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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57화

구원자가 된 악신(惡神)의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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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공란을 지키는 사람

“확인자의 귀환 위치를 말하라.”

돌담 안쪽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카일의 것이었다. 그러나 카일의 입술은 닫혀 있었다.

레오나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밖으로 나가십시오.”

“아직 안 됩니다.”

카일의 발밑에 그어진 흰 재가 검게 젖었다. 검은 선 하나가 재의 경계를 따라 돌다가 그의 발목을 향해 기어왔다. 손목과 목 아래에 번진 흔적도 같은 박자로 꿈틀거렸다.

“귀환 위치를 말하지 않으면 두 번째 인계가 끝난다고 했습니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장소가 입구가 됩니다.”

마렌은 곧바로 공동 기록판을 바닥에 놓았다.

‘현재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귀환 위치: 공란.’

‘수령자: 없음.’

그녀는 세 문장을 서로 다른 칸에 나눠 적었다.

“현재 위치를 적는 건 귀환 위치를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확인한 건 그 차이입니다.”

도렌이 검은 선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수취 전 대기 양식에서는 두 칸을 붙여 쓰게 했습니다. 대기자의 현재 위치를 귀환 위치처럼 적은 뒤 수령자 칸을 열었습니다.”

“그걸 누가 가르쳤습니까?”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 적지 않으면 기록이 완료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카일은 금속판을 내려다봤다.

‘확인자: 카일.’

‘두 번째 수취인: 카일.’

‘귀환 위치: 공란.’

장치가 요구하는 건 장소 하나였다. 그 장소를 적는 순간 자신의 이름과 장소가 한 줄로 묶일 수 있었다.

“그럼 적지 않겠습니다.”

카일은 흰 재 밖으로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레오나가 검을 뽑아 검은 선 앞에 세웠다. 칼날이 선을 건드리자 쇠를 긁는 소리가 돌담 전체로 번졌다.

“검으로 자를 수 없습니다.”

“자르려는 게 아닙니다. 발을 묶는 겁니다.”

“선은 발을 묶는 게 아니라 이름을 끌고 있습니다.”

하렌이 말했다.

그는 돌담 밖에 나와 있었지만 어깨는 여전히 안쪽을 향했다. 유르가 그의 등을 받쳤고 라우렌은 공동 귀환 위치의 경계선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은 이런 상황을 겪었습니까?”

카일이 물었다.

“정확히 같은 상황인지는 모릅니다. 첫 번째 칸을 확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이름과 현재 위치를 말했습니다. 열여섯 번째 박자가 끝나자 바닥이 열렸습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뒤 기록에는 그 사람이 수령자로 적혔습니다. 이름을 말한 것과 사라진 것의 순서는 기억합니다.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마렌이 그 말을 기록했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의 기억: 확인자가 자기 이름과 현재 위치를 말한 뒤 열여섯 번째 박자 뒤 바닥이 열림.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음. 인과는 미확인.’

카일은 금속판의 공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공란은 동의가 아닙니다.”

그 순간 카일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겹쳤다.

“귀환 위치를 비워라.”

레오나의 칼끝이 그의 목 아래를 향했다. 카일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장치의 발화로 기록하십시오.”

마렌은 떨리는 손으로 그 문장을 적었다.

카일은 처음으로 자신이 혼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검은 선은 그의 이름을 붙잡고 있었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아직 각자의 이름과 위치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마렌은 하렌으로 불린 남자를 공동 기록판 앞에 앉혔다.

“이름을 어떻게 적을까요?”

“하렌이라고 불리던 기록관.”

“본인이 하렌이라고 확정합니까?”

남자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관리하던 열여섯 칸에는 하렌이라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내 몸에 붙어 있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도렌이 장부 모양의 철판을 펼쳤다.

“기록관이라면 수취 전 대기 양식의 세 번째 칸 뒤에 무엇을 적었습니까?”

하렌은 철판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현재 위치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를 적었습니다. 돌아올 곳은 당사자가 동의한 뒤에 적었습니다.”

도렌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배운 방식과 다릅니다.”

“그래서 틀린 방식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누구에게요?”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검은 장갑을 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귀환 위치가 없는 사람을 대기자로 남겨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 수령자를 적었습니까?”

“아니요. 그때부터 내가 첫 번째 칸에 들어갔습니다.”

하렌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정화 뒤 남은 흰 자국 사이로 검은 점이 하나씩 올라왔다.

“확인자는 한 명이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한 명이면 장치도 그 한 명만 기억했습니다.”

카일이 물었다.

“여러 사람이 확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한 사람을 수령자로 적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간이 생겼을 뿐입니다. 멈춘 건 아닙니다.”

“그건 당신이 겪은 사례입니까?”

“예.”

“전체 장치의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카일은 그 대답을 듣고서야 남자의 목소리와 돌담 안쪽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장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는 자신의 기억이 끊긴 부분을 숨기지 않았다.

라우렌이 공동 기록판 옆에 무릎을 굽혔다.

“그러면 확인 행위를 여러 사람이 나눠 갖는 건 시간을 버는 방법일 뿐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렌이 말했다.

“내가 안에 갇혀 있을 때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기록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르가 생존자들을 돌아봤다. 사람들은 흰 재의 선 뒤에서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중 한 여자가 가족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공동 귀환 위치에 우리 이름을 쓰면 우리도 수령자가 됩니까?”

카일이 대답했다.

“수령자는 쓰지 않습니다. 이름과 현재 위치와 동의만 남깁니다.”

“그럼 교주님은요?”

카일은 금속판을 내려다봤다.

“내 귀환 위치도 수령자 없이 정하겠습니다.”

레오나가 바로 반박했다.

“그 장소가 입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보는 곳으로 정합니다.”

카일은 라우렌에게 단장 휘장을 달라고 했다. 라우렌은 잠시 휘장을 내려다보다가 건넸다. 금빛 장식은 부러져 있었고 안쪽 세 갈래 절개에는 검은 가루가 남아 있었다.

“이것이 경계를 붙잡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보장이 아니라 관측점으로 씁니다.”

카일은 휘장을 흰 재의 선 바깥에 놓았다. 검은 가루가 돌담의 절개와 맞물려 낮게 떨렸다.

마렌이 물었다.

“귀환 위치를 어디에 적습니까?”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도렌이 수령자 칸을 가렸다.

“수령자는 없음.”

라우렌이 공동 기록판에 서명했다.

“현재 위치는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입니다. 나는 누구의 수령자도 아닙니다.”

유르도 같은 문장을 적었다. 마렌은 확인 시각을 남겼고 레오나는 경계선의 위치를 적었다. 하렌으로 불린 남자는 손을 떨면서도 자기 이름을 대신할 표현을 썼다.

‘생존 반응 확인자. 신원 미확정. 공동 귀환 위치에 머무는 데 동의함.’

마지막으로 카일이 펜을 들었다.

‘확인 행위: 공동 기록.’

그는 금속판의 공란에 직접 쓰지 않았다. 공동 기록판에 적힌 문장을 모두가 읽는 동안 금속판이 저절로 빛났다.

‘귀환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검은 선이 카일의 발목에서 떨어졌다. 대신 돌담 아래가 갈라졌다.

레오나가 카일을 뒤로 밀었다.

“입구가 열립니다.”

“모두 흰 재 뒤로.”

카일은 손을 들었다. 검은 선을 흡수하지 않고 두 갈래로 갈라 기록판과 금속판 사이에 묶었다. 목 아래의 흔적이 타올랐지만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파멸의 별이 속삭였다.

―이제 네가 돌아올 곳을 가졌다.

‘돌아올 곳과 데려갈 사람은 다르다.’

―장치는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카일은 속삭임을 따라 힘을 키우지 않았다. 라우렌의 휘장과 흰 재와 공동 기록판이 놓인 세 지점을 차례로 바라봤다.

“장소는 공개됐습니다. 수령자는 없습니다. 동의하지 않은 인계는 없습니다.”

카일의 목소리와 장치의 목소리가 겹쳤다. 이번에는 레오나가 먼저 말했다.

“교주님이 한 말인지 장치가 한 말인지 나눠 적겠습니다.”

마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담의 틈이 넓어졌다. 안쪽에는 좁은 통로와 금속판 열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판은 이름이 긁혀 지워져 있었다. 한 판에는 ‘확인자’라는 글자만 남았고 다른 판에는 ‘귀환 위치 없음’이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통로 끝의 열여섯 번째 판에는 새로운 글자가 떠올랐다.

‘황태자 동쪽 접견실.’

카일의 손끝이 굳었다.

그 문장은 북부의 돌담 안쪽에서 황궁의 장치와 연결됐다는 증명이 아니었다. 다만 장치가 황궁에서 사용된 귀환 위치를 이곳에도 표기했다는 사실만 확인됐다.

금속판의 두 번째 홈이 멀리서 울리는 듯 낮게 떨렸다.

공동 귀환 위치는 문제를 해결한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을 데려갈 수령자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감시할 수 있게 만든 임시 경계였다.


황궁 지하 봉인실에서 에단은 공동 기록판의 빈 줄을 확인하고 있었다.

라시안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손목의 검은 선은 조금 옅어졌지만 목 아래의 흔적은 열여섯 번째 박자마다 진해졌다.

“북부에서 카일의 귀환 위치를 정한 것 같습니다.”

에단이 말했다.

“정했다는 건 그가 수령자가 됐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장소와 수령자는 따로 기록됐을 겁니다.”

“장치가 그 차이를 받아들일까요?”

에단은 대답하지 못했다.

봉인실 벽의 두 번째 홈이 밝아졌다. 글자가 한 줄씩 바뀌었다.

‘두 번째 수취인: 카일.’

‘귀환 위치: 북부 초소 서쪽 돌담 아래 공동 귀환 위치.’

에단은 즉시 기록했다.

‘수령자: 없음.’

총서기관이 뒤에서 다가왔다.

“황태자를 접견실로 옮겨야 합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라시안이 그를 바라봤다.

“새 목적지와 책임자와 귀환 위치를 적으십시오.”

“나는 총서기관입니다. 황궁에서 내 명령은—”

“직책은 수령자가 아닙니다.”

라시안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끌어왔다.

‘현재 위치: 황궁 지하 봉인실.’

‘귀환 위치: 황태자 동쪽 접견실.’

‘수령자: 없음.’

‘본인은 위 조건을 바꾸지 않은 채 조사에 남는 데 동의함.’

그는 마지막 문장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본인의 동의 없는 이동을 거부함.’

에단이 증인으로 서명했다. 총서기관은 그 종이를 뺏지 못했다.

열여섯 번째 박자가 지나갔다.

두 번째 홈의 글자가 다시 흔들렸다.

‘귀환 위치 확인.’

에단은 그 문장을 원인으로 해석하지 않고 발생 시각만 적었다. 북부에서 같은 위치가 표기된 사실과 이 반응이 어떤 관계인지 아직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다음 확인자: 라시안.’

에단의 붓끝에서 먹이 떨어졌다.

라시안은 자신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이번에는 누가 나를 확인합니까?”

북부 통로 안쪽에서 같은 시각에 목소리가 울렸다.

“라시안. 확인하라.”

카일은 통로 입구에 선 채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목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귀환 위치는 황태자 동쪽 접견실.”

카일은 공동 기록판을 움켜쥐었다. 장소는 정해졌지만 사람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장치는 이미 다음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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