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58화: 사기꾼의 마지막 연기
“라시안. 확인하라.”
북부 통로의 열여섯 번째 판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일은 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궁 지하에서 들었던 라시안의 목소리와 같았다. 그러나 숨이 섞이지 않았고 문장 끝은 지나치게 반듯했다.
마렌이 기록판을 펼쳤다.
“직접 발화입니까?”
“아닙니다. 황궁에 있는 라시안은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마렌은 ‘장치로 추정되는 목소리’라고 적었다. 라시안의 이름 옆에는 발화자를 비워 두었다.
금속판들이 차례로 울렸다. 지워진 이름 위로 검은 선이 번지더니 열여섯 번째 판 아래에 새 문장이 솟았다.
‘다음 확인자: 라시안.’
레오나가 검을 뽑았다.
“황궁과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쓰지 마십시오. 황궁의 문장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만 확인됐습니다.”
카일은 칼날 대신 판의 틈을 가리켰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가 통로 벽을 짚었다.
“재현된 이름은 곧 확인된 이름으로 취급됩니다. 누군가 대답하면 그 사람이 이름을 받은 것으로 적힙니다.”
“당신의 경험입니까?”
“열여섯 칸을 관리할 때의 기록입니다. 일반 규칙인지는 모릅니다.”
카일은 그 대답을 믿을 수는 없어도 기록할 수는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공동 기록판을 통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확인 대상: 라시안이라는 이름을 재현한 장치 발화.’
‘실제 인물: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음.’
‘현재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수령자: 없음.’
검은 선이 기록판 위에서 꿈틀거렸다. ‘실제 인물’이라는 문장을 핥던 선은 세 박자 뒤에 황궁 동쪽을 가리켰다.
도렌이 물었다.
“기록으로 막을 수 있는 겁니까?”
“막았다고 쓰지 마십시오.”
카일은 흰 재를 손가락 사이에 집었다.
“기록판에 닿은 뒤 선이 세 박자 늦게 움직였다고 적으십시오. 원인은 아직 모릅니다.”
라우렌은 부러진 단장 휘장을 통로 입구에 세웠다. 절개 안쪽의 검은 가루가 열여섯 번째 판과 같은 박자로 떨렸다.
카일의 발밑에 번진 선이 공동 귀환 위치를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이곳을 떠나면 하렌으로 불린 남자의 기록도 다시 빈 칸으로 밀려날 수 있었다.
파멸의 별이 낮게 웃었다.
―네가 이름을 대신 말하면 된다. 황태자의 이름을 받아 네 귀환 위치를 채워라.
‘이름을 훔치는 건 네 방식이지 내 방식이 아니다.’
카일은 열여섯 번째 판을 바라봤다. 장치는 사람을 끌고 가기 전에 이름부터 혼자 말하고 있었다.
사기꾼은 상대가 증인을 고를 수 없게 만들고 계약서를 먼저 읽어 준다. 이미 결정된 거래라고 착각하게 만든 뒤 질문할 기회를 빼앗는다.
카일은 통로보다 먼저 무대를 바꾸기로 했다.
“마렌. 각 연락소에 문장을 보내십시오. 장치가 말한 이름과 실제 인물의 진술을 구분해서 읽으라고 하십시오.”
도렌이 이동표를 들었다.
“누가 수령합니까?”
“아무도 수령하지 않습니다. 기록만 전달합니다.”
카일은 통로 밖의 별 깃발을 바라봤다.
“오늘 밤 연결된 곳들이 증인이 됩니다.”
레오나가 그의 옆에 섰다.
“사람을 이곳으로 부를 수는 없습니다.”
“부르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보게 합니다.”
황궁 지하 봉인실에서 라시안은 벽의 두 번째 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확인자: 라시안.’
총서기관이 문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를 동쪽 접견실로 옮기겠습니다.”
에단이 문 앞을 막았다.
“귀환 위치는 동쪽 접견실입니다. 현재 목적지는 봉인실입니다. 수령자는 비어 있습니다.”
“나는 황실의 총서기관이네.”
“직책은 수령자가 아닙니다.”
라시안은 기침을 참으며 공동 기록판 앞으로 걸어갔다. 목 아래의 검은 선이 열여섯 번째 박자마다 조여 왔다.
“내가 직접 말하면 장치가 그 말을 가져갑니까?”
“그럴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한다고 장치가 이름을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라시안은 붓을 들었다.
‘이름: 라시안.’
‘역할: 오레스 제국 황태자.’
‘현재 위치: 황궁 지하 봉인실.’
‘귀환 위치: 황태자 동쪽 접견실.’
‘수령자: 없음.’
‘본인의 동의 없는 이동을 거부함.’
그는 마지막 줄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나는 라시안입니다. 나는 황태자입니다. 나는 지금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습니다. 돌아갈 곳은 황태자 동쪽 접견실로 정했지만 나를 받는 수령자는 없습니다. 내 동의 없는 이동을 거부합니다.”
두 번째 홈이 밝아졌다.
총서기관이 웃었다.
“보았나? 전하께서 직접 확인하셨네.”
에단이 기록판을 덮었다.
“확인된 건 라시안이 자기 이름과 조건을 진술했다는 사실입니다. 수령자로 동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시안은 숨을 몰아쉬었다. 장치의 글자는 꺼지지 않았지만 ‘다음 확인자’의 선이 한 칸 뒤로 물러났다.
에단은 지방 구호망에서 쓰던 작은 은판을 꺼냈다. 라시안의 진술을 한 글자도 바꾸지 않고 옮겼다.
“이걸 북부에 보내겠습니다.”
“황태자의 병과 장치를 대륙에 공개하겠다는 말인가?”
라시안이 총서기관을 바라봤다.
“이미 장치는 제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이제 제 목소리를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벽 안쪽에서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귀환 위치를 비워라.”
라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단은 그 침묵을 따로 기록했다.
‘장치 추정 발화 뒤 라시안은 답하지 않음.’
두 번째 홈은 밝아졌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북부 초소 연락소에는 남쪽 역참의 경로를 확인하던 물거울 열두 개가 놓여 있었다. 동쪽 창고와 북부 마을에도 같은 모양의 은판과 수반이 남아 있었다.
마렌은 각 거울 앞에 공동 기록판을 세웠다.
“환각을 보내면 사람들이 교주님의 말을 계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카일은 수반의 상태를 하나씩 확인했다. 어느 물은 맑았고 어느 물에는 검은 먼지가 떠 있었다.
“환각은 물거울에 얼굴을 보낼 뿐입니다. 말의 출처는 각 연락소 기록관이 확인합니다. 라시안의 문장은 에단이 읽고 황궁의 위치와 시각을 함께 적습니다.”
“닿지 않는 곳은 어떻게 합니까?”
“닿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도렌은 열두 장의 이동표를 펼쳤다. 모든 수령자 칸이 비어 있었다.
“물거울을 보는 사람도 전달받는 사람도 수령자가 아닙니다.”
“좋습니다.”
카일은 라우렌에게 별 깃발을 세우게 했다. 유르는 열여섯 번 울릴 종줄을 잡았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는 통로 밖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확인했다.
“왜 이렇게까지 합니까?”
“장치는 한 사람을 침묵시킨 뒤 그 이름으로 모두를 부르려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말할 차례를 잃습니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공포를 보여라. 검은 문과 황태자의 병과 북부의 실종을 한 장면에 넣어라. 무릎 꿇은 사람의 믿음은 깊다.
‘무릎 꿇은 사람은 선택한 게 아니다.’
―선택하지 않는 자는 버려진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게 말할 거다.’
카일은 손목에 남은 검은 흔적을 끌어올렸다. 통로의 금속판에서 흘러나온 선이 물거울 열두 개에 얇은 막으로 퍼졌다.
머릿속에 각지의 숨소리가 겹쳤다. 굶주린 아이의 울음과 피난민의 기침과 황궁 지하의 억눌린 호흡이었다.
카일은 이를 악물었다.
“이건 신호만 만듭니다. 기도는 각자가 합니다.”
그는 마렌에게 마지막 문장을 건넸다.
“누구도 카일의 수령자가 아니며 누구도 라시안의 수령자가 아니다. 자기 이름과 현재 위치와 돌아갈 곳을 기록한 뒤에야 기도할 수 있다고 읽으십시오.”
“기도를 명령하지 않는 겁니까?”
“명령한 기도는 그놈의 먹이가 됩니다.”
열여섯 번째 종이 울렸다.
대륙 곳곳의 연결된 연락소에서 물거울이 검게 물들었다.
남쪽 역참의 마부가 손을 놓쳤고 동쪽 창고의 기록관이 펜을 멈췄다. 북부 마을의 우물물 위에도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검은 옷자락을 두른 카일이었다. 뒤에는 별빛처럼 보이는 붉은 점이 떠 있었지만 얼굴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지금 보이는 얼굴을 신의 계시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이건 기록을 읽기 위한 무대입니다.”
각 연락소의 기록관들이 먼저 문장을 읽었다.
“장치 추정 발화. ‘라시안. 확인하라.’ 실제 라시안은 황궁 지하 봉인실에 있음.”
카일은 환영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라시안은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그가 돌아갈 곳을 정한 사실은 기록됐습니다. 그러나 그를 받는 수령자는 없습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대신 말해도 그것은 그의 동의가 아닙니다.”
황궁 쪽 수반에서 에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라시안의 진술을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동을 조건 없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라시안의 목소리로 기록된 문장이 짧게 겹쳤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북부 통로의 열여섯 번째 판이 울렸다.
‘다음 확인자: 라시안.’
카일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제 여러분의 이름을 말하십시오. 어디에 있는지 말하십시오. 돌아갈 곳을 말하십시오. 누구의 수령자도 되지 않겠다고 말할 사람은 그렇게 기록하십시오.”
북부 마을의 한 노인이 자기 이름을 말했다. 남쪽 역참에서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현재 위치를 읽었다. 동쪽 창고에서는 기록관 셋이 서로의 이름을 확인했다.
문장들은 짧고 서로 달랐다. 물거울 위의 붉은 점은 그 소리마다 한 번씩 흔들렸다.
―봐라. 전부 네 앞에 무릎 꿇는다.
‘아직 아무도 무릎 꿇지 않았다.’
카일은 환영의 손을 들어 올렸다.
“기도할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하지 않을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주지는 마십시오.”
그 순간 물거울 아래쪽에 검은 글자가 떠올랐다.
‘다음 확인자: 라시안.’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황궁에서 라시안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확인자는 한 사람이 아닙니다.”
에단은 그 문장을 기록했다. 북부 통로의 열다섯 금속판이 동시에 빛났다.
지워진 이름 위로 새로운 글자가 밀려 올라왔다.
‘확인자: 대륙 전체—’
문장은 끝나지 않았다. 그 문장이 사람들의 말 때문에 바뀐 것인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카일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를 대신해 모든 물거울에서 검은 별 하나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