파멸의 별이 카일의 머릿속에서 웃었다.
―하나를 고르면 된다. 가장 약한 자의 이름을 네가 받아라. 그러면 나머지는 침묵한다.
‘침묵한 사람은 동의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네가 전부 수령해라. 네가 중심이 되면 장치도 너를 놓치지 못한다.
카일은 대답 대신 자기 판을 원 바깥에 놓았다.
‘이름: 카일.’
‘현재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직접 본 사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독립 기록이 작성됨.’
‘수령자: 없음.’
그가 마지막 칸을 쓰자 열여섯 번째 판이 크게 울렸다.
‘수령자가 없는 확인은 회수 대상.’
마렌이 붓을 들고 카일을 바라봤다.
“장치의 규칙입니까?”
“장치가 쓴 문장입니다. 규칙인지 협박인지 아직 모릅니다.”
“그럼 기록에 넣습니까?”
“장치 추정 표기로 넣으십시오. 우리 판단과 섞지 마십시오.”
검은 선 하나가 열여섯 번째 판에서 흘러나왔다. 공동 기록판의 가장자리를 핥은 선은 카일의 손목으로 이어지려 했다.
레오나가 칼날을 그 앞에 세웠다.
“닿게 두지 마십시오.”
“닿게 해야 어디로 움직이는지 봅니다.”
카일은 손목의 흔적을 끌어올렸다. 선의 끝 하나만 검은 자국으로 빨아들였다. 뜨거운 통증이 손바닥에서 팔꿈치까지 번졌다. 가슴 아래의 검은 흔적이 한 줄 더 올라왔다.
그는 힘을 더 쓰지 않았다. 흰 재와 부러진 휘장과 원형의 기록판이 선을 붙잡았다.
검은 별이 잠시 작아졌다. 각 판의 문장은 희미해졌지만 어느 판도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도렌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한 점으로 합쳐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만 기록하십시오.”
카일은 열여섯 번째 판을 바라봤다. 판의 가장자리에서 새 글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최종 수령자:—’
문장이 끝나기 전에 황궁 쪽 수반이 검게 물들었다.
총서기관의 황실 인장이 기록판에 닿았다.
그 순간 그림자가 문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은 사람의 손처럼 보였지만 관절마다 검은 선이 매달려 있었다. 손목 아래에는 외부 인계표와 닮은 세 갈래 절개가 파여 있었다.
에단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같은 문장을 적었다.
‘절개가 유사함. 동일 물질과 제작 주체는 미확인.’
총서기관이 비웃었다.
“지금도 기록 타령인가?”
“지금 기록하지 않으면 당신이 한 행동을 장치의 동의로 바꾸게 됩니다.”
“내 행동은 황실의 명령이다.”
그는 인장을 눌렀다.
판 위의 빈칸이 검게 타들어 갔다.
‘수령자: 총서기관.’
총서기관은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인장의 테두리가 판에 붙었다.
그림자의 손이 총서기관의 팔을 향해 움직였다.
“놓아라!”
에단이 그의 팔을 잡았다. 검은 선이 두 사람의 손목 사이에서 흔들렸다.
“당신이 수령자라고 적힌 사실과 당신이 라시안을 수령할 자격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 손을 놓게!”
라시안이 앞으로 나섰다. 숨이 거칠었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
“나는 총서기관에게 넘겨지는 데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문장을 내 의사로 기록하십시오.”
그림자가 라시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단은 즉시 라시안의 말을 자기 증언과 분리해 적었다.
‘라시안의 직접 진술: 총서기관에게 넘겨지는 데 동의하지 않음.’
‘에단의 관측: 총서기관의 인장이 기록판에 부착됨.’
‘장치 표기: 수령자: 총서기관.’
세 문장이 나란히 놓이자 그림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북부 초소의 열여섯 번째 판에도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수령자: 총서기관.’
카일은 그것을 읽고 웃지 않았다.
“총서기관이 기록판을 만졌습니다.”
마렌이 그의 옆에서 물었다.
“그 행동이 수령자가 된 원인입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표기와 행동의 순서는 기록할 수 있습니다.”
카일은 황궁 쪽 물거울을 향해 손을 들었다. 검은 별이 그의 얼굴을 만들려 했지만 이번에는 얼굴의 절반만 나타났다.
그림자가 총서기관의 팔을 붙잡았다.
동시에 북부 열여섯 번째 판에 마지막 문장이 새겨졌다.
‘회수 시작.’
카일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검은 선이 공동 기록판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 선을 끊으면 총서기관을 놓칠 수 있고 그대로 두면 독립 기록 전체가 하나의 수령자에게 끌려갈 수 있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이번에는 네가 고르면 된다.
카일은 흰 재 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레오나. 내가 수령자가 되지 않게 막으십시오.”
그가 말한 순간 그림자의 손가락이 문턱을 완전히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